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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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3-07-22 10:38
♡♥♡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 행1:6-11
*** 들어가는 말
‘망부석’ 이야기를 아시지요? 망부석의 전설은 여러 지방에서 전하는 것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신라 눌지 왕 때의 ‘박제상’의 아내에 대한 전설이 있습니다.
실성왕 원년에 왜국과 강화 조약을 맺었는데, 왜왕은 내물 왕자인 미사흔을 인질로 보내라고 요구했습니다. 실성 왕은 두말 않고 아들 미사흔을 인질로 보냈습니다. 후에 눌지 왕이 된 실성왕은 아들을 구하기 위하여 지략과 용맹이 뛰어난 ‘박제상’을 왜국으로 보냈습니다. 박제상은 임무를 위하여 아내 몰래 율포 항에서 출항했는데,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박제상의 아내가 포구로 달려가 통곡하며 “잘 다녀오시오.”라고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박제상은 지략으로 왕자를 구출하고 자신은 체포되어 죽음을 당하여 돌아오지를 못했습니다. 박제상의 아내는 수릿재에 올라 높은 바위 위에서 멀리 왜국을 바라보면서 남편을 기다리다가 그대로 바위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바위를 후대의 사람들이 ‘망부석’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망부석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서 늘 무엇인가를 기다리며 살기 때문에 공감대를 형성한 것입니다. 오늘의 사람들도 무엇인가를 기다리면서 삽니다. 자식을 기다리고, 자녀가 성장하기를 기다리고, 출세를 기다리고, 사업의 성공을 기다리고, 행복의 날을 기다립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기다립니까?
본문의 앞 구절에서는 승천을 앞 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즉 보혜사 ‘성령’의 임재를 기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그 기다림에 대하여 주님께서 특별한 것을 가르치십니다. 이 시간에는 주님께서 하신 이 특별한 가르침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먼저, 본문의 배경과 이에 비교되는 오늘의 배경을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죽으심을 세 번 예고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는 천사를 통하여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말씀대로 예수님은 실망한 마음으로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는 제자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몇 날 후에 예루살렘에서 그들을 만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일련의 말씀과 약속들은 제자들의 믿음과 복종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승천을 앞 둔 예수님은 늘 기도하셨던 장소인 감람원이라는 작은 산에서 제자들을 다시 만나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자신들의 관심사를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 이 질문에는 제자들뿐만 아니라 온 유대 민족의 기대와 소망이 담겨있습니다.
지금 로마의 속국으로서 고통 받고 있는 유대 민족은 다윗 왕이나 솔로몬 왕의 때처럼 예수님께서 로마를 물리치고 세계에서 뛰어난 나라로 일으켜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처럼 바라는 이유는 이미 오래 전부터 예언자들을 통하여 메시아를 보내주신다는 예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던 예수님을 ‘호산나’라고 외치며 환영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고 모든 유대 민족이 지금 기다리고 있는 것은 민족을 일으키고 독립된 나라를 세울 메시아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 기대를 지금 이루실 것인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전에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하여 여러 번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오늘에 와서는 성도들의 기대가 제자들과 흡사합니다. 성도들은 말씀을 근거로 해서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병도 고침을 받고, 사업도 성공하고, 자녀도 잘 되는 ‘만사형통’을 기대합니다. 내가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고 봉사하면 당장이라도 그 행복이 주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주님, 이제 우리 가정을, 사업을, 건강을 회복시켜주시렵니까?’라고 묻는 것 같습니다.
만일 이러한 마음이라면, 제자들도 우리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되지 않는 한 영광은 없는 것처럼 생각하며, 자신들에게 세상 권력이 주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순전히 사람의 생각이며 오해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성도가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세상적으로도 성공을 기대하는 것은 자칫 사람의 생각이며 오해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오해를 바로잡기 위하여 특별한 가르침을 하셨습니다.
