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쓸모 있는 사람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7,064회
작성일
2004-01-10 20:53
♡♥♡ 하나님께 쓸모 있는 사람 / 딤후 2:20-21
*** 들어가는 말
반평생을 바다에서 보낸 늙은 선장이 평온한 모습으로 임종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뱃사람 특유의 거친 삶을 살아왔습니다. 이러한 그를 잘 아는 친구가 너무나 평온한 모습을 보고는 물었습니다. “무엇이 자네의 인생을 이렇게 변화 시켰는가?” 늙은 선장은 친구를 위하여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힘겹게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과거 내가 다른 배의 선장이었을 때였네. 하루는 구조 요청을 받고 침몰중인 배로 갔지. 승객들과 승무원들이 다 구조되고, 마지막으로 구조된 사람은 그 배의 선장과 그의 아내, 그리고 네 살 된 딸이었다네. 구조 받은 선장의 아내는 남편에게 ‘여보 하나님께서 구해 주실 줄 알았어요.’라고 하더니, 나에게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릴 동안 제 딸을 맡아 주시겠어요?’라고 하더군. 그때 그 어린 딸이 ‘엄마 이 아저씨가 하나님이야?’라고 나를 가리키며 말했지. 그 때 선장의 아내는 ‘아니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이란다.’라고 말하더구먼. 그 말이 나를 이렇게 변화시켰다네.”
내가 어떤 일에든지 ‘쓸모 있는 존재’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확실히 기분 좋은 일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는 나름대로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세, 삼손, 사무엘, 다윗, 다니엘처럼 선지자나 사사나 왕으로 귀하게 쓰임 받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애굽의 바로 왕, 바벨론의 왕, 앗수르의 왕, 유대의 분봉 왕 헤롯, 빌라도 총독처럼 악한 일에 도구로 쓰임 받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때로는 바사왕인 고레스, 다리오처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았으며, 나귀, 사자, 곰 등의 짐승들도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았습니다.
이렇게 보면, 세상의 모든 만물은 존재의 목적과 의미가 있고,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조건 쓰임 받는 다고 좋아할 일은 아닙니다. 헤롯이나 빌라도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하는 악한 일에 쓰임 받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에서는 “귀히 쓰는 그릇”,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는” 그런 그릇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쓸모 있는 존재라고 확신하십니까? 그러면 어떤 일에 쓰임을 받고 싶습니까?
지난 주일에는 2004년 교회의 표어이자 가장 큰 소망인 ‘성령의 능역 안에 있는 교회’가 되는 길을 생각했었습니다. 이제 2004년 두 번째 주일을 맞이하면서 새해에 바라는 우리의 소망 두 번째로 ‘하나님께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길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깊은 깨달음과 함께 말씀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선한 일에 귀하게 쓰임 받는 그릇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1. 나는 어떤 그릇입니까?
예전에 우리 할아버지들은 아이들을 보면서 “음, 큰 그릇감이야! 크게 되겠어!”라고 대견해 하기도 하며, “어이 쯧쯧, 저래서 어쩌누!”라고 실망감을 표시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도 사람을 그릇에다 비유를 하곤 했습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라고 했습니다. 즉 성도들을 그릇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큰 집”은 넓은 의미로는 ‘세상’을 의미하지만, 일반적으로는 ‘하나님의 교회’를 의미합니다. 즉 교회에는 여러 종류의 그릇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릇은 재질에 따라서 금 그릇, 은 그릇, 나무 그릇, 흙으로 빗은 질그릇 등이 있습니다. 이 그릇들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뉩니다. 고귀한 재질과 값싸고 천한 재질입니다. 물론 그릇은 크기와 모양새의 다양성도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의 강도로 보아서 그릇의 재질이나 크기나 모양은 별로 중요한 사항이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다.’고 설명만 곁들이고 있습니다.
일단 우리가 생각하고 지나가야 할 것은 ‘그릇의 재질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라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릇의 재질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은사와 재능(달란트)입니다. 고린도전서12:8-10절까지에서 아홉 가지의 은사를 이야기하시면서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그리고 이어서 12절부터 28절까지 ‘지체론’을 말씀하십니다. 즉 몸에는 손과 발, 눈, 코, 귀 등의 기능이 다른 지체가 있듯이 교회에도 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 병 고치는 은사, 돕는 것, 다스리는 것 등의 은사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25:14-30절에서 달란트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교회에는 목사, 장로, 집사, 권사, 부서장, 임원, 회원 등의 그릇들이 있으며, 이 그릇들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은사와 재능을 따라 재질이 구별됩니다.
