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계획된 시간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6,785회
작성일
2003-12-28 17:38
♡♥♡ 하나님의 계획된 시간 / 요한복음11:5-16
*** 들어가는 말
역사는 변함없이 흘러서 우리는 지금 2003년의 52번째 마지막 주일예배에 임하고 있습니다. 2003년 첫 주일을 지나고 주보를 주보 보관 철에 끼우면서 ‘53장이 더 끼워져야 하는데…’ 라고 했었는데, 이제 마지막 한 장이 남았습니다. 52주일에 성탄특별주보와 송구영신예배 특별주보가 더해져서 54장입니다. 이제 송구영신예배 주보만 남았습니다. 참 빠릅니다. 자라오는 아이들이야 더 젊어지고 아름다워지는 소망 때문에 시간이 더디게 여겨지겠지만, 여기 계신 대부분은 시간을 잡고 싶도록 점점 더 빠르게 느껴지실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것이 시간입니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만물에는 동일한 시간이 적용됩니다. 한 시간의 길이가 부자라고 더 길고, 가난한 사람이라고 더 짧은 것도 아니고, 아이라고 길고 어른이라고 짧지도 않습니다. 바로 이 시간을 계획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서 이제는 2003년도 다 저물었습니다. 여러분은 올해 시작하면서 계획하셨던 일들을 다 이루셨습니까? 나름대로 힘쓰고 애를 썼는데도 진전이 없어서 안타까운 일은 없습니까? 아니면 오히려 더 어려운 지경으로 빠져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앙에 더욱 힘을 썼는데도 일이 형통하지를 못하여 좌절감이 들지는 않습니까?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말씀의 주제를 찾아봅시다.
본문의 이야기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예수님의 이적 이야기입니다. 하나의 이적 이야기치고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내고자 하시는 내용이 많고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질병에 대한 이해’, ‘죽음에 대한 이해’, ‘부활에 대하여’, ‘생각의 관점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등 중요하고도 뜻 깊은 주제가 많이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지금 우리의 상황에 맞추어 이 중에 하나의 주제를 택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의 이야기의 발단은 예수님께서 특별히 관심을 가지시고 사랑하셨던 베다니에 사는 세 남매의 가정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와 오빠인 나사로 세 남매였습니다. 그런데 가정의 기둥이자 가장 역할을 했던 오빠인 나사로가 심한 병이 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다급한 자매는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빠가 병들었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고쳐주시기를 바랐던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소식을 듣고서도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시고는 그대로 이틀을 더 계셨습니다. 그 사이에 나사로는 죽었고, 이미 장례까지 치렀습니다. 그제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며 나섰습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님의 생각과 제자들의 생각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로 가자고 하셨을 때 제자들이 펄쩍 뛰면서 만류했습니다. 제자들은 “선생님, 방금도 유대 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고 가시려 하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계획에 대한 제자들의 무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하셨을 때, 제자들은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확실하게 “나사로가 죽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도 제자인 도마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엉뚱한 소리를 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주제가 들어있습니다. 주제는 예수님께서 ‘베다니로 가자.’고 하시자 제자들이 극구 만류했을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속에 들어있습니다. “낮이 열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이 말씀 속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된 시간’입니다. 이 주제 속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찾아봅시다.
1. 첫 번째 내용은 때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소식을 듣기 전에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그대로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 그 사이에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후에 출발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참으로 야속한 분이십니다. 나사로가 병든 것을 미리 알고 계셨으면서도 가지 않으셨습니다. 소식을 들었을 때만이라도 가셨더라면 자매의 애타는 마음이 덜 했을 것입니다. 자매는 그 며칠동안 얼마나 애타게 주님을 기다렸겠습니까? 그래도 세상에서 의지가 되던 오빠였는데, 자신들만 남겨진다고 생각하면 앞이 캄캄했을 것입니다. 그 당시의 환경은 자매가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힘든 세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렇게 여유롭게 시간을 끌고 계셨겠습니까?
예수님은 ‘때’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즉 나사로의 죽음을 통하여 나타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전도서3:1절에서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는 사람이 생각하는 때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생각하는 때에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늦게 오시는 법도 없고, 일찍 오시는 법도 없이 언제나 정확하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악한 사람은 잘 되는데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고통만 더한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박국2:3절입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일에는 정하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는 사람이 볼 때에는 늦다고 생각되기도 하겠지만 결코 거짓됨이 없이 정확하게 온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억울한 고통을 당하며 13년을 기다렸습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져졌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풀무불 속에 던져졌습니다. 아브라함은 ‘후손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서도 인간의 가능성이 끊어질 때까지 25년을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때가 되기까지 예수님을 핍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38년 된 병자도, 소경 바디매오도, 난쟁이 삭개오도 모두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함에도 불구하고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남았다고 하는 것은 아직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남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급하다고 문제를 덮어두고 역사하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래서 신앙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믿음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히브리서10:36절에서는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야고보서1:4절에서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에게 아직 이루지 못한 계획들이 있습니까? 믿음으로 기도하며 소망을 품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사람의 조급함은 결코 덕을 세우지 못합니다.