1. 기다리는 사람은 인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자 ‘한 자리 하겠다.’고 생각했던 제자들의 기대는 모두 무너졌습니다. 실망과 낙담으로 인하여 제자들은 살 길을 찾아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나는 고기나 잡으러 가련다.”라고 베드로가 나서자 제자들은 저마다 “나도, 나도”하면서 함께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그러다가 갈릴리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서는 다시 그 기대가 솟아올랐습니다. 재빨리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제자들은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 때입니까?”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이 물음을 한 번만 한 것이 아님을 문장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집요하게 물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거듭 졸라댄 것입니다. 주님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신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 알 바 아니요.”라고 그들의 관심을 단호하게 끊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이 기대하는 그날은 하나님의 특권에 속한 것이므로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뜻입니다. 그날이야말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의 능력 안에 두신 날’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닥쳐올 때와 시기에 대해 알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때”(크로노스, crovnou", the time)와 “기한”(카이로스, kairou;", the seasons)은 시간을 나타내는 단어들입니다. 즉 “때”는 ‘특별한 기간’, ‘계절’ 등의 일정한 시간의 지속을 의미하며, “기한”은 ‘적당한 때’, ‘정해진 어느 순간’을 의미합니다. 즉 인간 세상에 통용되는 모든 시간과 기회는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사람들도 자신의 미래를 알기 위해서 철학관을 찾고, 점쟁이를 찾습니다. 성도들은 예언한다고 하는 사람을 찾아다니며 기도 받으러 다닌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분수를 넘은 어리석고 위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일의 때와 기한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루실 때를 인내로 기다려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을 잊지 마십시오. 사울 왕은 예배를 집전할 사무엘 선지자를 기다리다 지쳐서, 분수를 넘어 자신이 예배를 집전했습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께 버림받는 참담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누가복음21:19절에서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고 하셨으며, 야고보서1:4절에서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2. 기다리는 사람은 바른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때와 기한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말씀하심으로서 제자들의 잘못된 관심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이 마땅히 가져야할 바른 관심이 무엇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오랫동안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해 오던 외국인 선교사가 한국을 떠나면서 “한국교회는 십자가에 대해 거부적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즉 구원받아 축복받고 잘 살려는 관심이지, 십자가나 십자가로 인하여 주어지는 영원한 삶에 대한 관심은 멀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작곡가인 ‘리스트’의 일화입니다.
어느 날, 리스트는 집에 놀러온 친구와 음악에 대하여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진지하게 대화를 했습니다. 한참이 지난 후에 친구는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하면서 돌아갈 뜻을 비쳤고, 리스트는 친구와 함께 걸어가며 역까지 전송했습니다. 그런데 걸어가는 도중에 갑자기 날이 어두워지더니 소나기가 쏟아졌습니다.
그런데 리스트는 비를 피할 생각도 않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계속 작곡이야기만 했습니다. 이야기를 듣던 친구가 “이렇게 소나기가 오는데도 이야기만 하느냐?”고 하자, 리스트는 “날씨가 나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듯, 나도 날씨에는 관심이 없다네. 내 머리 속에는 음악뿐이네.”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음악가처럼, 그리스도인은 어떤 환경이나 상황에서도 오직 예수님께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삼년 동안이나 동고동락하며 가르치셨던 제자들이 세상적인 일에나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신 주님은 그 관심을 하나님께로 돌리셨습니다. 즉 제자들이 성령 충만함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의 성도가 세상에서 먹고 사는 일에 분주해 있음을 주님은 아십니다. 그래서 마태복음6:31-3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음식과 의복을 쌓아 두려고 걱정하지 말라. 왜 그런 것에 마음을 쏟고 자랑을 늘어놓는 이방인처럼 되려고 하느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신다. 만일 너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이룰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일을 어떻게 실천할까 고민하면서 그분을 생활의 중심에 모시고 살면, 그분은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을 더불어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너희의 내일 일도 돌보아주실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의 것으로 족하다.”고 하셨습니다.
3. 기다리는 사람은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른 관심을 가르치시고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승천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멍하게 주님이 사라지신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천사들이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살면서 가져야 하는 소망을 말씀합니다.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라는 말씀은 어정쩡한 태도로 계속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제자들에 대한 일종의 책망입니다. 지금 제자들의 머리에는 온갖 상상들이 나래를 펴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엇인가를 놓친 듯 하고, 잃어버린 듯한 감정에 빠진 제자들의 귀에 천사를 통한 하나님의 책망이 들렸습니다. 그들은 방금 전에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예수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자신들의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기다림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할일도 못하면서 마냥 기다리는 사람도 있으며, 이런 저런 일로 무료함을 달래며 기다리는 사람도 있으며, 꾸준히 자신의 일을 하면서 기다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전에 신학교를 다닐 때에 지하철을 타고 다녔습니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면 신문이나 책을 읽는 사람, 핸드폰으로 통화하는 사람, 무엇인가 골똘하게 생각하는 사람, 무료하게 발로 바닥을 툭툭치는 사람, 할일 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사람 등. 가지각색입니다. 이는 모든 기다림에서 나타나는 그 사람의 특색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기를 소망하는 성도들이 마냥 주님만을 바라보며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진정으로 자신의 소망이 이루기를 원한다면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영의 일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성령의 임재를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마냥 무료하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일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을 받은 후에는 주님의 증인으로서의 삶이 주어졌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것도 같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기 전에 먼저 기도하며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내 마음에 들어오신 후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증인으로서의 삶은 입술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생활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뜻대로 순종하며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며, 선한 일에 힘씀으로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그렇게 사셨으며, 우리가 그렇게 살 때에 주님의 증인으로서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소망하는 사람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때가 이르기를 인내하며 기다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도록 바른 관심을 가지며, 힘써 주어진 일에 힘쓰면서 소망이 이루기를 기다리는 신실한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망부석’ 이야기를 아시지요? 망부석의 전설은 여러 지방에서 전하는 것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신라 눌지 왕 때의 ‘박제상’의 아내에 대한 전설이 있습니다.