우리 사람들이 보기에는 금 그릇이나 은그릇처럼 값비싸고 고귀한 그릇이 좋습니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교회에서도 이왕이면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고, 부서장이 되면 좋을 것입니다. 이것이 보편적인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사항들이 중요했다면 하나님께서도 말씀으로 강조하셨을 것입니다. 다만 더욱 깊은 봉사와 섬김을 위하여 가장 큰 은사인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외에는 은사와 재능의 많고 적음과 크고 작음에 대하여 강조하신 곳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릇의 차이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각자의 일에 어울리게 하신 정도의 차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려고 교회에 여러 종류의 그릇들을 두셨습니다. 쓰임새에 따라서 종류를 구별하신 것입니다. 지체론에서처럼 모두가 눈이면 냄새는 어떻게 맡으며, 다 손이면 어떻게 걷겠습니까? 그래서 재질과 모양과 크기의 다양성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구별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어떤 그릇인지를 알려면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과 은사가 무엇인가를 알면 됩니다. 여러분은 어떤 그릇입니까?
2. 하나님께 쓸모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릇의 재질이나 모양이나 크기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쓸모 있는 사람, 선한 일에 예비 되는 귀한 그릇은 어떤 사람입니까? 본문21절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이 말씀 속에 해답이자 하나님 나라의 경영원리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심은 대로 거둔다.”는 원리와 함께 하나님께서 밝히신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경영원리입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재질이나 크기나 모양새로 그릇을 고르시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그릇을 고르신다고 하셨습니다. 즉 ‘귀히 쓰겠다.’ 또는 ‘천하게 쓰겠다.’는 하나님의 의도를 결정하는 요소는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본문 말씀에서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런 것”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이는 앞부분에서 계속 말씀하고 있는 “망령되고 헛된 말”(16절)을 가리킵니다. “망령되고 헛된 말”이란 ‘이단과 거짓된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이단과 거짓 교훈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정결한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께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세상에서는 재능이 있고, 능력이 있고, 학력이 있어야 좋은 직장을 얻을 수 있고, 좋은 자리에서 쓰임 받게 됩니다. 그 사람의 속이야 어떻든 간에 외형적인 능력이 우선되기 마련입니다. 근래에 와서는 인간성이나 대인관계를 많이 보기도 하지만, 그것도 결국은 능력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기 위하여 정말 많은 수고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경영 방침은 “깨끗한 사람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깨끗한 사람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거짓 교훈에 물들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근본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이라는 말씀처럼, 스스로가 깨끗해지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깨끗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9:27절에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 했습니다. 스스로의 성결과 경건의 훈련을 끊임없이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셉의 경우를 봅시다. 요셉은 아버지인 야곱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자신의 꾼 꿈 때문에 형들의 미움을 사서 노예상인에게 팔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때가 요셉의 나이 열일곱이었습니다. 요셉은 애굽 바로 왕의 시위대장인 보디발의 종으로 팔렸습니다. 13년의 긴 고난이 시작된 것입니다. 요셉은 그 고난의 환경에서 항상 성실하고 깨끗했습니다. 보디발은 요셉을 신뢰하여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모든 소유를 맡겼습니다. 몇 번을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했지만, 요셉은 결코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습니다. 창세기39:9-10절에서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자신을 더럽히지 않은 일로 인하여 보디발의 아내의 미움을 사서 더 처참한 감옥 생활까지 하게 됩니다. 그러나 요셉은 끝까지 성실했으면 하나님 앞에서 정결했습니다. 그 결과가 애굽의 총리대신의 자리였으며, 이로 인하여 자신의 온 가족, 나아가서는 민족이 구원을 받는 결과를 이루었습니다.
