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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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3-11-29 23:21
♡♥♡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 / 베드로후서3:8-14
*** 들어가는 말
본문은 오전의 말씀과 연관되는 말씀이지만, 주님의 재림이 늦어지고 있는 이유와 재림 때에 나타날 현상을 상세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재림의 때를 대비하여 어떻게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재림은 이루어지지 않고, 거짓 선생들은 헛된 이야기로 유혹하며, 신앙으로 인한 핍박과 박해가 심해져서 성도들이 낙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우리는 이 말씀의 때보다는 거의 2000년을 더 지나왔습니다. 이제는 재림이니, 심판이니,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해도, ‘그저 그렇거니’라고 별로 관심조차 두지 않습니다. 목사가 연말이 되면 한 번씩 되풀이 하는 그런 이야기 정도로 생각하는 가 봅니다. 그런데 이것이 가장 위험한 상태입니다. 사람들이 만성이 되어서 감각이 무뎌졌기 때문에 사단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적들은 바로 이런 순간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자꾸만 느슨해지는 성도들의 신앙을 바짝 당기도록 독려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지치고 낙담하는 성도들에게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지쳐있는 성도들에게 ‘끝날 것 같지 않는 어두운 세월이지만, 하나님의 때는 반드시 온다.’고 했습니다. 한 순간의 앞도 내다볼 줄 모르는 우리 인간이 시작도 끝도 없으신 하나님의 때와 계획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믿고 인내하며 기다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날,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하루 종일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저녁이 되자 메뚜기가 하루살이에게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놀자.”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루살이는 “내일이 뭐야?”라고 물었습니다. 메뚜기는 “캄캄한 밤이 지나면 밝은 아침이 오는데 그것이 내일이야.”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하루살이는 내일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살이가 떠나고 메뚜기는 논에 사는 개구리와 즐겁게 놀았습니다. 그런데 날씨가 추워지면서 활동이 어려워지자 개구리는 메뚜기에게, “날씨가 추워지니 이제 그만 놀고 내년에 또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메뚜기는 “내년이 뭐야?”라고 물었습니다. “추운 겨울이 끝난 후 날이 따뜻해지려고 할 때가 내년이야.”라고 개구리가 설명했습니다. 메뚜기는 개구리의 말을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개구리가 떠나자 메뚜기가 혼자서 중얼거립니다.
“정말 이상하네. 하루살이는 왜 내가 아는 내일을 모르고, 나는 왜 개구리가 아는 내년을 모르는 것일까?”
인생이 하나님이 때를 알지 못하는 것은, 마치 하루살이가 내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메뚜기가 내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훗날 우리가 주님의 나라에 가서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든 종말을 알지 못하는 우리는 그 날이 얼마나 두려운 날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종말에 되어질 일을 조금 설명하면서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라고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경각심의 목적은 우리가 소망하는 것을 얻는 것입니다. 소망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살아갈 수가 있습니까?
1. 먼저 마지막 때의 현상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종말은 아무도 예견하지 못한 때에 순식간에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지금 이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이 다 풀어져서 형체가 없어질 것입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 바로 그 때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신 이래로 종말 때까지의 모든 일들이 숨김없이 모두 드러날 것입니다. 이 광경을 요한계시록20:11-15절에서 조금 보여주십니다. (한글 킹 제임스) “또 내가 큰 백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보니, 그의 면전에서 땅과 하늘이 사라졌고 그들의 설 자리도 보이지 않더라. 또 내가 죽은 자들을 보니, 작은 자나 큰 자나 하나님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져 있으며 또 다른 책도 펴져 있는데 그것은 생명의 책이라. 죽은 자들은 자기들의 행위에 따라 그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더라. 바다도 그 안에 있던 죽은 자들을 넘겨주고 또 사망과 지옥도 그들 안에 있던 죽은 자들을 넘겨주니 그들이 각자 자기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으며, 사망과 지옥도 불 못에 던져지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누구든지 생명의 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는 불 못에 던져지더라.”
이 말씀은 일명 ‘백 보좌 심판’이라고도 불리는 ‘생명의 심판’의 광경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와 믿지 않은 자를 분리하는 심판입니다. 이 광경에서 우주의 모습이 사라지고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모든 숨겨졌던 일들이 낱낱이 드러나고 있음을 말씀합니다. “바다도 그 안에 있던 죽은 자들을 넘겨주고, 또 사망과 지옥도 그들 안에 있던 죽은 자들을 넘겨주니”라고 하십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이실직고(以實直告)하게 됩니다. 로마서14:12절에서는,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고 하셨고, 베드로전서4:5절에서는,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고 했습니다.
