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생명에 이르는 길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7,145회
작성일
2004-02-07 17:44
♡♥♡ 참된 생명에 이르는 길 / 마19:16-22
*** 들어가는 말
로버트 영 박사의 수기에 있는 글입니다. 어느 저녁에 아이들의 잠자리를 돌보려고 어린 딸아이의 방 앞에 왔을 때, 아이의 자그마한 기도소리가 들렸습니다. 딸애는 잠자기 전 침대 맡에서 엎드려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하나님께 자신이 소원하는 여러 가지 기도 제목들을 죽 열거해 나갔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기도를 멈추고 고개를 들어 하늘로 눈을 향한 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요,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없나요?”
어린아이의 생각이 하나님께로 열려있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아마도 아이는 하나님께 많은 것을 요구하다가, 문득 자신도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나봅니다. 이러한 생각이 하나님께 대한 헌신으로 이어지는 시작입니다.
그런데, 오늘에는 이 어린아이만큼도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저 생각하는 것이라고는 자신들의 이익과 평안입니다.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가 온통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이제는 지역이기주의까지 가세를 해서 더욱 침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홍보용으로라도 고아원이나 양로원, 청소년 가장 등의 어렵고 소외된 이웃들을 방문하고 위문품을 전달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선심마저도 사라졌습니다. 남을 위하여 헌신하고 봉사하는 일들이 자꾸만 줄어들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습니까?
오래도록 무의탁 행려(行旅) 자들을 위하여 무료급식, 무료진료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해 온 최일도 목사님을 아시지요? 그분이 쓴 ‘밥 짓는 시인, 퍼주는 사랑’이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최 목사님이 전도사 시절이었던 사역 초기에, 청량리 홍등가(속칭, 텍사스 거리)에서 행려 자들을 위한 무료급식을 계속했습니다. 그때 모여든 가난한 행려 자들과 그 지역 사람들 사이에 최 전도사의 ‘신분’을 놓고 논란이 벌어졌습니다. 사람들 사이에는 그 청년이 가톨릭의 신부(神父)이거나 수사(修士)라는 말이 파다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렇게 추측하는 이유가 이렇습니다.
“아, 교회에서 이런 일 하는 거 봤나? 이런 일은 성당에서나 하는 거라고. 그러니 저 사람은 신부일 거야.”
세상 사람들의 시선에는 교회가 사회를 위하여 섬기고 봉사하는 것이 보이지 않나 봅니다. 실제로는 사회의 구제나 봉사를 위한 시설들의 많은 부분이 그리스도인들이 사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헌신과 봉사를 잘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전체 교회의 규모에 비하면 사회에 대한 섬김과 헌신과 봉사의 일들이 너무나 적은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명분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일 예배에 한 번 참석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를 다 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자신의 시간과 물질과 힘을 드려서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부담감이 상대적으로 적은 큰 교회를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헌신이 없이는 주어지는 영광이 없고 제자가 될 수도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10:37-38절에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는 헌신을 의미합니다. 이 시간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말씀으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먼저, 본문의 내용과 구성을 살펴봅시다.
본문의 이야기는 예수님을 찾아 온 부자 청년과 예수님의 대화로 되어 있습니다. 이 부자 청년의 이야기는 공관복음이라고 부르는 세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10:17-22절에, 누가복음에는 18:18-23절에 있습니다. 그리고 세 곳 모두가 같은 구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본문의 앞 쪽에는 ‘천국이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의 것이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본문의 뒤 쪽에는 ‘재물과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모든 것을 헌신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성은 본문의 내용과 관계가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즉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에 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은 세 복음서를 모두 참조하면, 젊은 청년이며, 돈이 많은 부자였고, 정부의 관원이었습니다. 현대적으로 표현하면, 젊은 나이에 출세한 사람입니다. 사회적인 지위도 있고, 경제적인 부, 종교적인 열심, 그리고 젊음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에게 마지막 소망이라면 영원한 생명을 보장 받는 것이겠지요.