3. 계속적으로 쓰임 받기 위하여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사용하시는 그릇으로서 계속 쓰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는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주님께서 가르치신 말씀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12:43-45절입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 시대의 상황을 비유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중요한 핵심은 ‘상황이 악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원인은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에서 “집”은 역시 사람 영입니다.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다.”는 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깨끗함을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깨끗하게 된 심령에 왜 다시 귀신이 찾아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빈집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신학생이 어렵게 공부를 하면서 지낼 곳이 없어서 교회당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는 오랫동안 귀신에게 시달려온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간혹 귀신이 발작을 하면 목소리조차 남자 목소리를 내면서 갖은 욕설을 퍼붓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런데 귀신이 발작할 때마다 목사님의 기도를 받으면 귀신에게서 풀려나 고통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는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하루는 할머니가 신학생에게 자기 집에서 숙식을 하라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그래야 자신이 발작할 때마다 이 신학생의 기도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학생은 새벽이든 밤이든 낮이든 발작할 때면 할머니를 붙잡고 기도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왜 기도만 하면 귀신이 물러나는데 다시 들어오고, 또 다시 들어오는지 신학생은 궁금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어느 날, 그 원인으로 생각되는 일을 찾아내었습니다. 할머니에게는 외동아들이 있었는데, 그 며느리를 몹시 구박하고 있었습니다. 자기 아들을 빼앗아 간 여자라고 욕하고, 못살게 굴었던 것입니다. 신학생은 어느 날 할머니를 불러놓고 요한복음14:21절의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는 말씀을 읽어주면서 이야기했습니다. “할머니, 할머니가 귀신에게 해방되고 싶으시다면, 이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며느리를 미워하는 대신 할머니의 딸처럼,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대하십시오.”
할머니는 신기하게도 그 신학생의 권면에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도 되지 않아서 귀신이 완전히 물러갔습니다. 그리고 권사 직분까지 받아서 열심히 충성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자신을 깨끗하게 한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깨끗하게 옛 생활을 청산하고 주님께 돌아왔으면,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어떻게 채웁니까? 훈련입니다. 말씀을 배우고, 배우고 깨달은 말씀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훈련을 계속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훈련받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훈련 받는 것을 힘들어하고 부담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훈련받지 않고는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쓰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더 이상 늦추지 말고, 붙잡읍시다. 하나님께 쓸모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도록 자신을 깨끗하게 합시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신실한 일군으로 끝까지 쓰임 받도록 말씀과 기도로 잘 훈련되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2004년에는 성도 개개인이, 가정이, 교회가 하나님의 큰 기쁨이 되며 하나님의 능력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반평생을 바다에서 보낸 늙은 선장이 평온한 모습으로 임종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뱃사람 특유의 거친 삶을 살아왔습니다. 이러한 그를 잘 아는 친구가 너무나 평온한 모습을 보고는 물었습니다. “무엇이 자네의 인생을 이렇게 변화 시켰는가?” 늙은 선장은 친구를 위하여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힘겹게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과거 내가 다른 배의 선장이었을 때였네. 하루는 구조 요청을 받고 침몰중인 배로 갔지. 승객들과 승무원들이 다 구조되고, 마지막으로 구조된 사람은 그 배의 선장과 그의 아내, 그리고 네 살 된 딸이었다네. 구조 받은 선장의 아내는 남편에게 ‘여보 하나님께서 구해 주실 줄 알았어요.’라고 하더니, 나에게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릴 동안 제 딸을 맡아 주시겠어요?’라고 하더군. 그때 그 어린 딸이 ‘엄마 이 아저씨가 하나님이야?’라고 나를 가리키며 말했지. 그 때 선장의 아내는 ‘아니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이란다.’라고 말하더구먼. 그 말이 나를 이렇게 변화시켰다네.”
내가 어떤 일에든지 ‘쓸모 있는 존재’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확실히 기분 좋은 일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는 나름대로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세, 삼손, 사무엘, 다윗, 다니엘처럼 선지자나 사사나 왕으로 귀하게 쓰임 받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애굽의 바로 왕, 바벨론의 왕, 앗수르의 왕, 유대의 분봉 왕 헤롯, 빌라도 총독처럼 악한 일에 도구로 쓰임 받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때로는 바사왕인 고레스, 다리오처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았으며, 나귀, 사자, 곰 등의 짐승들도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았습니다.
이렇게 보면, 세상의 모든 만물은 존재의 목적과 의미가 있고,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조건 쓰임 받는 다고 좋아할 일은 아닙니다. 헤롯이나 빌라도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하는 악한 일에 쓰임 받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에서는 “귀히 쓰는 그릇”,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는” 그런 그릇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쓸모 있는 존재라고 확신하십니까? 그러면 어떤 일에 쓰임을 받고 싶습니까?