2.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 위해서는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본문11-12절에서 마지막 현상이 이러하니, “거룩한 행실과 경견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성도가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한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이란 어떻게 사는 것입니까?
거룩한 행실이란, 우리의 행실이 하나님께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즉 세상과 분리되고 하나님께 드려진바 된 깨끗하고 의로운 생활을 하도록 구별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합니까? 이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믿는 사람의 몸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몸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불렀습니다. 고린도전서3:16-17절을 봅시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 하십니다.
경건함이란,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는 실제의 생활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하시며 행한 대로 갚으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처럼 사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며 주님께서 사셨던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야고보서1:27절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3.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야 합니다.
본문 뒤쪽의 18절을 봅시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야 하며 닮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성화(聖化)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길은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아는 것이며, 주님이 사셨던 생활을 닮는 길 뿐입니다.
사도 바울도 끊임없이 주님을 알고자 힘썼습니다. 빌립보서3:10-11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소망하는 부활의 삶에 이르기 위하여 주님을 더욱 깊이 알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알기 위하여 얼마나 어떻게 노력하고 있습니까? 신앙은 자라지 않으면 퇴보합니다. 자라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영양분을 공급해야만 합니다. 육신이 배고프고 허약하면 음식을 먹고 약을 먹을 줄 알면서, 영의 생명이 강건하기 위하여 말씀을 읽고 듣고, 기도하는 일에는 애달파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합니다.
내가 빛을 향하지 않으면 그림자가 내 앞을 가리게 됩니다. 우리가 빛이신 주님을 향하여 나아가면 흠도 없고 점도 없이 우리 주님 앞에서 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빛을 등진다면 자연히 우리 앞에는 그림자가 드리울 것이고, 멀어질수록 그림자는 진하고 길어질 것입니다.
이제 한 회기를 마무리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시점에서 주님과의 관계를 돌아보고 새롭게 하여 새로운 힘과 능력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본문은 오전의 말씀과 연관되는 말씀이지만, 주님의 재림이 늦어지고 있는 이유와 재림 때에 나타날 현상을 상세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재림의 때를 대비하여 어떻게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재림은 이루어지지 않고, 거짓 선생들은 헛된 이야기로 유혹하며, 신앙으로 인한 핍박과 박해가 심해져서 성도들이 낙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우리는 이 말씀의 때보다는 거의 2000년을 더 지나왔습니다. 이제는 재림이니, 심판이니,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해도, ‘그저 그렇거니’라고 별로 관심조차 두지 않습니다. 목사가 연말이 되면 한 번씩 되풀이 하는 그런 이야기 정도로 생각하는 가 봅니다. 그런데 이것이 가장 위험한 상태입니다. 사람들이 만성이 되어서 감각이 무뎌졌기 때문에 사단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적들은 바로 이런 순간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자꾸만 느슨해지는 성도들의 신앙을 바짝 당기도록 독려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지치고 낙담하는 성도들에게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지쳐있는 성도들에게 ‘끝날 것 같지 않는 어두운 세월이지만, 하나님의 때는 반드시 온다.’고 했습니다. 한 순간의 앞도 내다볼 줄 모르는 우리 인간이 시작도 끝도 없으신 하나님의 때와 계획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믿고 인내하며 기다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날,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하루 종일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저녁이 되자 메뚜기가 하루살이에게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놀자.”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루살이는 “내일이 뭐야?”라고 물었습니다. 메뚜기는 “캄캄한 밤이 지나면 밝은 아침이 오는데 그것이 내일이야.”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하루살이는 내일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살이가 떠나고 메뚜기는 논에 사는 개구리와 즐겁게 놀았습니다. 그런데 날씨가 추워지면서 활동이 어려워지자 개구리는 메뚜기에게, “날씨가 추워지니 이제 그만 놀고 내년에 또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메뚜기는 “내년이 뭐야?”라고 물었습니다. “추운 겨울이 끝난 후 날이 따뜻해지려고 할 때가 내년이야.”라고 개구리가 설명했습니다. 메뚜기는 개구리의 말을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개구리가 떠나자 메뚜기가 혼자서 중얼거립니다.
