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라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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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4-04-11 00:15
♡♥♡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라. / 벧전4:12-19
*** 들어가는 말
오늘 이 자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자리입니다. 모든 예배가 하나님을 기뻐하며 영광을 돌리는 것이지만, 이 예배는 오직 감사함으로 채워야 할 특별한 예배입니다. 왜냐하면, 마땅히 내가 당해야 하는 멸시와 고난, 저주의 죽음을 예수님이 대신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본다면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저주와 슬픔과 아픔의 일이지만, 우리 인생의 편에서 본다면 감사하고 또 감사하고 감격에 겨워해야 할 일입니다.
이 큰 은혜를 입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것이 우리가 이 밤에 생각해야 할 내용입니다. 먼저 결론부터 내려놓고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이 큰 은혜를 입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혹시 ‘왜 굳이 고난에 뛰어들어야 하는가?’라고 물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내가 일부러 고난을 찾아다니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신실한 믿음으로 살아가노라면, 고난의 일들이 찾아오게 됩니다. 요한복음15:18-19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이런 고난이 올 때에 내 자신의 안일함과 욕망을 위하여 피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고난에 참여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본문말씀에 들어 있습니다. 본문13절을 봅시다.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이유는 주님이 심판의 주로 재림하실 때에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세상이 끝나고 영원한 영광의 삶이 시작 될 때에 그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8:18절에서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영광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아직 나타나지도 보이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영광의 길을 무시합니다. 보이지도 않는 영광을 위하여, 지금 당장 주어지는 고통스럽고 힘든 삶을 견뎌나갈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는 이 영광을 소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소망이 없다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겠지요. 그러면 지금 여러분의 삶에 다가온 어려움과 고통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분명히 본문에서는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 단순히 견뎌내는 정도가 아니라, 즐거운 마음으로 참여하라고 했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잠시는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계속적으로 그렇게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19절에서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라고 하십니다. 즉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도움을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찬송가 441장을 함께 부르겠습니다.
이 찬송은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John Wesley)의 동생인 찰스 웨슬리가 지은 찬송 시입니다. 이 찬송을 짓게 된 동기는,
어느 날, 서재의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쉬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디선가 작은 새 한 마리가 매에 쫓겨 다급하게 서재로 날아들었습니다. 새는 푸드득거리며 방안을 몇 바퀴 돌더니 찰스의 옷자락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찰스는 새가 놀라지 않도록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앉아서 새가 하는 대로 맡겨 두었습니다. 할딱거리던 작은 새는 잠시 후 평안해진 듯 보였습니다. 찰스는 작은 새를 품에서 꺼내어 쓰다듬어 주고는 창 밖으로 놓아 보냈습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그 작은 사건을 생각하다가, 불현듯 마음에 떠오르는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 감동을 적은 시가 바로 이 가사입니다.
이 가사에서처럼 고난의 비바람이 불어 닥치고, 고통의 물결이 높이 일어나는 때에 우리가 의지할 곳은 예수님뿐입니다. 고난의 풍파가 지나가도록 안전하게 숨을 곳은 주님의 품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의지하는 사람을 보호하시며, 도우시고 인도하십니다. 베드로전서1:5-7절에서,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두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고난의 길을 먼저 가신 주님께서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나아가라.’고 하십니다. 요한복음16:33절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때때로 고난은 우리에게 많은 고통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우리를 주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게 합니다.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하고, 우리를 돌아보게 하며, 우리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합니다. 그래서 시편119:71절에서 시편기자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유익은 주님이 재림하시는 때에 우리로 하여금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으며 즐거워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에게 고난이 닥칠 때에는 고난이 일어나는 이유를 주의해서 살펴야 합니다. 본문에서 말씀하는 고난이 일어나는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본문14-16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첫 번째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하여 받는 고난, 즉 그리스도인으로서 당하는 고난입니다. 두 번째는 자신의 죄악으로 인한 고난입니다. 즉 죄로 인한 징계로서의 고난입니다. 세 번째는 남의 일에 간섭하다가 당하는 고난입니다.