지난 주일에는 2004년 교회의 표어이자 가장 큰 소망인 ‘성령의 능역 안에 있는 교회’가 되는 길을 생각했었습니다. 이제 2004년 두 번째 주일을 맞이하면서 새해에 바라는 우리의 소망 두 번째로 ‘하나님께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길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깊은 깨달음과 함께 말씀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선한 일에 귀하게 쓰임 받는 그릇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1. 나는 어떤 그릇입니까?
예전에 우리 할아버지들은 아이들을 보면서 “음, 큰 그릇감이야! 크게 되겠어!”라고 대견해 하기도 하며, “어이 쯧쯧, 저래서 어쩌누!”라고 실망감을 표시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도 사람을 그릇에다 비유를 하곤 했습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라고 했습니다. 즉 성도들을 그릇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큰 집”은 넓은 의미로는 ‘세상’을 의미하지만, 일반적으로는 ‘하나님의 교회’를 의미합니다. 즉 교회에는 여러 종류의 그릇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릇은 재질에 따라서 금 그릇, 은 그릇, 나무 그릇, 흙으로 빗은 질그릇 등이 있습니다. 이 그릇들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뉩니다. 고귀한 재질과 값싸고 천한 재질입니다. 물론 그릇은 크기와 모양새의 다양성도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의 강도로 보아서 그릇의 재질이나 크기나 모양은 별로 중요한 사항이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다.’고 설명만 곁들이고 있습니다.
일단 우리가 생각하고 지나가야 할 것은 ‘그릇의 재질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라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릇의 재질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은사와 재능(달란트)입니다. 고린도전서12:8-10절까지에서 아홉 가지의 은사를 이야기하시면서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그리고 이어서 12절부터 28절까지 ‘지체론’을 말씀하십니다. 즉 몸에는 손과 발, 눈, 코, 귀 등의 기능이 다른 지체가 있듯이 교회에도 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 병 고치는 은사, 돕는 것, 다스리는 것 등의 은사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25:14-30절에서 달란트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교회에는 목사, 장로, 집사, 권사, 부서장, 임원, 회원 등의 그릇들이 있으며, 이 그릇들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은사와 재능을 따라 재질이 구별됩니다.
우리 사람들이 보기에는 금 그릇이나 은그릇처럼 값비싸고 고귀한 그릇이 좋습니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교회에서도 이왕이면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고, 부서장이 되면 좋을 것입니다. 이것이 보편적인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사항들이 중요했다면 하나님께서도 말씀으로 강조하셨을 것입니다. 다만 더욱 깊은 봉사와 섬김을 위하여 가장 큰 은사인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외에는 은사와 재능의 많고 적음과 크고 작음에 대하여 강조하신 곳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릇의 차이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각자의 일에 어울리게 하신 정도의 차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려고 교회에 여러 종류의 그릇들을 두셨습니다. 쓰임새에 따라서 종류를 구별하신 것입니다. 지체론에서처럼 모두가 눈이면 냄새는 어떻게 맡으며, 다 손이면 어떻게 걷겠습니까? 그래서 재질과 모양과 크기의 다양성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구별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어떤 그릇인지를 알려면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과 은사가 무엇인가를 알면 됩니다. 여러분은 어떤 그릇입니까?
