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의 거울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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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4-02-22 17:08
♡♥♡ 우리 삶의 거울 / 고린도전서 10:1-13
*** 들어가는 말
여러분, 오늘 거울을 보고 오셨습니까?
아마 하루에 한 번 이상 거울을 보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휴대용 거울을 가지고 다니면서 수시로 거울을 보고, 특히 여성분들은 화장 상태나 옷매무새 점검을 위하여 수시로 거울을 볼 것입니다. 이처럼 거울을 보는 이유는 자신의 용모를 점검하고 고치기 위함입니다.
거울은 사물의 외적인 모양만을 반사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삶을 반사하는 거울도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용모를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거울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 말씀에서처럼 사람의 삶을 하나님의 기준에 비추어 주는 거울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신구약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주는 훌륭한 거울입니다. 이는 성도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보도록 배려하신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 본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야고보서1:23-25절에서 그 방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대한 자신을 보게 합니다. 외적인 모습을 보게 하는 거울은 유리의 한 쪽 면에 은분을 칠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삶을 비추는 거울은 옛 선조들의 삶을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해 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런 면으로 볼 때, 본문은 삶을 비추는 거울에 대한 사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이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임을 찾아봅시다.
먼저, 말씀의 배경과 넓은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의 내용은 직접적으로는 고린도교회에 주신 말씀입니다. 바울이 머물던 에베소에서 불과 50Km정도의 거리에 고린도 시가 있었기 때문에 소식을 자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이 편지가 쓰일 당시의 고린도교회는 여러 문제로 인하여 혼란스러웠습니다. 특히 가장 큰 문제가 당파를 지어서 교회가 분열되는 것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이 사실을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이는 다름이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우상숭배로 인한 성적인 부도덕함과 쾌락을 쫓는 죄악이었습니다. 즉 육신에 얽매어 살면서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하나님께 속한 하나라는 사실을 1-4절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고 수많은 사람이 죽은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들이 광야에서 죽임을 당한 이유가 육신에 얽매인 삶으로 하나님을 노엽게 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죄악은 ‘우상숭배’, ‘간음’, ‘하나님을 시험함’, ‘원망’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이 일이 우리의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즉 지금의 고린도교회가 이런 일들로 얽혀 있는데, 만일 그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고린도교회도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수밖에 없음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결론부인 12-13절에서 이런 일들이 고린도교회를 시험하는 것이므로 조심하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확실한 분이시며 절대 믿을만한 분이시기 때문에 고린도교회에 다가온 시험을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다시 하나가 되며, 부활의 소망을 품고 하나를 이루어 영의 일에 더욱 힘쓰는 교회가 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부분인 고린도전서16:13-14절에서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하시며, 22절에서는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 엄하게 경고하십니다.
오늘에도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사단의 무리는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하나님의 교회, 성도의 가정, 그리스도인 개개인을 시험하고 대적합니다. 사단은 각 사람의 약점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혹과 시험으로 그 약점을 집중적으로 공격합니다. 특히 교회를 분열시키고, 성도들의 삶이 육신의 욕망을 따라가도록 유혹하고 부추깁니다. 왜냐하면 육신을 따르는 것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멀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5:17절(공동번역)입니다.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은 육정을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일은 우리의 영의 생명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에 중요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영의 삶을 비추는 거울을 한 번 들여다봅시다.
1. 하나님의 백성은 모두가 하나임을 보이십니다.
