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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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4-03-14 21:39
♡♥♡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 왕하 4:1-7
*** 들어가는 말
예전에 TV에서 자연다큐멘터리인 ‘식물의 사생활’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한 적이 있었습니다. 영국 BBC에서 제작한 것인데, 내용이 좋아서 복사까지 해 두었던 프로그램입니다. 이 프로그램을 보면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의 오묘하신 능력과 함께 식물의 신비로운 생존투쟁을 볼 수 있습니다.
‘좁은 잎 페란초’라는 넝쿨 식물은 벽을 타고 올라가다 적당한 장소에 씨앗을 심습니다. 포자를 가득 품고 있는 ‘목도시 흙밤 버섯’은 생존에 절대 필요한 비를 기다립니다. 끈기 있게 기다렸다가 빗방울의 힘을 이용해서 포자주머니를 터뜨려 번식합니다. 사막의 어떤 식물은 완전히 말라죽은 뒤 번식할 수 있는 조건을 기다렸다가 조건만 주어지면 즉시 수백 개의 씨를 뿌립니다. 그 씨들은 20년이 지난 후에라도 조건이 주어지면 즉시 살아날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식물이나 동물들은 자연의 혹독한 환경과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생존을 위하여 싸워가며 적응해 갑니다. 그런데 가장 고귀한 존재로 지음 받은 인간이 오히려 쉽게 절망하고 포기하는 것 같습니다. 요즈음 들어, 우리나라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힘겨운 상황에 부딪치면 죽음으로서 그 환경을 벗어나려고 합니다.
이 시간의 본문 말씀에도 아주 급박한 상황에 처한 한 가정이 등장합니다. 이 가정은 선지자 생도의 가정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신학생 가정입니다. 그런데 선지자 생도는 두 아들과 아내를 남겨두고 이미 죽었고, 빚은 많아서 채주들이 빚 대신에 두 아들을 종으로 데려가려 합니다. 당시의 이스라엘에는 빚으로 인하여 자신과 온 가족이 노예로 팔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지금의 차압이나 가처분과 같은 그런 제도였습니다.
이런 답답한 상황 앞에서 선지자 생도 부인은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당면한 현실을 있는 대로 이야기 했습니다. 생도 부인의 사정을 들은 엘리사 선지자는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라고 묻습니다. 이 물음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시는 물음입니다.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또 하나의 하나님의 통치원리입니다. 왜 이렇게 물었겠습니까? 사정을 몰라서, 또는 무엇이 필요한지 정말 몰라서 이렇게 물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여러분에게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라고 물으신다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이 내용 속에는 중요한 내용들이 들어있습니다.
1.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물음의 의도를 찾아야 합니다.
엘리사 선지자가 찾아 온 선지자 생도 부인에게 물었던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라고 했던 물음과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고하라.”고 하는 요청은 성경에서 많이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물음과 요청에는 중요한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모세를 봅시다. 하나님께서 미디안 광야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만나셨습니다. 애굽에서 억압받는 유대인들을 구원해 내도록 모세를 사용하시려 했습니다. 모세는 극구 사양하면서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리이까?”(출3:11)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출4:2)라고 물으셨으며, 모세는 “지팡이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양을 치던 그 지팡이 하나로 능력을 나타내시고 역사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모세는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출4:10)라고 도저히 자신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그래도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화를 내셨고 결국 말 잘하는 모세의 형인 ‘아론’을 대변자로 세우셨습니다.
마태복음22:29절 이하에 두 사람의 소경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길 가실 때에 소경 둘이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댑니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소경들은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라고 했던 물음과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고하라.”고 하는 요청의 의도가 무엇인지 짐작이 가십니까? 아직 모르시겠습니까? 그렇다면 4복음서에 모두 등장하는 ‘오병이어의 기적’이야기를 봅시다. 이 이야기 속에서 이 질문의 의도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라고 물으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면서 설명하기를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요6:6)고 했습니다. 즉 “내가 너를(이 일을)위하여 어떻게 하랴?”라는 물으심은 요구사항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는지를 보시고자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화를 내신 것은 모세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소경이 고침을 받은 것은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네게 무엇이 있는지 고하라.”는 요청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근거로 하여 능력을 이루시는지’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모세에게는 양을 치던 지팡이가 있었습니다. 벳세다 들판의 오천의 무리들 앞에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들어 있는 작은 도시락이 있었으며, 선지자 생도 부인에게는 기름 한 병이 있었습니다. 3년 6개월의 가뭄 속에서 죽기를 기다리던 사르밧 과부에게는 한 끼니를 때울 수 있는 밀가루와 기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보잘것없는 것들로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홀로 이적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하여금 그 이적에 참여하게 하심을 보이십니다. 즉 자신의 작은 힘, 적은 소유라 할지라도 정직하게 하나님께 내 놓았을 때, 그것이 능력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는 것도 다른 곳에서 무엇인가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현재 있는 성도들의 땀과 수고와 헌신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성도 개인이나 가정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에게 지금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전혀 보잘것없는 것입니까? 모세의 지팡이나 오병이어의 작은 도시락보다는 더 못한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으로 능력을 이루십니다. 다만 그것에 순종과 헌신이 더해져야 합니다.