예수님은 청년에게 “영원한 생명을 원한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계명들은 율법을 의미하는 ‘십계명’입니다. 청년은 자랑스럽고 당당하게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되묻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청년은 신앙의 가정에서 자랐으며, 율법에 엄한 교육을 받았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청년에게 한 가지를 더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요구 사항이 ‘온전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한 부분’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자신감이 가득하고, 자랑스럽고 당당하던 청년은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청년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이유를 ‘재물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청년은 재물을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재물도 가지고, 영원한 생명도 가지고 싶었는데, 청년은 영원한 생명을 포기했습니다.
이 내용을 사이에 두고, 앞쪽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의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 이유를 알겠습니까? 그리고 뒤에는 재물을 포기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심히 어렵다는 것과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겠습니까? 이 본문 속에서 ‘참된 생명에 이르는 길’을 찾아봅시다.
1. 생명에 이르는 첫 번째 길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영생의 길을 물었을 때, 예수님의 첫 번째 대답은 ‘계명을 지켜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청년에게 “네가 계명을 아나니…”라고 하셨는데, 청년이 ‘계명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즉 이미 청년의 생각을 읽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러면서 십계명 중에서 5계명부터 10계명까지, 사람에게 해당하는 부분만을 열거하셨습니다. 청년은 그 계명들을 어려서부터 잘 지켜왔다고 자신 있게 대답 했으며, 예수님께서는 수긍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두 가지로 요약해서 새 계명으로 가르치신 것을 아시지요? 마태복음 22:36-40절입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청년에게 이 두 계명 중에서 두 번째 것을 먼저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이것을 먼저 말씀하셨겠습니까? 이유는 요한일서4:20절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누가복음16:11-12절을 봅시다.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생각하기 전에, 사람이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육신의 삶에서 먼저 성실하게 충성하고, 사랑해야 함을 말씀합니다. 이것이 참된 생명에 이르는 첫 번째 길입니다.
2. 생명에 이르는 두 번째 길은 온전한 헌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청년이 첫 번째 길을 잘 통과했음을 사랑스럽게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온전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가 부족하다.’고 하시면서 두 번째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민감하고 결단하기가 크게 어려운 부분입니다.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이는 세상적인 삶의 포기와 제자의 길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부르실 때를 기억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고, 제자들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청년을 제자의 길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 제자의 길은 청년이 원하던 것보다 훨씬 더 영광스러운 길입니다. 단순히 영원한 생명만을 얻는 길이 아니라 지극히 큰 영광의 길입니다. 그런데 부자 청년은 그 영광된 길을 포기하고 맙니다. 세상에 쌓아둔 부귀영화가 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고 하시면서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불가능입니다. 그만큼 어렵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부귀영화, 세상에서 즐기던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버리는 것, 이것이 어찌 쉽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청년에게 제시하신 이 두 번째 길은 하나님께로 향한 온전한 헌신과 희생입니다. 이것이 두 계명 중에서 첫 번째 계명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년이 계명들을 다 지켰다고 했을 때에 “오히려 한 가지가 부족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이전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렇게 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이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따르는 제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고 하셨고, 야고보서4:4절에서는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확증하시려고 이 이야기의 뒤쪽에 ‘하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헌신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을 말씀하셨습니다. 27절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은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하고 희생한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혹시, 여러분도 이 말씀을 듣고 나니 부자 청년처럼 마음이 무겁고, 갈등이 생기고, 염려가 되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홀로 무거운 짐을 지고 가도록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약속을 생각하십시오. 주님의 보상은 우리가 버린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그토록 중요하게 여겼던 부귀와 명예를 ‘배설물’처럼 여기고 버렸다고 했습니다.
우리 하나씩 차근차근 풀어갑시다. 올해에는 사람 사랑하는 연습부터 해 나갑시다. 서로를 위해서 배려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사랑으로 품읍시다. 이렇게 한 걸음씩 나아가노라면 주님을 진실하게 사랑하며 모든 것을 헌신할 수 있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생명의 길로 성실하게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생명의 길로 나아갈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약속하신 은혜를 넘치도록 풍족하게 받아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로버트 영 박사의 수기에 있는 글입니다. 어느 저녁에 아이들의 잠자리를 돌보려고 어린 딸아이의 방 앞에 왔을 때, 아이의 자그마한 기도소리가 들렸습니다. 딸애는 잠자기 전 침대 맡에서 엎드려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하나님께 자신이 소원하는 여러 가지 기도 제목들을 죽 열거해 나갔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기도를 멈추고 고개를 들어 하늘로 눈을 향한 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요,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없나요?”
