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을 누리는 사람들 2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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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3-12-25 14:18
♡♥♡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 2 / 눅 2:8-20
*** 들어가는 말
세상에는 슬픈 일도 많고 기쁜 일도 많습니다. 누구에게나 일평생 슬픔만 주어지는 것도 아니며, 기쁨만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일이 잘 되고 형통할 때가 있는가 하면,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힘들고 어려울 때도 있기 마련입니다. 일이 잘 되는 것이나 잘 안 되는 것이 번갈아서 주어지는 이유를 전도서7:14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즉 사람들이 교만하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은총은 기쁨과 평안이라 하셨습니다.
오늘은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주님의 오심은 곧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평안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요한복음14:27절에서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고, 16:33절에서는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16:22절에서는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4절에서는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는 성도에게는 주님이 함께 하시며 기쁨과 평안을 가득하게 하시고 누리게 하십니다. 이 사실을 지난 주일에는 동방 박사들을 통하여 보았습니다. 이 시간에는 본문에 나오는 ‘목자’들과 이어서 소개되는 ‘시므온’과 여선지자 ‘안나’를 살펴보면서 주님의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길을 찾아봅시다.
1. 주님의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길은 성실함에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님께 소중한 그릇으로 쓰임 받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성실함’입니다. 다윗을 예로 들어봅시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등극한 ‘사울’은 무척 겸손했습니다. 그러나 왕이 된 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사리사욕을 따랐습니다.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사무엘을 베들레헴에 사는 ‘이새’에게 보내셨습니다. 이새의 아들 중에서 이스라엘의 제2대 왕이 될 사람을 내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새에게는 여덟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선지자 사무엘의 방문을 받은 작은 도시 베들레헴의 장로들은 떨면서 영접했습니다. 사무엘은 이새와 그 아들들을 제사에 초대했습니다. 그들이 도착하자 이새에게 아들들을 한 명씩 자신의 앞으로 지나가게 했습니다. 장자인 ‘엘리압’이 지나갔습니다. 사무엘은 키도 크고 잘 생긴 엘리압이 택함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 외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둘째인 ‘아비나답’이 지나고, 셋째 ‘삼마’가 지나고, 일곱 명이 다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사무엘은 ‘아들들이 전부다이냐?’라고 물었습니다. 이새는 ‘막내가 있는데 그가 들에서 양을 치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무엘은 그를 즉시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이새가 왜 막내인 다윗을 초대의 자리에 데려오지 않았을까요? 아마도 다윗이 어리고 예쁘장하여 전혀 이런 자리에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다윗이 도착하자마자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고 하셨습니다. 어린 다윗이 이스라엘의 제2대 왕으로 내정되어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왕으로 내정되어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것은 어린 목동 시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하필이며 아직 어리고 모든 면에서 형들에게 이르지 못하는 다윗을 택하셨겠습니까? 다윗의 큰 특징 두 가지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담대한 믿음’과 ‘자신의 일에 대한 성실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 대하여 ‘일평생 헷 사람 우리아의 일외에는 이러한 성실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열왕기상15:5절입니다. “이는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고, 자기에게 명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본문에 등장하는 목자들은 어떠합니까? 왜 하필이면 메시아의 탄생 소식을 목자들에게 알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메시아의 비천한 탄생에 역시 비천한 신분의 목자들을 초대하셨습니다. 짐승의 우릿간에서 구유에 누이신 평화의 왕이신 메시아는 그 짐승들을 치는 목자들의 경배를 받으셨습니다. 짐승들의 구세주로서 말입니다. 이는 장차 메시아의 사역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 베들레헴의 목자들은 다윗의 후손들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성실했듯이, 이들 목자들도 하나님의 복음을 가장 먼저 들을 만큼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실한 삶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서 주님을 찾습니까? 첫 번 성탄절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호화로운 삶의 자리에서 주님을 찾습니다. 권력의 자리에서 주님을 찾습니다. 만일 첫 번 성탄 때에 예수님께서 왕궁에서 태어나셨거나 고관대작의 집에서 태어나셨더라면 온 이스라엘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그들이 메시아로 오신 주님을 외면한 것은 보잘것없는 작은 도시 베들레헴, 그것도 처녀의 몸에서 목수의 아들로, 마구간에서의 탄생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려면 낮은 자리로 내려가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요란스러움에 관계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성실해야 합니다.
시므온과 안나가 그러했습니다. 성경에서는 시므온에 대하여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선지자였던 안나에 대하여는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라고 했습니다. 목자들은 밤에 밖에서 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묵묵히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에게 주님의 기쁨과 평안을 주십니다. 시므온이 아기 예수님을 안고서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라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주님을 만나려면, 주님의 기쁨과 평안을 누리려면,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2.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길은 순종함에 있습니다.