이 고난들 중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은 첫 번째 것 한 가지입니다. 그래서 19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이라고 단서를 붙여 놓은 것입니다. 이러한 고난을 받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14절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고난 받는 이유가 두 번째와 세 번째라면 자신을 깊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어느 수도원에서 나이 많은 수도사가 정원에서 흙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수도원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조금은 교만한 젊은 수도사가 그에게 다가옵니다. 나이 많은 수도사는 흙덩이를 하나 들고서 후배 수도사에게,
“이 흙덩이 위에다 물을 좀 부어주겠나?”
라고 요청했습니다. 젊은 수도사는 물을 부었습니다. 물은 흙덩이에 떨어지면서 전부 옆으로 흘러내렸습니다. 그러자 나이 많은 수도사는 옆에 있는 망치로 흙덩어리를 깨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부서진 흙을 모아놓고 젊은 수도사에게,
“다시 물을 부어주겠나?”
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번에는 물이 흙에 잘 스며들었고, 늙은 수도사는 그 흙들을 고르게 펴서 화단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야 물이 잘 스며드는구먼. 여기에 씨가 뿌려진다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이야. 우리도 역시 깨어져야 하나님께서 거기에 물을 주시고, 그럴 때 씨가 떨어지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힐 수 있는 것이지. 우리 수도사들은 이것을 ‘깨어짐의 영성’이라고 한다네.”
교만한 마음, 죄로 가득한 마음에는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깨뜨리십니다. 깨지고 부서질 때는 아프고 고통스럽지만 깨어지고 나면 주님의 평안이 머물면서 아름다운 삶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하워드 러틀리지’라는 분은 복음을 전하다가 북베트남 감옥에서 7년 동안 갇혀 지냈습니다. 그가 귀환한 후에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게 하시는 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말하자면 고통은 우리를 주목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확성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의 일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서게 하는 하나님의 비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고난을 통하여 나를 위한 영광의 면류관을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는 이 시간에 우리도 남은 생애를 주님의 고난에 참예하겠다는 결단을 합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날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으며,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오늘 이 자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자리입니다. 모든 예배가 하나님을 기뻐하며 영광을 돌리는 것이지만, 이 예배는 오직 감사함으로 채워야 할 특별한 예배입니다. 왜냐하면, 마땅히 내가 당해야 하는 멸시와 고난, 저주의 죽음을 예수님이 대신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본다면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저주와 슬픔과 아픔의 일이지만, 우리 인생의 편에서 본다면 감사하고 또 감사하고 감격에 겨워해야 할 일입니다.
이 큰 은혜를 입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것이 우리가 이 밤에 생각해야 할 내용입니다. 먼저 결론부터 내려놓고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이 큰 은혜를 입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혹시 ‘왜 굳이 고난에 뛰어들어야 하는가?’라고 물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내가 일부러 고난을 찾아다니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신실한 믿음으로 살아가노라면, 고난의 일들이 찾아오게 됩니다. 요한복음15:18-19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이런 고난이 올 때에 내 자신의 안일함과 욕망을 위하여 피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고난에 참여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본문말씀에 들어 있습니다. 본문13절을 봅시다.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이유는 주님이 심판의 주로 재림하실 때에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세상이 끝나고 영원한 영광의 삶이 시작 될 때에 그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8:18절에서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영광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아직 나타나지도 보이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영광의 길을 무시합니다. 보이지도 않는 영광을 위하여, 지금 당장 주어지는 고통스럽고 힘든 삶을 견뎌나갈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는 이 영광을 소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소망이 없다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겠지요. 그러면 지금 여러분의 삶에 다가온 어려움과 고통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분명히 본문에서는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 단순히 견뎌내는 정도가 아니라, 즐거운 마음으로 참여하라고 했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잠시는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계속적으로 그렇게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19절에서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라고 하십니다. 즉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도움을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찬송가 441장을 함께 부르겠습니다.