2. 하나님께 쓸모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릇의 재질이나 모양이나 크기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쓸모 있는 사람, 선한 일에 예비 되는 귀한 그릇은 어떤 사람입니까? 본문21절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이 말씀 속에 해답이자 하나님 나라의 경영원리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심은 대로 거둔다.”는 원리와 함께 하나님께서 밝히신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경영원리입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재질이나 크기나 모양새로 그릇을 고르시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그릇을 고르신다고 하셨습니다. 즉 ‘귀히 쓰겠다.’ 또는 ‘천하게 쓰겠다.’는 하나님의 의도를 결정하는 요소는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본문 말씀에서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런 것”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이는 앞부분에서 계속 말씀하고 있는 “망령되고 헛된 말”(16절)을 가리킵니다. “망령되고 헛된 말”이란 ‘이단과 거짓된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이단과 거짓 교훈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정결한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께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세상에서는 재능이 있고, 능력이 있고, 학력이 있어야 좋은 직장을 얻을 수 있고, 좋은 자리에서 쓰임 받게 됩니다. 그 사람의 속이야 어떻든 간에 외형적인 능력이 우선되기 마련입니다. 근래에 와서는 인간성이나 대인관계를 많이 보기도 하지만, 그것도 결국은 능력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기 위하여 정말 많은 수고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경영 방침은 “깨끗한 사람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깨끗한 사람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거짓 교훈에 물들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근본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이라는 말씀처럼, 스스로가 깨끗해지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깨끗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9:27절에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 했습니다. 스스로의 성결과 경건의 훈련을 끊임없이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셉의 경우를 봅시다. 요셉은 아버지인 야곱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자신의 꾼 꿈 때문에 형들의 미움을 사서 노예상인에게 팔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때가 요셉의 나이 열일곱이었습니다. 요셉은 애굽 바로 왕의 시위대장인 보디발의 종으로 팔렸습니다. 13년의 긴 고난이 시작된 것입니다. 요셉은 그 고난의 환경에서 항상 성실하고 깨끗했습니다. 보디발은 요셉을 신뢰하여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모든 소유를 맡겼습니다. 몇 번을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했지만, 요셉은 결코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습니다. 창세기39:9-10절에서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자신을 더럽히지 않은 일로 인하여 보디발의 아내의 미움을 사서 더 처참한 감옥 생활까지 하게 됩니다. 그러나 요셉은 끝까지 성실했으면 하나님 앞에서 정결했습니다. 그 결과가 애굽의 총리대신의 자리였으며, 이로 인하여 자신의 온 가족, 나아가서는 민족이 구원을 받는 결과를 이루었습니다.
3. 계속적으로 쓰임 받기 위하여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사용하시는 그릇으로서 계속 쓰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는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주님께서 가르치신 말씀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12:43-45절입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 시대의 상황을 비유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중요한 핵심은 ‘상황이 악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원인은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에서 “집”은 역시 사람 영입니다.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다.”는 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깨끗함을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깨끗하게 된 심령에 왜 다시 귀신이 찾아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빈집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신학생이 어렵게 공부를 하면서 지낼 곳이 없어서 교회당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는 오랫동안 귀신에게 시달려온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간혹 귀신이 발작을 하면 목소리조차 남자 목소리를 내면서 갖은 욕설을 퍼붓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런데 귀신이 발작할 때마다 목사님의 기도를 받으면 귀신에게서 풀려나 고통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는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하루는 할머니가 신학생에게 자기 집에서 숙식을 하라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그래야 자신이 발작할 때마다 이 신학생의 기도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학생은 새벽이든 밤이든 낮이든 발작할 때면 할머니를 붙잡고 기도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왜 기도만 하면 귀신이 물러나는데 다시 들어오고, 또 다시 들어오는지 신학생은 궁금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어느 날, 그 원인으로 생각되는 일을 찾아내었습니다. 할머니에게는 외동아들이 있었는데, 그 며느리를 몹시 구박하고 있었습니다. 자기 아들을 빼앗아 간 여자라고 욕하고, 못살게 굴었던 것입니다. 신학생은 어느 날 할머니를 불러놓고 요한복음14:21절의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는 말씀을 읽어주면서 이야기했습니다. “할머니, 할머니가 귀신에게 해방되고 싶으시다면, 이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며느리를 미워하는 대신 할머니의 딸처럼,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대하십시오.”
할머니는 신기하게도 그 신학생의 권면에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도 되지 않아서 귀신이 완전히 물러갔습니다. 그리고 권사 직분까지 받아서 열심히 충성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자신을 깨끗하게 한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깨끗하게 옛 생활을 청산하고 주님께 돌아왔으면,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어떻게 채웁니까? 훈련입니다. 말씀을 배우고, 배우고 깨달은 말씀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훈련을 계속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훈련받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훈련 받는 것을 힘들어하고 부담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훈련받지 않고는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쓰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더 이상 늦추지 말고, 붙잡읍시다. 하나님께 쓸모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도록 자신을 깨끗하게 합시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신실한 일군으로 끝까지 쓰임 받도록 말씀과 기도로 잘 훈련되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2004년에는 성도 개개인이, 가정이, 교회가 하나님의 큰 기쁨이 되며 하나님의 능력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