목자들은 한밤중에 나타난 천사들로 인하여 두려워 떨었습니다. 천사들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노라.”고 했습니다. 그 소식은,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는 복음입니다. 천사들은 덧붙여서 메시아로 태어나신 표적을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자들에게 기쁨과 평안에 대한 소식뿐만 아니라, 누릴 수 있는 길을 소상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천사들이 떠난 후 목자들은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하고는 즉시 베들레헴으로 달렸습니다. 목자들은 ‘찾아서 - 보고 - 들은 소식을 고(알림)’했습니다. 이것이 성실한 순종입니다.
시므온은 어떠했습니까? 26절에서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라고 했습니다. 즉 시므온이 아기 예수님을 안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주신 말씀을 마리아에게 전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사역과 그 예수님으로 인하여 마리아에게 주어지는 고통’이었습니다. 한 편 안나 여 선지자는 메시아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38절입니다.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성실한 순종은 하나님을 소망하며 하나님 안에서 사는 사람에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산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삶입니다. 요한복음15:10절에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 안에 사는 사람에게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기쁨과 평안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순종에 대하여 무엇을 더 말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심 자체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셨습니다. 빌립보서2:5-8절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의 뜻에 죽음으로까지 순종하셨다면, 주님을 따르는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12:26절입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주님을 섬기는 길은 주님을 따르는 길뿐입니다. 따른다는 것은 주님께서 가셨던 길을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은 비천한 곳에 오셨고, 병자들, 소외된 사람들, 버려진 사람들을 찾아다니셨는데, 제자들이 화려한 옷을 입고, 부귀영화의 자리에 앉아서 주님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한 번에 여러 가지를 동시에 해낼 수는 없습니다. 만일 어떤 일을 하면서 잡념에 사로잡힌다면 그 일을 온전하게 처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심장병에 대하여 권위 있는 유명한 의사는 “여러 가지 생각 때문에 심장병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느 컴퓨터 전문가는 “아무리 고도로 개발된 컴퓨터라 할지라도 동시에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들도 둘이나 그 이상의 문제들을 동시에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은 마태복음6:24절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부귀영화와 영원한 나라의 생명과 영광을 동시에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뻐하고 축하하는 주님의 성탄은 결코 화려하지 않습니다. 자기 백성들조차 외면하는 빈천한 자리에 오셨습니다. 이 주님께서 비천한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먼저 목자의 자리, 동방 박사들의 자리에 불러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그리고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의 자리, 즉 영적인 직분의 자리와 육신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성실한 삶을 이룹시다. 그리하여 이 성탄의 평화와 기쁨과 감격이 삶에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세상에는 슬픈 일도 많고 기쁜 일도 많습니다. 누구에게나 일평생 슬픔만 주어지는 것도 아니며, 기쁨만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일이 잘 되고 형통할 때가 있는가 하면,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힘들고 어려울 때도 있기 마련입니다. 일이 잘 되는 것이나 잘 안 되는 것이 번갈아서 주어지는 이유를 전도서7:14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즉 사람들이 교만하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은총은 기쁨과 평안이라 하셨습니다.
오늘은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주님의 오심은 곧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평안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요한복음14:27절에서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고, 16:33절에서는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16:22절에서는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4절에서는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는 성도에게는 주님이 함께 하시며 기쁨과 평안을 가득하게 하시고 누리게 하십니다. 이 사실을 지난 주일에는 동방 박사들을 통하여 보았습니다. 이 시간에는 본문에 나오는 ‘목자’들과 이어서 소개되는 ‘시므온’과 여선지자 ‘안나’를 살펴보면서 주님의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길을 찾아봅시다.