고린도교회가 겪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가 분열이었습니다. 당시의 지도자들이었던 바울, 베드로, 아볼로를 추종하는 파들이 생겼으며, 심지어 그리스도 파까지 생겨났습니다. 아마도 이들은 자신에게 세례를 준 지도자를 추종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이 일의 심각성을 알고는 하나님의 백성은 모두가 하나라는 사실을 출애굽 때의 일로 설명하며 가르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로 가는 입구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염려하며 근심하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홍해를 가르고 길을 내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다 가운데 난 길로 지나면서 물이 벽처럼 서 있는 신기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물 가운데로 지나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하는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광야 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밤에는 불기둥으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이 이스라엘 전체가 함께 받은 세례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지나면서 옛 삶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지금까지 애굽의 종노릇하던 생활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고 보호자가 되셨습니다. 그 표시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보내셨습니다. 이것이 세례의 의미입니다. 로마서6:3-4절(공동번역)입니다.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뿐만 아닙니다. 새벽이면 이슬처럼 내리는 만나를 먹었으며, 반석을 터뜨려서 주시는 물을 마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이 신령한 음식이며 신령한 음료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물을 낸 반석은 곧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거대한 성만찬에 참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한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입니다. 결코 분열될 수가 없습니다.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하나입니다. 한 하나님을 섬기며,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속함을 받은 한 지체입니다. 결코 분열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요한복음17:11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하셨고, 22절에서는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분열은 주님의 몸을 찢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에베소서4:3절에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2. 멸망으로 가는 길을 보이십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기준에 이르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종의 근성과 그 때에 보고 배운 것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육체의 욕망을 따라서 우상숭배를 하는가 하면, 간음하고, 하나님을 시험하고, 원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갔던 그 길은 바로 멸망으로 향하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을 한 번 봅시다.
1) 우상숭배의 길입니다.
이스라엘이 시내산에 이르렀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불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을 언약을 위하여 40일 동안 모세에게 이스라엘이 지켜야할 계명을 주셨습니다. 산 아래에서 기다리던 백성들은 모세를 기다리지 못하고 아론에게 요청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금송아지 앞에서 뛰놀며 경배했습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이 일로 인하여 3000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출32장).
2) 육신적 쾌락의 길입니다.
이스라엘이 ‘싯딤’에 이르렀을 때에 모압 여인들이 이스라엘을 유혹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압 여인과 음행을 했습니다. 더욱 무서운 것은 육신의 간음이 아니라 영적인 간음이었습니다. 모압 여인들은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청했고, 함께 절하고 음식을 먹으며 쾌락을 즐겼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염병이 돌아서 하루에 이만 사천 명이 죽었습니다(민25장).
3) 하나님을 시험하는 길입니다.
이스라엘이 호르산을 지나서 에돔 평원을 지날 때였습니다. 돌산의 거친 길과 메마른 사막 길로 인하여 백성들의 마음이 상했습니다. 백성들은 “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여기는 음식도 없고, 물도 없고, 이 박한 음식에 질렸다.”고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이적을 수없이 체험하고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고 시험했던 것입니다. 이 일로 하나님은 불 뱀을 보내셔서 원망한 모든 사람을 죽게 하셨습니다.
4) 원망하는 길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원망한 일은 수없이 많습니다. 특히 바란 광야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가나안을 앞에 두고 건너가야 할 때에 백성들은 정탐꾼을 보내어 미리 알아보자고 제의했습니다. 정탐꾼들은 ‘그 곳이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보고하면서 증거물로 가지고 온 과일들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 곳의 사람들은 거인들이며 어마어마한 군사력과 든든한 성벽이 있어서 점령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보고했습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은 통곡했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모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 일 때문에 출애굽 때에 20세 이상이었던 모든 사람이 죽도록 40년을 광야에서 방황해야 하는 징벌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우리 삶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은 없습니까?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모든 것이 우상입니다. 심지어는 ‘탐심’까지도 우상숭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적인 습관을 좇아서 육신의 쾌락에 빠져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즐기다가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나의 생활 속에서 항상 하나님을 기뻐하며 감사합니까? 나를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서, 잠시 주어지는 생활의 불편함과 고난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파멸을 자초하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길을 주기도 하시지만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도 동시에 주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원망하지 않아야 합니다. 원망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며, 불신하는 것입니다.