“정말 이상하네. 하루살이는 왜 내가 아는 내일을 모르고, 나는 왜 개구리가 아는 내년을 모르는 것일까?”
인생이 하나님이 때를 알지 못하는 것은, 마치 하루살이가 내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메뚜기가 내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훗날 우리가 주님의 나라에 가서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든 종말을 알지 못하는 우리는 그 날이 얼마나 두려운 날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종말에 되어질 일을 조금 설명하면서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라고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경각심의 목적은 우리가 소망하는 것을 얻는 것입니다. 소망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살아갈 수가 있습니까?
1. 먼저 마지막 때의 현상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종말은 아무도 예견하지 못한 때에 순식간에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지금 이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이 다 풀어져서 형체가 없어질 것입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 바로 그 때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신 이래로 종말 때까지의 모든 일들이 숨김없이 모두 드러날 것입니다. 이 광경을 요한계시록20:11-15절에서 조금 보여주십니다. (한글 킹 제임스) “또 내가 큰 백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보니, 그의 면전에서 땅과 하늘이 사라졌고 그들의 설 자리도 보이지 않더라. 또 내가 죽은 자들을 보니, 작은 자나 큰 자나 하나님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져 있으며 또 다른 책도 펴져 있는데 그것은 생명의 책이라. 죽은 자들은 자기들의 행위에 따라 그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더라. 바다도 그 안에 있던 죽은 자들을 넘겨주고 또 사망과 지옥도 그들 안에 있던 죽은 자들을 넘겨주니 그들이 각자 자기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으며, 사망과 지옥도 불 못에 던져지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누구든지 생명의 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는 불 못에 던져지더라.”
이 말씀은 일명 ‘백 보좌 심판’이라고도 불리는 ‘생명의 심판’의 광경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와 믿지 않은 자를 분리하는 심판입니다. 이 광경에서 우주의 모습이 사라지고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모든 숨겨졌던 일들이 낱낱이 드러나고 있음을 말씀합니다. “바다도 그 안에 있던 죽은 자들을 넘겨주고, 또 사망과 지옥도 그들 안에 있던 죽은 자들을 넘겨주니”라고 하십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이실직고(以實直告)하게 됩니다. 로마서14:12절에서는,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고 하셨고, 베드로전서4:5절에서는,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고 했습니다.
2.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 위해서는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본문11-12절에서 마지막 현상이 이러하니, “거룩한 행실과 경견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성도가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한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이란 어떻게 사는 것입니까?
거룩한 행실이란, 우리의 행실이 하나님께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즉 세상과 분리되고 하나님께 드려진바 된 깨끗하고 의로운 생활을 하도록 구별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합니까? 이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믿는 사람의 몸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몸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불렀습니다. 고린도전서3:16-17절을 봅시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 하십니다.
경건함이란,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는 실제의 생활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하시며 행한 대로 갚으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처럼 사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며 주님께서 사셨던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야고보서1:27절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3.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야 합니다.
본문 뒤쪽의 18절을 봅시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야 하며 닮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성화(聖化)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길은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아는 것이며, 주님이 사셨던 생활을 닮는 길 뿐입니다.
사도 바울도 끊임없이 주님을 알고자 힘썼습니다. 빌립보서3:10-11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소망하는 부활의 삶에 이르기 위하여 주님을 더욱 깊이 알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알기 위하여 얼마나 어떻게 노력하고 있습니까? 신앙은 자라지 않으면 퇴보합니다. 자라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영양분을 공급해야만 합니다. 육신이 배고프고 허약하면 음식을 먹고 약을 먹을 줄 알면서, 영의 생명이 강건하기 위하여 말씀을 읽고 듣고, 기도하는 일에는 애달파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합니다.
내가 빛을 향하지 않으면 그림자가 내 앞을 가리게 됩니다. 우리가 빛이신 주님을 향하여 나아가면 흠도 없고 점도 없이 우리 주님 앞에서 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빛을 등진다면 자연히 우리 앞에는 그림자가 드리울 것이고, 멀어질수록 그림자는 진하고 길어질 것입니다.
이제 한 회기를 마무리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시점에서 주님과의 관계를 돌아보고 새롭게 하여 새로운 힘과 능력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