이 찬송은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John Wesley)의 동생인 찰스 웨슬리가 지은 찬송 시입니다. 이 찬송을 짓게 된 동기는,
어느 날, 서재의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쉬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디선가 작은 새 한 마리가 매에 쫓겨 다급하게 서재로 날아들었습니다. 새는 푸드득거리며 방안을 몇 바퀴 돌더니 찰스의 옷자락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찰스는 새가 놀라지 않도록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앉아서 새가 하는 대로 맡겨 두었습니다. 할딱거리던 작은 새는 잠시 후 평안해진 듯 보였습니다. 찰스는 작은 새를 품에서 꺼내어 쓰다듬어 주고는 창 밖으로 놓아 보냈습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그 작은 사건을 생각하다가, 불현듯 마음에 떠오르는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 감동을 적은 시가 바로 이 가사입니다.
이 가사에서처럼 고난의 비바람이 불어 닥치고, 고통의 물결이 높이 일어나는 때에 우리가 의지할 곳은 예수님뿐입니다. 고난의 풍파가 지나가도록 안전하게 숨을 곳은 주님의 품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의지하는 사람을 보호하시며, 도우시고 인도하십니다. 베드로전서1:5-7절에서,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두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고난의 길을 먼저 가신 주님께서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나아가라.’고 하십니다. 요한복음16:33절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때때로 고난은 우리에게 많은 고통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우리를 주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게 합니다.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하고, 우리를 돌아보게 하며, 우리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합니다. 그래서 시편119:71절에서 시편기자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유익은 주님이 재림하시는 때에 우리로 하여금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으며 즐거워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에게 고난이 닥칠 때에는 고난이 일어나는 이유를 주의해서 살펴야 합니다. 본문에서 말씀하는 고난이 일어나는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본문14-16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첫 번째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하여 받는 고난, 즉 그리스도인으로서 당하는 고난입니다. 두 번째는 자신의 죄악으로 인한 고난입니다. 즉 죄로 인한 징계로서의 고난입니다. 세 번째는 남의 일에 간섭하다가 당하는 고난입니다.
이 고난들 중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은 첫 번째 것 한 가지입니다. 그래서 19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이라고 단서를 붙여 놓은 것입니다. 이러한 고난을 받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14절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고난 받는 이유가 두 번째와 세 번째라면 자신을 깊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어느 수도원에서 나이 많은 수도사가 정원에서 흙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수도원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조금은 교만한 젊은 수도사가 그에게 다가옵니다. 나이 많은 수도사는 흙덩이를 하나 들고서 후배 수도사에게,
“이 흙덩이 위에다 물을 좀 부어주겠나?”
라고 요청했습니다. 젊은 수도사는 물을 부었습니다. 물은 흙덩이에 떨어지면서 전부 옆으로 흘러내렸습니다. 그러자 나이 많은 수도사는 옆에 있는 망치로 흙덩어리를 깨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부서진 흙을 모아놓고 젊은 수도사에게,
“다시 물을 부어주겠나?”
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번에는 물이 흙에 잘 스며들었고, 늙은 수도사는 그 흙들을 고르게 펴서 화단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야 물이 잘 스며드는구먼. 여기에 씨가 뿌려진다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이야. 우리도 역시 깨어져야 하나님께서 거기에 물을 주시고, 그럴 때 씨가 떨어지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힐 수 있는 것이지. 우리 수도사들은 이것을 ‘깨어짐의 영성’이라고 한다네.”
교만한 마음, 죄로 가득한 마음에는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깨뜨리십니다. 깨지고 부서질 때는 아프고 고통스럽지만 깨어지고 나면 주님의 평안이 머물면서 아름다운 삶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하워드 러틀리지’라는 분은 복음을 전하다가 북베트남 감옥에서 7년 동안 갇혀 지냈습니다. 그가 귀환한 후에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게 하시는 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말하자면 고통은 우리를 주목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확성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의 일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서게 하는 하나님의 비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고난을 통하여 나를 위한 영광의 면류관을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는 이 시간에 우리도 남은 생애를 주님의 고난에 참예하겠다는 결단을 합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날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으며,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