2. 두 번째 내용은 시기를 보는 관점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로 가자고 하셨을 때, 제자들이 기겁을 하며 만류했습니다. “선생님, 방금도 유대 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낮이 열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대답에서 “낮이 열두시가 아니냐?”라는 말씀을 주목해 봅시다.
“낮이 열두시”라는 말에는 여러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먼저 ‘한낮’이라는 의미입니다. 한낮에는 두려워하여 숨거나 잠자는 때가 아니라, 한참 일할 때입니다. 그리고 일을 할 수 있는 여건임을 의미합니다. 빛이신 주님이 함께 하시고, 건강하고, 기회가 있고, 능력이 있는 때입니다. 반대로 밤이 올 터인데 인생의 밤은 불신의 때, 병약할 때, 기회가 사라지고 없는 때, 고통의 시기이며, 이 때에는 일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종합해 보면, ‘지금은 빛이 있으므로 일할 때’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관점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세상적인 이치로 볼 때에 ‘지금은 숨어있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은 “방금도”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노리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나 자신들이 유대인들 앞에는 나타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제자들의 관점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관점의 차이들을 많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아브라함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90세인 사라가 아들을 낳아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웃으면서 속으로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라고 했습니다. 얼마 후 다시 하나님께서 임하셔서 사라를 찾으시며, 아브라함에게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라가 장막에서 그 말씀을 듣고는 속으로 웃으면서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느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나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환경과 여건을 보면서 일을 가늠합니다. 즉 사람의 관점은 눈에 보이고 이해되는 환경과 상황과 여건에 의하여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도 ‘아들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불가능한 관점으로 생각된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 세계의 관점인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4:13절에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고백합니다.
여러분에게 아직 이루지 못한 일들이 자신의 불신으로 인하여 늦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 속에서 일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계시면서, 우리가 이해하는 환경과 상황과 여건을 초월하여 일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해를 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결코 믿을 수도 따를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면서 믿음으로 나아갑시다. 우리의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계획된 시간이 있음을 믿고 새로운 용기로 새해를 맞이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역사는 변함없이 흘러서 우리는 지금 2003년의 52번째 마지막 주일예배에 임하고 있습니다. 2003년 첫 주일을 지나고 주보를 주보 보관 철에 끼우면서 ‘53장이 더 끼워져야 하는데…’ 라고 했었는데, 이제 마지막 한 장이 남았습니다. 52주일에 성탄특별주보와 송구영신예배 특별주보가 더해져서 54장입니다. 이제 송구영신예배 주보만 남았습니다. 참 빠릅니다. 자라오는 아이들이야 더 젊어지고 아름다워지는 소망 때문에 시간이 더디게 여겨지겠지만, 여기 계신 대부분은 시간을 잡고 싶도록 점점 더 빠르게 느껴지실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것이 시간입니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만물에는 동일한 시간이 적용됩니다. 한 시간의 길이가 부자라고 더 길고, 가난한 사람이라고 더 짧은 것도 아니고, 아이라고 길고 어른이라고 짧지도 않습니다. 바로 이 시간을 계획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서 이제는 2003년도 다 저물었습니다. 여러분은 올해 시작하면서 계획하셨던 일들을 다 이루셨습니까? 나름대로 힘쓰고 애를 썼는데도 진전이 없어서 안타까운 일은 없습니까? 아니면 오히려 더 어려운 지경으로 빠져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앙에 더욱 힘을 썼는데도 일이 형통하지를 못하여 좌절감이 들지는 않습니까?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말씀의 주제를 찾아봅시다.
