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보는 사람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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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3-07-13 21:13
♡♥♡ 미래를 보는 사람 / 몬1:8-18
*** 들어가는 말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세상에 낙을 두고 사는 사람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생활의 방식이 있습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소망’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소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소망을 가진 사람’을 다르게 표현하면 ‘미래를 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11:16절에서는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김삿갓’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방랑 시인인 ‘김 립’은 한시(漢詩)를 통하여 자신의 삶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오소수혈 유거 고아평생독자상”이라고 했는데, ‘새는 보금자리에, 짐승은 굴에 모두 다 거처할 데가 있는데, 나는 돌아보매 한평생 홀로 슬퍼하고 있도다.’라는 글입니다.
‘로버트 프로스트’라는 시인은 ‘전세 낸 인간의 죽음’이라는 시로 인생의 허무함을 표현했습니다. “자랑스럽게 뒤돌아 볼 과거도 없고, 소망을 가지고 앞을 내다 볼 것도 없는 인간…” 이것이 바로 이 시인이 본 ‘전세 낸 인간’입니다.
미래를 보지 못하는 인생의 탄식입니다. 이들은 이 세상이 고향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진정한 고향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셋집은 자기 집이 아닙니다. 살 수 있는 권한이나 기간이 정해져있습니다. 모든 인생은 이 세상이 고향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고향을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의 고향은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새 하늘과 새 땅인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땅에서 사는 것은 한 순간 지나가는 나그네의 삶에 불과합니다. 나그네나 타향살이를 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언제나 고향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우리가 영원히 누릴 미래를 보며 이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미래를 보는 사람은 지금 현재의 생활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현재의 삶은 미래를 준비하는 과정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나이 많아 늙은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의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이 내용은 세상 적으로는 기막힌 사연입니다. 그러나 미래를 보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깊은 생각을 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1. 미래를 보는 사람은 지나온 삶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년에 복음으로 인하여 로마에서 감금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어느 정도 자유롭게 복음은 전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감금 생활을 하는 중에 ‘오네시모’를 알게 되었습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이라는 사람의 노예였습니다. 오네시모는 골로새에 있는 주인집에서 도망하여 멀리 로마까지 갔습니다. 불안한 도망자의 생활을 하던 중에 바울을 만나 예수님을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오네시모는 변화되어 신실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감금 생활을 하는 바울에게 큰 유익이 되었으며, 바울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노예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바울은 골로새에 있는 빌레몬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빌레몬 역시 바울의 전도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골로새 교회의 중요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빌레몬은 신실한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했고, 성도를 사랑했으며, 그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한 모범적인 신앙인이었습니다. 아마도 빌레몬의 집에서 골로새 교회가 모였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하심에 감사하며,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위하여 편지를 썼습니다. 바울은 편지에서 ‘오네시모는 종에서 뛰어나 사랑받는 형제로 둘 사람이니, 나를 영접하듯 오네시모를 대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판단할 때에 그 사람이 지나온 길을 평가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형편없는 말썽꾸러기였기 때문에 경계하고, 파렴치하고 사기꾼이었고 악랄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누가 오네시모 같은 사람을 노예 도망자를 사랑하는 형제로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러나 교회의 역사에는 이보다 더 악한 사람들이 신실한 성도가 되고, 목회자까지 된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바울 자신도 그 중에 한 사람이며, 우리들도 어떤 면에서는 그러합니다. 이름만 들어도 사람들이 벌벌 떠는 깡패 두목이었던 김익두 목사님의 일화는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변화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서14:4절에서는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고 다른 사람의 지나온 길을 두고 함부로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지나온 길이나 지금의 삶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기 때문입니다. 지나간 과거는 하나님께서 용납하시고 받으셨으므로 우리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며, 현재는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시니 이 또한 우리가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미래를 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혼에 대하여 말씀하면서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로 인하여 이혼 위기에 썼다 할지라도 할 수 있으면 그대로 살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7:16절입니다.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2. 미래를 보는 사람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아이들이든 어른이든 그 사람의 미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영이 계신다면 지금 당장에는 변화가 없고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미래를 보며 용납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간곡하게 당부합니다. “이 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네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진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이 말은 오네시모의 지금 있는 그대로를 받아 줄 것을 부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배운 이론이나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사람들을 판단해버립니다. 예로부터 “될 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 수 있다.”고 했는데, 이 말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이사야42:3절에서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푸시는 분”이라고 하셨으며, 요한복음8장에서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셨고, 주님을 모른다고 저주하며 부인한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그리스도인을 잡아 죽는데 넘겨주던 바울도 받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더욱 열심 있는 일군으로 변화되게 하셨습니다.