실성왕 원년에 왜국과 강화 조약을 맺었는데, 왜왕은 내물 왕자인 미사흔을 인질로 보내라고 요구했습니다. 실성 왕은 두말 않고 아들 미사흔을 인질로 보냈습니다. 후에 눌지 왕이 된 실성왕은 아들을 구하기 위하여 지략과 용맹이 뛰어난 ‘박제상’을 왜국으로 보냈습니다. 박제상은 임무를 위하여 아내 몰래 율포 항에서 출항했는데,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박제상의 아내가 포구로 달려가 통곡하며 “잘 다녀오시오.”라고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박제상은 지략으로 왕자를 구출하고 자신은 체포되어 죽음을 당하여 돌아오지를 못했습니다. 박제상의 아내는 수릿재에 올라 높은 바위 위에서 멀리 왜국을 바라보면서 남편을 기다리다가 그대로 바위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바위를 후대의 사람들이 ‘망부석’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망부석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서 늘 무엇인가를 기다리며 살기 때문에 공감대를 형성한 것입니다. 오늘의 사람들도 무엇인가를 기다리면서 삽니다. 자식을 기다리고, 자녀가 성장하기를 기다리고, 출세를 기다리고, 사업의 성공을 기다리고, 행복의 날을 기다립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기다립니까?
본문의 앞 구절에서는 승천을 앞 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즉 보혜사 ‘성령’의 임재를 기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그 기다림에 대하여 주님께서 특별한 것을 가르치십니다. 이 시간에는 주님께서 하신 이 특별한 가르침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먼저, 본문의 배경과 이에 비교되는 오늘의 배경을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죽으심을 세 번 예고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는 천사를 통하여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말씀대로 예수님은 실망한 마음으로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는 제자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몇 날 후에 예루살렘에서 그들을 만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일련의 말씀과 약속들은 제자들의 믿음과 복종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승천을 앞 둔 예수님은 늘 기도하셨던 장소인 감람원이라는 작은 산에서 제자들을 다시 만나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자신들의 관심사를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 이 질문에는 제자들뿐만 아니라 온 유대 민족의 기대와 소망이 담겨있습니다.
지금 로마의 속국으로서 고통 받고 있는 유대 민족은 다윗 왕이나 솔로몬 왕의 때처럼 예수님께서 로마를 물리치고 세계에서 뛰어난 나라로 일으켜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처럼 바라는 이유는 이미 오래 전부터 예언자들을 통하여 메시아를 보내주신다는 예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던 예수님을 ‘호산나’라고 외치며 환영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고 모든 유대 민족이 지금 기다리고 있는 것은 민족을 일으키고 독립된 나라를 세울 메시아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 기대를 지금 이루실 것인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전에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하여 여러 번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오늘에 와서는 성도들의 기대가 제자들과 흡사합니다. 성도들은 말씀을 근거로 해서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병도 고침을 받고, 사업도 성공하고, 자녀도 잘 되는 ‘만사형통’을 기대합니다. 내가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고 봉사하면 당장이라도 그 행복이 주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주님, 이제 우리 가정을, 사업을, 건강을 회복시켜주시렵니까?’라고 묻는 것 같습니다.
만일 이러한 마음이라면, 제자들도 우리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되지 않는 한 영광은 없는 것처럼 생각하며, 자신들에게 세상 권력이 주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순전히 사람의 생각이며 오해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성도가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세상적으로도 성공을 기대하는 것은 자칫 사람의 생각이며 오해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오해를 바로잡기 위하여 특별한 가르침을 하셨습니다.