때때로 다가오는 시험과 어려움은 우리를 실패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과정을 통하여 좀더 영광스러운 자리, 좀 더 좋은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하나 되기를 힘쓰며, 우리를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면서 신실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여러분, 오늘 거울을 보고 오셨습니까?
아마 하루에 한 번 이상 거울을 보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휴대용 거울을 가지고 다니면서 수시로 거울을 보고, 특히 여성분들은 화장 상태나 옷매무새 점검을 위하여 수시로 거울을 볼 것입니다. 이처럼 거울을 보는 이유는 자신의 용모를 점검하고 고치기 위함입니다.
거울은 사물의 외적인 모양만을 반사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삶을 반사하는 거울도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용모를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거울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 말씀에서처럼 사람의 삶을 하나님의 기준에 비추어 주는 거울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신구약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주는 훌륭한 거울입니다. 이는 성도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보도록 배려하신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 본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야고보서1:23-25절에서 그 방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대한 자신을 보게 합니다. 외적인 모습을 보게 하는 거울은 유리의 한 쪽 면에 은분을 칠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삶을 비추는 거울은 옛 선조들의 삶을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해 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런 면으로 볼 때, 본문은 삶을 비추는 거울에 대한 사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이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임을 찾아봅시다.
먼저, 말씀의 배경과 넓은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의 내용은 직접적으로는 고린도교회에 주신 말씀입니다. 바울이 머물던 에베소에서 불과 50Km정도의 거리에 고린도 시가 있었기 때문에 소식을 자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이 편지가 쓰일 당시의 고린도교회는 여러 문제로 인하여 혼란스러웠습니다. 특히 가장 큰 문제가 당파를 지어서 교회가 분열되는 것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이 사실을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이는 다름이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우상숭배로 인한 성적인 부도덕함과 쾌락을 쫓는 죄악이었습니다. 즉 육신에 얽매어 살면서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하나님께 속한 하나라는 사실을 1-4절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고 수많은 사람이 죽은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들이 광야에서 죽임을 당한 이유가 육신에 얽매인 삶으로 하나님을 노엽게 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죄악은 ‘우상숭배’, ‘간음’, ‘하나님을 시험함’, ‘원망’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이 일이 우리의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즉 지금의 고린도교회가 이런 일들로 얽혀 있는데, 만일 그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고린도교회도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수밖에 없음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결론부인 12-13절에서 이런 일들이 고린도교회를 시험하는 것이므로 조심하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확실한 분이시며 절대 믿을만한 분이시기 때문에 고린도교회에 다가온 시험을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다시 하나가 되며, 부활의 소망을 품고 하나를 이루어 영의 일에 더욱 힘쓰는 교회가 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부분인 고린도전서16:13-14절에서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하시며, 22절에서는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 엄하게 경고하십니다.
오늘에도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사단의 무리는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하나님의 교회, 성도의 가정, 그리스도인 개개인을 시험하고 대적합니다. 사단은 각 사람의 약점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혹과 시험으로 그 약점을 집중적으로 공격합니다. 특히 교회를 분열시키고, 성도들의 삶이 육신의 욕망을 따라가도록 유혹하고 부추깁니다. 왜냐하면 육신을 따르는 것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멀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5:17절(공동번역)입니다.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은 육정을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일은 우리의 영의 생명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에 중요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영의 삶을 비추는 거울을 한 번 들여다봅시다.
1. 하나님의 백성은 모두가 하나임을 보이십니다.