지금은 개구쟁이 이고, 망나니이고, 쓸모없이 여겨지는 아이들이고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미래는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일이 쉽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나 할 수 있다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하지 않았겠습니까? 이 일은 내 마음의 아픔과 염려를 이겨내는 인내와 주님의 사랑으로서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들에게 맡겨주셨습니다. 이제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서 이렇게 용납하고 받아들여야 할 사람들을 찾아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품어줍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세상에 낙을 두고 사는 사람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생활의 방식이 있습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소망’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소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소망을 가진 사람’을 다르게 표현하면 ‘미래를 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11:16절에서는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김삿갓’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방랑 시인인 ‘김 립’은 한시(漢詩)를 통하여 자신의 삶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오소수혈 유거 고아평생독자상”이라고 했는데, ‘새는 보금자리에, 짐승은 굴에 모두 다 거처할 데가 있는데, 나는 돌아보매 한평생 홀로 슬퍼하고 있도다.’라는 글입니다.
‘로버트 프로스트’라는 시인은 ‘전세 낸 인간의 죽음’이라는 시로 인생의 허무함을 표현했습니다. “자랑스럽게 뒤돌아 볼 과거도 없고, 소망을 가지고 앞을 내다 볼 것도 없는 인간…” 이것이 바로 이 시인이 본 ‘전세 낸 인간’입니다.
미래를 보지 못하는 인생의 탄식입니다. 이들은 이 세상이 고향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진정한 고향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셋집은 자기 집이 아닙니다. 살 수 있는 권한이나 기간이 정해져있습니다. 모든 인생은 이 세상이 고향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고향을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의 고향은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새 하늘과 새 땅인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땅에서 사는 것은 한 순간 지나가는 나그네의 삶에 불과합니다. 나그네나 타향살이를 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언제나 고향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우리가 영원히 누릴 미래를 보며 이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미래를 보는 사람은 지금 현재의 생활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현재의 삶은 미래를 준비하는 과정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나이 많아 늙은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의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이 내용은 세상 적으로는 기막힌 사연입니다. 그러나 미래를 보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깊은 생각을 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1. 미래를 보는 사람은 지나온 삶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년에 복음으로 인하여 로마에서 감금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어느 정도 자유롭게 복음은 전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감금 생활을 하는 중에 ‘오네시모’를 알게 되었습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이라는 사람의 노예였습니다. 오네시모는 골로새에 있는 주인집에서 도망하여 멀리 로마까지 갔습니다. 불안한 도망자의 생활을 하던 중에 바울을 만나 예수님을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오네시모는 변화되어 신실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감금 생활을 하는 바울에게 큰 유익이 되었으며, 바울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노예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바울은 골로새에 있는 빌레몬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빌레몬 역시 바울의 전도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골로새 교회의 중요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빌레몬은 신실한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했고, 성도를 사랑했으며, 그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한 모범적인 신앙인이었습니다. 아마도 빌레몬의 집에서 골로새 교회가 모였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하심에 감사하며,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위하여 편지를 썼습니다. 바울은 편지에서 ‘오네시모는 종에서 뛰어나 사랑받는 형제로 둘 사람이니, 나를 영접하듯 오네시모를 대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판단할 때에 그 사람이 지나온 길을 평가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형편없는 말썽꾸러기였기 때문에 경계하고, 파렴치하고 사기꾼이었고 악랄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누가 오네시모 같은 사람을 노예 도망자를 사랑하는 형제로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러나 교회의 역사에는 이보다 더 악한 사람들이 신실한 성도가 되고, 목회자까지 된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바울 자신도 그 중에 한 사람이며, 우리들도 어떤 면에서는 그러합니다. 이름만 들어도 사람들이 벌벌 떠는 깡패 두목이었던 김익두 목사님의 일화는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변화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서14:4절에서는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고 다른 사람의 지나온 길을 두고 함부로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지나온 길이나 지금의 삶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기 때문입니다. 지나간 과거는 하나님께서 용납하시고 받으셨으므로 우리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며, 현재는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시니 이 또한 우리가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미래를 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혼에 대하여 말씀하면서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로 인하여 이혼 위기에 썼다 할지라도 할 수 있으면 그대로 살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7:16절입니다.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2. 미래를 보는 사람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아이들이든 어른이든 그 사람의 미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영이 계신다면 지금 당장에는 변화가 없고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미래를 보며 용납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간곡하게 당부합니다. “이 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네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진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이 말은 오네시모의 지금 있는 그대로를 받아 줄 것을 부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배운 이론이나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사람들을 판단해버립니다. 예로부터 “될 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 수 있다.”고 했는데, 이 말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이사야42:3절에서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푸시는 분”이라고 하셨으며, 요한복음8장에서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셨고, 주님을 모른다고 저주하며 부인한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그리스도인을 잡아 죽는데 넘겨주던 바울도 받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더욱 열심 있는 일군으로 변화되게 하셨습니다.
지금은 개구쟁이 이고, 망나니이고, 쓸모없이 여겨지는 아이들이고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미래는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일이 쉽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나 할 수 있다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하지 않았겠습니까? 이 일은 내 마음의 아픔과 염려를 이겨내는 인내와 주님의 사랑으로서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들에게 맡겨주셨습니다. 이제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서 이렇게 용납하고 받아들여야 할 사람들을 찾아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품어줍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