1. 기다리는 사람은 인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자 ‘한 자리 하겠다.’고 생각했던 제자들의 기대는 모두 무너졌습니다. 실망과 낙담으로 인하여 제자들은 살 길을 찾아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나는 고기나 잡으러 가련다.”라고 베드로가 나서자 제자들은 저마다 “나도, 나도”하면서 함께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그러다가 갈릴리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서는 다시 그 기대가 솟아올랐습니다. 재빨리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제자들은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 때입니까?”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이 물음을 한 번만 한 것이 아님을 문장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집요하게 물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거듭 졸라댄 것입니다. 주님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신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 알 바 아니요.”라고 그들의 관심을 단호하게 끊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이 기대하는 그날은 하나님의 특권에 속한 것이므로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뜻입니다. 그날이야말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의 능력 안에 두신 날’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닥쳐올 때와 시기에 대해 알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때”(크로노스, crovnou", the time)와 “기한”(카이로스, kairou;", the seasons)은 시간을 나타내는 단어들입니다. 즉 “때”는 ‘특별한 기간’, ‘계절’ 등의 일정한 시간의 지속을 의미하며, “기한”은 ‘적당한 때’, ‘정해진 어느 순간’을 의미합니다. 즉 인간 세상에 통용되는 모든 시간과 기회는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사람들도 자신의 미래를 알기 위해서 철학관을 찾고, 점쟁이를 찾습니다. 성도들은 예언한다고 하는 사람을 찾아다니며 기도 받으러 다닌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분수를 넘은 어리석고 위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일의 때와 기한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루실 때를 인내로 기다려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을 잊지 마십시오. 사울 왕은 예배를 집전할 사무엘 선지자를 기다리다 지쳐서, 분수를 넘어 자신이 예배를 집전했습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께 버림받는 참담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누가복음21:19절에서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고 하셨으며, 야고보서1:4절에서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2. 기다리는 사람은 바른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때와 기한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말씀하심으로서 제자들의 잘못된 관심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이 마땅히 가져야할 바른 관심이 무엇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오랫동안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해 오던 외국인 선교사가 한국을 떠나면서 “한국교회는 십자가에 대해 거부적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즉 구원받아 축복받고 잘 살려는 관심이지, 십자가나 십자가로 인하여 주어지는 영원한 삶에 대한 관심은 멀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작곡가인 ‘리스트’의 일화입니다.
어느 날, 리스트는 집에 놀러온 친구와 음악에 대하여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진지하게 대화를 했습니다. 한참이 지난 후에 친구는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하면서 돌아갈 뜻을 비쳤고, 리스트는 친구와 함께 걸어가며 역까지 전송했습니다. 그런데 걸어가는 도중에 갑자기 날이 어두워지더니 소나기가 쏟아졌습니다.
그런데 리스트는 비를 피할 생각도 않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계속 작곡이야기만 했습니다. 이야기를 듣던 친구가 “이렇게 소나기가 오는데도 이야기만 하느냐?”고 하자, 리스트는 “날씨가 나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듯, 나도 날씨에는 관심이 없다네. 내 머리 속에는 음악뿐이네.”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음악가처럼, 그리스도인은 어떤 환경이나 상황에서도 오직 예수님께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삼년 동안이나 동고동락하며 가르치셨던 제자들이 세상적인 일에나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신 주님은 그 관심을 하나님께로 돌리셨습니다. 즉 제자들이 성령 충만함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의 성도가 세상에서 먹고 사는 일에 분주해 있음을 주님은 아십니다. 그래서 마태복음6:31-3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음식과 의복을 쌓아 두려고 걱정하지 말라. 왜 그런 것에 마음을 쏟고 자랑을 늘어놓는 이방인처럼 되려고 하느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신다. 만일 너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이룰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일을 어떻게 실천할까 고민하면서 그분을 생활의 중심에 모시고 살면, 그분은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을 더불어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너희의 내일 일도 돌보아주실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의 것으로 족하다.”고 하셨습니다.
3. 기다리는 사람은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른 관심을 가르치시고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승천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멍하게 주님이 사라지신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천사들이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살면서 가져야 하는 소망을 말씀합니다.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라는 말씀은 어정쩡한 태도로 계속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제자들에 대한 일종의 책망입니다. 지금 제자들의 머리에는 온갖 상상들이 나래를 펴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엇인가를 놓친 듯 하고, 잃어버린 듯한 감정에 빠진 제자들의 귀에 천사를 통한 하나님의 책망이 들렸습니다. 그들은 방금 전에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예수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자신들의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기다림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할일도 못하면서 마냥 기다리는 사람도 있으며, 이런 저런 일로 무료함을 달래며 기다리는 사람도 있으며, 꾸준히 자신의 일을 하면서 기다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전에 신학교를 다닐 때에 지하철을 타고 다녔습니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면 신문이나 책을 읽는 사람, 핸드폰으로 통화하는 사람, 무엇인가 골똘하게 생각하는 사람, 무료하게 발로 바닥을 툭툭치는 사람, 할일 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사람 등. 가지각색입니다. 이는 모든 기다림에서 나타나는 그 사람의 특색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기를 소망하는 성도들이 마냥 주님만을 바라보며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진정으로 자신의 소망이 이루기를 원한다면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영의 일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성령의 임재를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마냥 무료하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일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을 받은 후에는 주님의 증인으로서의 삶이 주어졌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것도 같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기 전에 먼저 기도하며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내 마음에 들어오신 후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증인으로서의 삶은 입술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생활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뜻대로 순종하며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며, 선한 일에 힘씀으로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그렇게 사셨으며, 우리가 그렇게 살 때에 주님의 증인으로서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소망하는 사람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때가 이르기를 인내하며 기다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도록 바른 관심을 가지며, 힘써 주어진 일에 힘쓰면서 소망이 이루기를 기다리는 신실한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