고린도교회가 겪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가 분열이었습니다. 당시의 지도자들이었던 바울, 베드로, 아볼로를 추종하는 파들이 생겼으며, 심지어 그리스도 파까지 생겨났습니다. 아마도 이들은 자신에게 세례를 준 지도자를 추종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이 일의 심각성을 알고는 하나님의 백성은 모두가 하나라는 사실을 출애굽 때의 일로 설명하며 가르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로 가는 입구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염려하며 근심하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홍해를 가르고 길을 내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다 가운데 난 길로 지나면서 물이 벽처럼 서 있는 신기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물 가운데로 지나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하는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광야 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밤에는 불기둥으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이 이스라엘 전체가 함께 받은 세례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지나면서 옛 삶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지금까지 애굽의 종노릇하던 생활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고 보호자가 되셨습니다. 그 표시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보내셨습니다. 이것이 세례의 의미입니다. 로마서6:3-4절(공동번역)입니다.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뿐만 아닙니다. 새벽이면 이슬처럼 내리는 만나를 먹었으며, 반석을 터뜨려서 주시는 물을 마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이 신령한 음식이며 신령한 음료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물을 낸 반석은 곧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거대한 성만찬에 참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한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입니다. 결코 분열될 수가 없습니다.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하나입니다. 한 하나님을 섬기며,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속함을 받은 한 지체입니다. 결코 분열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요한복음17:11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하셨고, 22절에서는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분열은 주님의 몸을 찢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에베소서4:3절에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2. 멸망으로 가는 길을 보이십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기준에 이르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종의 근성과 그 때에 보고 배운 것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육체의 욕망을 따라서 우상숭배를 하는가 하면, 간음하고, 하나님을 시험하고, 원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갔던 그 길은 바로 멸망으로 향하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을 한 번 봅시다.
1) 우상숭배의 길입니다.
이스라엘이 시내산에 이르렀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불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을 언약을 위하여 40일 동안 모세에게 이스라엘이 지켜야할 계명을 주셨습니다. 산 아래에서 기다리던 백성들은 모세를 기다리지 못하고 아론에게 요청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금송아지 앞에서 뛰놀며 경배했습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이 일로 인하여 3000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출32장).
2) 육신적 쾌락의 길입니다.
이스라엘이 ‘싯딤’에 이르렀을 때에 모압 여인들이 이스라엘을 유혹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압 여인과 음행을 했습니다. 더욱 무서운 것은 육신의 간음이 아니라 영적인 간음이었습니다. 모압 여인들은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청했고, 함께 절하고 음식을 먹으며 쾌락을 즐겼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염병이 돌아서 하루에 이만 사천 명이 죽었습니다(민25장).
3) 하나님을 시험하는 길입니다.
이스라엘이 호르산을 지나서 에돔 평원을 지날 때였습니다. 돌산의 거친 길과 메마른 사막 길로 인하여 백성들의 마음이 상했습니다. 백성들은 “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여기는 음식도 없고, 물도 없고, 이 박한 음식에 질렸다.”고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이적을 수없이 체험하고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고 시험했던 것입니다. 이 일로 하나님은 불 뱀을 보내셔서 원망한 모든 사람을 죽게 하셨습니다.
4) 원망하는 길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원망한 일은 수없이 많습니다. 특히 바란 광야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가나안을 앞에 두고 건너가야 할 때에 백성들은 정탐꾼을 보내어 미리 알아보자고 제의했습니다. 정탐꾼들은 ‘그 곳이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보고하면서 증거물로 가지고 온 과일들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 곳의 사람들은 거인들이며 어마어마한 군사력과 든든한 성벽이 있어서 점령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보고했습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은 통곡했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모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 일 때문에 출애굽 때에 20세 이상이었던 모든 사람이 죽도록 40년을 광야에서 방황해야 하는 징벌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우리 삶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은 없습니까?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모든 것이 우상입니다. 심지어는 ‘탐심’까지도 우상숭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적인 습관을 좇아서 육신의 쾌락에 빠져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즐기다가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나의 생활 속에서 항상 하나님을 기뻐하며 감사합니까? 나를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서, 잠시 주어지는 생활의 불편함과 고난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파멸을 자초하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길을 주기도 하시지만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도 동시에 주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원망하지 않아야 합니다. 원망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며, 불신하는 것입니다.
때때로 다가오는 시험과 어려움은 우리를 실패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과정을 통하여 좀더 영광스러운 자리, 좀 더 좋은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하나 되기를 힘쓰며, 우리를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면서 신실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