2. 이 물음은 우리의 사정을 아시는 주님의 물음임을 알아야 합니다.
선지자 생도 부인의 현실은 ① 가장의 사망, ② 막대한 부채, ③ 자녀들이 종으로 팔리게 될 위기였습니다. 이 고난의 현실은 영적인 것이 아니라 육신이 살아가는 현실적인 생활의 문제였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어려움이 닥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현실에 대한 낙심과 좌절이 엄습할 것입니다.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세상적인 도움을 찾아다니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선지자 생도 부인은 하나님의 사람인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부르짖었습니다. 여기서 ‘부르짖다’라는 말은 원어로 차아크(קꘞ:)인데, ‘번개와 같은 소리로 외치다’ ‘크게 외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주로 인간이 하나님께 도움을 청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문제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부르짖으라고 하셨습니다. 예레미야33:2-3절입니다.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하십니다.
여인은 자신의 현실적인 상황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 해결책을 알고 있었습니다. 옛 속담에,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여인은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아서 주저함 없이 나아갔습니다.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간 여인은 자신의 현실적인 상황을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 아뢰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할 기도의 요소를 찾을 수 있습니다. 여인은 ‘이렇게 저렇게 해 주십사’ 라는 대안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자신의 현실을 아뢰었을 뿐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마태복음6:7,8절입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빌립보서4:6,7절에서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아실뿐만 아니라, 최선의 것을 아십니다. 우리는 미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정확한 필요를 알 수가 없습니다. 오늘은 이것이 꼭 필요했지만, 내일은 전혀 무용지물이 될 수가 있습니다. 바로 내일의 필요를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 자신의 어리석은 대안을 제시하고 구하기보다, 당면한 현실을 아뢰면서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3. 이 물음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순종하라는 요청임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3-6절을 봅시다. 여인의 부르짖음을 들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이러저러한 설명 없이 이웃집에 가서 빈 그릇을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빌려오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두 아들과 함께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지금 가지고 있는 기름을 빌려 온 빈 그릇에 부으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황당한 지시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엘리사의 지시에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오직 말씀에 순종해서 빈 그릇들에 차례로 기름을 부었습니다. 이것이 여인의 믿음입니다. 빈 그릇들은 여인의 믿음대로 가득 가득하게 차올랐습니다. 아들이 ‘이제는 빈 그릇이 없습니다.’라고 말하자 기름이 그쳤습니다. 기름은 여인이 준비한 그릇만큼 채운 뒤에 멈췄습니다.
성도는 준비하고 순종한 만큼 받습니다. 기도로 준비하고, 마음으로 준비하고, 생활로 준비한 만큼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좋은 것을 풍성하게 주기를 원하셔도, 성도가 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받을 수가 없습니다. 시편81:10-12절입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치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그 마음의 강퍅한 대로 버려 두어 그 임의대로 행케 하였도다.”라고 하십니다.
콩나물은 시루 안에 있어야 합니다. 아침저녁으로 물을 부어도, 콩이 시루 안에 있어야 싹이 나고 자라지, 시루 밖에 있으면 콩알 그대로 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해도 은혜의 자리에 참여하지 않으면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또한 개방적인 열린 마음이어야 합니다. 즉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행전1:4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과 성도들은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사도행전1:13-14절에서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보고,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순종한 결과는 주님의 약속대로 성령 충만을 받았으며, 능력으로 덧입게 된 것입니다.
이제 여인의 집에는 온통 기름 그릇들로 가득 찼습니다. 그 사실을 엘리사 선지자에게 보고했습니다. 선지자는 그 기름을 팔아서 빚을 갚고 나머지로 가족들이 생활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의 생활을 책임지십니다. 빚으로 인하여 세상에 넘어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이 빚이 세상적인 욕망으로 인한 것이 아님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여러분, 생활에 고민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사정을 아뢰십시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있는 그대로 아뢰면 됩니다. 자녀들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편55:22절에서는,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하셨고, 이사야45:11-12절에서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라. 또 내 아들들의 일과 내 손으로 한 일에 대하여 내게 부탁하라. 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친수로 하늘을 펴고 그 만상을 명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모든 영적인 일이나 육신적인 일이나 모든 삶의 문제를 하나님께 아룁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받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루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예전에 TV에서 자연다큐멘터리인 ‘식물의 사생활’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한 적이 있었습니다. 영국 BBC에서 제작한 것인데, 내용이 좋아서 복사까지 해 두었던 프로그램입니다. 이 프로그램을 보면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의 오묘하신 능력과 함께 식물의 신비로운 생존투쟁을 볼 수 있습니다.