본문의 이야기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예수님의 이적 이야기입니다. 하나의 이적 이야기치고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내고자 하시는 내용이 많고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질병에 대한 이해’, ‘죽음에 대한 이해’, ‘부활에 대하여’, ‘생각의 관점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등 중요하고도 뜻 깊은 주제가 많이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지금 우리의 상황에 맞추어 이 중에 하나의 주제를 택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의 이야기의 발단은 예수님께서 특별히 관심을 가지시고 사랑하셨던 베다니에 사는 세 남매의 가정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와 오빠인 나사로 세 남매였습니다. 그런데 가정의 기둥이자 가장 역할을 했던 오빠인 나사로가 심한 병이 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다급한 자매는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빠가 병들었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고쳐주시기를 바랐던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소식을 듣고서도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시고는 그대로 이틀을 더 계셨습니다. 그 사이에 나사로는 죽었고, 이미 장례까지 치렀습니다. 그제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며 나섰습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님의 생각과 제자들의 생각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로 가자고 하셨을 때 제자들이 펄쩍 뛰면서 만류했습니다. 제자들은 “선생님, 방금도 유대 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고 가시려 하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계획에 대한 제자들의 무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하셨을 때, 제자들은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확실하게 “나사로가 죽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도 제자인 도마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엉뚱한 소리를 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주제가 들어있습니다. 주제는 예수님께서 ‘베다니로 가자.’고 하시자 제자들이 극구 만류했을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속에 들어있습니다. “낮이 열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이 말씀 속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된 시간’입니다. 이 주제 속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찾아봅시다.
1. 첫 번째 내용은 때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소식을 듣기 전에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그대로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 그 사이에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후에 출발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참으로 야속한 분이십니다. 나사로가 병든 것을 미리 알고 계셨으면서도 가지 않으셨습니다. 소식을 들었을 때만이라도 가셨더라면 자매의 애타는 마음이 덜 했을 것입니다. 자매는 그 며칠동안 얼마나 애타게 주님을 기다렸겠습니까? 그래도 세상에서 의지가 되던 오빠였는데, 자신들만 남겨진다고 생각하면 앞이 캄캄했을 것입니다. 그 당시의 환경은 자매가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힘든 세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렇게 여유롭게 시간을 끌고 계셨겠습니까?
예수님은 ‘때’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즉 나사로의 죽음을 통하여 나타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전도서3:1절에서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는 사람이 생각하는 때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생각하는 때에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늦게 오시는 법도 없고, 일찍 오시는 법도 없이 언제나 정확하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악한 사람은 잘 되는데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고통만 더한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박국2:3절입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일에는 정하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는 사람이 볼 때에는 늦다고 생각되기도 하겠지만 결코 거짓됨이 없이 정확하게 온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억울한 고통을 당하며 13년을 기다렸습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져졌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풀무불 속에 던져졌습니다. 아브라함은 ‘후손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서도 인간의 가능성이 끊어질 때까지 25년을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때가 되기까지 예수님을 핍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38년 된 병자도, 소경 바디매오도, 난쟁이 삭개오도 모두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함에도 불구하고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남았다고 하는 것은 아직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남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급하다고 문제를 덮어두고 역사하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래서 신앙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믿음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히브리서10:36절에서는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야고보서1:4절에서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에게 아직 이루지 못한 계획들이 있습니까? 믿음으로 기도하며 소망을 품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사람의 조급함은 결코 덕을 세우지 못합니다.
2. 두 번째 내용은 시기를 보는 관점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로 가자고 하셨을 때, 제자들이 기겁을 하며 만류했습니다. “선생님, 방금도 유대 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낮이 열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대답에서 “낮이 열두시가 아니냐?”라는 말씀을 주목해 봅시다.
“낮이 열두시”라는 말에는 여러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먼저 ‘한낮’이라는 의미입니다. 한낮에는 두려워하여 숨거나 잠자는 때가 아니라, 한참 일할 때입니다. 그리고 일을 할 수 있는 여건임을 의미합니다. 빛이신 주님이 함께 하시고, 건강하고, 기회가 있고, 능력이 있는 때입니다. 반대로 밤이 올 터인데 인생의 밤은 불신의 때, 병약할 때, 기회가 사라지고 없는 때, 고통의 시기이며, 이 때에는 일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종합해 보면, ‘지금은 빛이 있으므로 일할 때’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관점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세상적인 이치로 볼 때에 ‘지금은 숨어있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은 “방금도”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노리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나 자신들이 유대인들 앞에는 나타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제자들의 관점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관점의 차이들을 많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아브라함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90세인 사라가 아들을 낳아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웃으면서 속으로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라고 했습니다. 얼마 후 다시 하나님께서 임하셔서 사라를 찾으시며, 아브라함에게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라가 장막에서 그 말씀을 듣고는 속으로 웃으면서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느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나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환경과 여건을 보면서 일을 가늠합니다. 즉 사람의 관점은 눈에 보이고 이해되는 환경과 상황과 여건에 의하여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도 ‘아들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불가능한 관점으로 생각된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 세계의 관점인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4:13절에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고백합니다.
여러분에게 아직 이루지 못한 일들이 자신의 불신으로 인하여 늦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 속에서 일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계시면서, 우리가 이해하는 환경과 상황과 여건을 초월하여 일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해를 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결코 믿을 수도 따를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면서 믿음으로 나아갑시다. 우리의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계획된 시간이 있음을 믿고 새로운 용기로 새해를 맞이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