1. 주님의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길은 성실함에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님께 소중한 그릇으로 쓰임 받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성실함’입니다. 다윗을 예로 들어봅시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등극한 ‘사울’은 무척 겸손했습니다. 그러나 왕이 된 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사리사욕을 따랐습니다.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사무엘을 베들레헴에 사는 ‘이새’에게 보내셨습니다. 이새의 아들 중에서 이스라엘의 제2대 왕이 될 사람을 내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새에게는 여덟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선지자 사무엘의 방문을 받은 작은 도시 베들레헴의 장로들은 떨면서 영접했습니다. 사무엘은 이새와 그 아들들을 제사에 초대했습니다. 그들이 도착하자 이새에게 아들들을 한 명씩 자신의 앞으로 지나가게 했습니다. 장자인 ‘엘리압’이 지나갔습니다. 사무엘은 키도 크고 잘 생긴 엘리압이 택함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 외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둘째인 ‘아비나답’이 지나고, 셋째 ‘삼마’가 지나고, 일곱 명이 다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사무엘은 ‘아들들이 전부다이냐?’라고 물었습니다. 이새는 ‘막내가 있는데 그가 들에서 양을 치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무엘은 그를 즉시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이새가 왜 막내인 다윗을 초대의 자리에 데려오지 않았을까요? 아마도 다윗이 어리고 예쁘장하여 전혀 이런 자리에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다윗이 도착하자마자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고 하셨습니다. 어린 다윗이 이스라엘의 제2대 왕으로 내정되어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왕으로 내정되어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것은 어린 목동 시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하필이며 아직 어리고 모든 면에서 형들에게 이르지 못하는 다윗을 택하셨겠습니까? 다윗의 큰 특징 두 가지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담대한 믿음’과 ‘자신의 일에 대한 성실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 대하여 ‘일평생 헷 사람 우리아의 일외에는 이러한 성실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열왕기상15:5절입니다. “이는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고, 자기에게 명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본문에 등장하는 목자들은 어떠합니까? 왜 하필이면 메시아의 탄생 소식을 목자들에게 알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메시아의 비천한 탄생에 역시 비천한 신분의 목자들을 초대하셨습니다. 짐승의 우릿간에서 구유에 누이신 평화의 왕이신 메시아는 그 짐승들을 치는 목자들의 경배를 받으셨습니다. 짐승들의 구세주로서 말입니다. 이는 장차 메시아의 사역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 베들레헴의 목자들은 다윗의 후손들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성실했듯이, 이들 목자들도 하나님의 복음을 가장 먼저 들을 만큼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실한 삶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서 주님을 찾습니까? 첫 번 성탄절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호화로운 삶의 자리에서 주님을 찾습니다. 권력의 자리에서 주님을 찾습니다. 만일 첫 번 성탄 때에 예수님께서 왕궁에서 태어나셨거나 고관대작의 집에서 태어나셨더라면 온 이스라엘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그들이 메시아로 오신 주님을 외면한 것은 보잘것없는 작은 도시 베들레헴, 그것도 처녀의 몸에서 목수의 아들로, 마구간에서의 탄생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려면 낮은 자리로 내려가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요란스러움에 관계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성실해야 합니다.
시므온과 안나가 그러했습니다. 성경에서는 시므온에 대하여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선지자였던 안나에 대하여는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라고 했습니다. 목자들은 밤에 밖에서 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묵묵히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에게 주님의 기쁨과 평안을 주십니다. 시므온이 아기 예수님을 안고서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라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주님을 만나려면, 주님의 기쁨과 평안을 누리려면,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2.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길은 순종함에 있습니다.
목자들은 한밤중에 나타난 천사들로 인하여 두려워 떨었습니다. 천사들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노라.”고 했습니다. 그 소식은,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는 복음입니다. 천사들은 덧붙여서 메시아로 태어나신 표적을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자들에게 기쁨과 평안에 대한 소식뿐만 아니라, 누릴 수 있는 길을 소상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천사들이 떠난 후 목자들은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하고는 즉시 베들레헴으로 달렸습니다. 목자들은 ‘찾아서 - 보고 - 들은 소식을 고(알림)’했습니다. 이것이 성실한 순종입니다.
시므온은 어떠했습니까? 26절에서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라고 했습니다. 즉 시므온이 아기 예수님을 안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주신 말씀을 마리아에게 전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사역과 그 예수님으로 인하여 마리아에게 주어지는 고통’이었습니다. 한 편 안나 여 선지자는 메시아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38절입니다.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성실한 순종은 하나님을 소망하며 하나님 안에서 사는 사람에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산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삶입니다. 요한복음15:10절에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 안에 사는 사람에게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기쁨과 평안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순종에 대하여 무엇을 더 말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심 자체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셨습니다. 빌립보서2:5-8절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의 뜻에 죽음으로까지 순종하셨다면, 주님을 따르는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12:26절입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주님을 섬기는 길은 주님을 따르는 길뿐입니다. 따른다는 것은 주님께서 가셨던 길을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은 비천한 곳에 오셨고, 병자들, 소외된 사람들, 버려진 사람들을 찾아다니셨는데, 제자들이 화려한 옷을 입고, 부귀영화의 자리에 앉아서 주님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한 번에 여러 가지를 동시에 해낼 수는 없습니다. 만일 어떤 일을 하면서 잡념에 사로잡힌다면 그 일을 온전하게 처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심장병에 대하여 권위 있는 유명한 의사는 “여러 가지 생각 때문에 심장병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느 컴퓨터 전문가는 “아무리 고도로 개발된 컴퓨터라 할지라도 동시에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들도 둘이나 그 이상의 문제들을 동시에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은 마태복음6:24절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부귀영화와 영원한 나라의 생명과 영광을 동시에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뻐하고 축하하는 주님의 성탄은 결코 화려하지 않습니다. 자기 백성들조차 외면하는 빈천한 자리에 오셨습니다. 이 주님께서 비천한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먼저 목자의 자리, 동방 박사들의 자리에 불러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그리고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의 자리, 즉 영적인 직분의 자리와 육신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성실한 삶을 이룹시다. 그리하여 이 성탄의 평화와 기쁨과 감격이 삶에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