‘좁은 잎 페란초’라는 넝쿨 식물은 벽을 타고 올라가다 적당한 장소에 씨앗을 심습니다. 포자를 가득 품고 있는 ‘목도시 흙밤 버섯’은 생존에 절대 필요한 비를 기다립니다. 끈기 있게 기다렸다가 빗방울의 힘을 이용해서 포자주머니를 터뜨려 번식합니다. 사막의 어떤 식물은 완전히 말라죽은 뒤 번식할 수 있는 조건을 기다렸다가 조건만 주어지면 즉시 수백 개의 씨를 뿌립니다. 그 씨들은 20년이 지난 후에라도 조건이 주어지면 즉시 살아날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식물이나 동물들은 자연의 혹독한 환경과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생존을 위하여 싸워가며 적응해 갑니다. 그런데 가장 고귀한 존재로 지음 받은 인간이 오히려 쉽게 절망하고 포기하는 것 같습니다. 요즈음 들어, 우리나라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힘겨운 상황에 부딪치면 죽음으로서 그 환경을 벗어나려고 합니다.
이 시간의 본문 말씀에도 아주 급박한 상황에 처한 한 가정이 등장합니다. 이 가정은 선지자 생도의 가정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신학생 가정입니다. 그런데 선지자 생도는 두 아들과 아내를 남겨두고 이미 죽었고, 빚은 많아서 채주들이 빚 대신에 두 아들을 종으로 데려가려 합니다. 당시의 이스라엘에는 빚으로 인하여 자신과 온 가족이 노예로 팔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지금의 차압이나 가처분과 같은 그런 제도였습니다.
이런 답답한 상황 앞에서 선지자 생도 부인은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당면한 현실을 있는 대로 이야기 했습니다. 생도 부인의 사정을 들은 엘리사 선지자는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라고 묻습니다. 이 물음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시는 물음입니다.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또 하나의 하나님의 통치원리입니다. 왜 이렇게 물었겠습니까? 사정을 몰라서, 또는 무엇이 필요한지 정말 몰라서 이렇게 물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여러분에게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라고 물으신다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이 내용 속에는 중요한 내용들이 들어있습니다.
1.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물음의 의도를 찾아야 합니다.
엘리사 선지자가 찾아 온 선지자 생도 부인에게 물었던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라고 했던 물음과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고하라.”고 하는 요청은 성경에서 많이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물음과 요청에는 중요한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모세를 봅시다. 하나님께서 미디안 광야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만나셨습니다. 애굽에서 억압받는 유대인들을 구원해 내도록 모세를 사용하시려 했습니다. 모세는 극구 사양하면서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리이까?”(출3:11)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출4:2)라고 물으셨으며, 모세는 “지팡이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양을 치던 그 지팡이 하나로 능력을 나타내시고 역사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모세는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출4:10)라고 도저히 자신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그래도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화를 내셨고 결국 말 잘하는 모세의 형인 ‘아론’을 대변자로 세우셨습니다.
마태복음22:29절 이하에 두 사람의 소경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길 가실 때에 소경 둘이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댑니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소경들은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라고 했던 물음과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고하라.”고 하는 요청의 의도가 무엇인지 짐작이 가십니까? 아직 모르시겠습니까? 그렇다면 4복음서에 모두 등장하는 ‘오병이어의 기적’이야기를 봅시다. 이 이야기 속에서 이 질문의 의도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라고 물으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면서 설명하기를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요6:6)고 했습니다. 즉 “내가 너를(이 일을)위하여 어떻게 하랴?”라는 물으심은 요구사항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는지를 보시고자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화를 내신 것은 모세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소경이 고침을 받은 것은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네게 무엇이 있는지 고하라.”는 요청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근거로 하여 능력을 이루시는지’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모세에게는 양을 치던 지팡이가 있었습니다. 벳세다 들판의 오천의 무리들 앞에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들어 있는 작은 도시락이 있었으며, 선지자 생도 부인에게는 기름 한 병이 있었습니다. 3년 6개월의 가뭄 속에서 죽기를 기다리던 사르밧 과부에게는 한 끼니를 때울 수 있는 밀가루와 기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보잘것없는 것들로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홀로 이적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하여금 그 이적에 참여하게 하심을 보이십니다. 즉 자신의 작은 힘, 적은 소유라 할지라도 정직하게 하나님께 내 놓았을 때, 그것이 능력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는 것도 다른 곳에서 무엇인가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현재 있는 성도들의 땀과 수고와 헌신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성도 개인이나 가정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에게 지금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전혀 보잘것없는 것입니까? 모세의 지팡이나 오병이어의 작은 도시락보다는 더 못한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으로 능력을 이루십니다. 다만 그것에 순종과 헌신이 더해져야 합니다.
2. 이 물음은 우리의 사정을 아시는 주님의 물음임을 알아야 합니다.
선지자 생도 부인의 현실은 ① 가장의 사망, ② 막대한 부채, ③ 자녀들이 종으로 팔리게 될 위기였습니다. 이 고난의 현실은 영적인 것이 아니라 육신이 살아가는 현실적인 생활의 문제였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어려움이 닥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현실에 대한 낙심과 좌절이 엄습할 것입니다.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세상적인 도움을 찾아다니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선지자 생도 부인은 하나님의 사람인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부르짖었습니다. 여기서 ‘부르짖다’라는 말은 원어로 차아크(קꘞ:)인데, ‘번개와 같은 소리로 외치다’ ‘크게 외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주로 인간이 하나님께 도움을 청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문제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부르짖으라고 하셨습니다. 예레미야33:2-3절입니다.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하십니다.
여인은 자신의 현실적인 상황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 해결책을 알고 있었습니다. 옛 속담에,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여인은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아서 주저함 없이 나아갔습니다.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간 여인은 자신의 현실적인 상황을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 아뢰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할 기도의 요소를 찾을 수 있습니다. 여인은 ‘이렇게 저렇게 해 주십사’ 라는 대안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자신의 현실을 아뢰었을 뿐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마태복음6:7,8절입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빌립보서4:6,7절에서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아실뿐만 아니라, 최선의 것을 아십니다. 우리는 미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정확한 필요를 알 수가 없습니다. 오늘은 이것이 꼭 필요했지만, 내일은 전혀 무용지물이 될 수가 있습니다. 바로 내일의 필요를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 자신의 어리석은 대안을 제시하고 구하기보다, 당면한 현실을 아뢰면서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3. 이 물음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순종하라는 요청임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3-6절을 봅시다. 여인의 부르짖음을 들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이러저러한 설명 없이 이웃집에 가서 빈 그릇을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빌려오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두 아들과 함께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지금 가지고 있는 기름을 빌려 온 빈 그릇에 부으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황당한 지시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엘리사의 지시에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오직 말씀에 순종해서 빈 그릇들에 차례로 기름을 부었습니다. 이것이 여인의 믿음입니다. 빈 그릇들은 여인의 믿음대로 가득 가득하게 차올랐습니다. 아들이 ‘이제는 빈 그릇이 없습니다.’라고 말하자 기름이 그쳤습니다. 기름은 여인이 준비한 그릇만큼 채운 뒤에 멈췄습니다.
성도는 준비하고 순종한 만큼 받습니다. 기도로 준비하고, 마음으로 준비하고, 생활로 준비한 만큼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좋은 것을 풍성하게 주기를 원하셔도, 성도가 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받을 수가 없습니다. 시편81:10-12절입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치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그 마음의 강퍅한 대로 버려 두어 그 임의대로 행케 하였도다.”라고 하십니다.
콩나물은 시루 안에 있어야 합니다. 아침저녁으로 물을 부어도, 콩이 시루 안에 있어야 싹이 나고 자라지, 시루 밖에 있으면 콩알 그대로 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해도 은혜의 자리에 참여하지 않으면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또한 개방적인 열린 마음이어야 합니다. 즉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행전1:4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과 성도들은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사도행전1:13-14절에서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보고,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순종한 결과는 주님의 약속대로 성령 충만을 받았으며, 능력으로 덧입게 된 것입니다.
이제 여인의 집에는 온통 기름 그릇들로 가득 찼습니다. 그 사실을 엘리사 선지자에게 보고했습니다. 선지자는 그 기름을 팔아서 빚을 갚고 나머지로 가족들이 생활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의 생활을 책임지십니다. 빚으로 인하여 세상에 넘어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이 빚이 세상적인 욕망으로 인한 것이 아님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여러분, 생활에 고민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사정을 아뢰십시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있는 그대로 아뢰면 됩니다. 자녀들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편55:22절에서는,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하셨고, 이사야45:11-12절에서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라. 또 내 아들들의 일과 내 손으로 한 일에 대하여 내게 부탁하라. 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친수로 하늘을 펴고 그 만상을 명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모든 영적인 일이나 육신적인 일이나 모든 삶의 문제를 하나님께 아룁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받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루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