어린아이의 생각이 하나님께로 열려있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아마도 아이는 하나님께 많은 것을 요구하다가, 문득 자신도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나봅니다. 이러한 생각이 하나님께 대한 헌신으로 이어지는 시작입니다.
그런데, 오늘에는 이 어린아이만큼도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저 생각하는 것이라고는 자신들의 이익과 평안입니다.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가 온통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이제는 지역이기주의까지 가세를 해서 더욱 침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홍보용으로라도 고아원이나 양로원, 청소년 가장 등의 어렵고 소외된 이웃들을 방문하고 위문품을 전달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선심마저도 사라졌습니다. 남을 위하여 헌신하고 봉사하는 일들이 자꾸만 줄어들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습니까?
오래도록 무의탁 행려(行旅) 자들을 위하여 무료급식, 무료진료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해 온 최일도 목사님을 아시지요? 그분이 쓴 ‘밥 짓는 시인, 퍼주는 사랑’이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최 목사님이 전도사 시절이었던 사역 초기에, 청량리 홍등가(속칭, 텍사스 거리)에서 행려 자들을 위한 무료급식을 계속했습니다. 그때 모여든 가난한 행려 자들과 그 지역 사람들 사이에 최 전도사의 ‘신분’을 놓고 논란이 벌어졌습니다. 사람들 사이에는 그 청년이 가톨릭의 신부(神父)이거나 수사(修士)라는 말이 파다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렇게 추측하는 이유가 이렇습니다.
“아, 교회에서 이런 일 하는 거 봤나? 이런 일은 성당에서나 하는 거라고. 그러니 저 사람은 신부일 거야.”
세상 사람들의 시선에는 교회가 사회를 위하여 섬기고 봉사하는 것이 보이지 않나 봅니다. 실제로는 사회의 구제나 봉사를 위한 시설들의 많은 부분이 그리스도인들이 사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헌신과 봉사를 잘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전체 교회의 규모에 비하면 사회에 대한 섬김과 헌신과 봉사의 일들이 너무나 적은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명분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일 예배에 한 번 참석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를 다 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자신의 시간과 물질과 힘을 드려서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부담감이 상대적으로 적은 큰 교회를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헌신이 없이는 주어지는 영광이 없고 제자가 될 수도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10:37-38절에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는 헌신을 의미합니다. 이 시간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말씀으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먼저, 본문의 내용과 구성을 살펴봅시다.
본문의 이야기는 예수님을 찾아 온 부자 청년과 예수님의 대화로 되어 있습니다. 이 부자 청년의 이야기는 공관복음이라고 부르는 세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10:17-22절에, 누가복음에는 18:18-23절에 있습니다. 그리고 세 곳 모두가 같은 구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본문의 앞 쪽에는 ‘천국이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의 것이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본문의 뒤 쪽에는 ‘재물과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모든 것을 헌신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성은 본문의 내용과 관계가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즉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에 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은 세 복음서를 모두 참조하면, 젊은 청년이며, 돈이 많은 부자였고, 정부의 관원이었습니다. 현대적으로 표현하면, 젊은 나이에 출세한 사람입니다. 사회적인 지위도 있고, 경제적인 부, 종교적인 열심, 그리고 젊음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에게 마지막 소망이라면 영원한 생명을 보장 받는 것이겠지요.
예수님은 청년에게 “영원한 생명을 원한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계명들은 율법을 의미하는 ‘십계명’입니다. 청년은 자랑스럽고 당당하게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되묻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청년은 신앙의 가정에서 자랐으며, 율법에 엄한 교육을 받았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청년에게 한 가지를 더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요구 사항이 ‘온전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한 부분’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자신감이 가득하고, 자랑스럽고 당당하던 청년은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청년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이유를 ‘재물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청년은 재물을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재물도 가지고, 영원한 생명도 가지고 싶었는데, 청년은 영원한 생명을 포기했습니다.
이 내용을 사이에 두고, 앞쪽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의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 이유를 알겠습니까? 그리고 뒤에는 재물을 포기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심히 어렵다는 것과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겠습니까? 이 본문 속에서 ‘참된 생명에 이르는 길’을 찾아봅시다.
1. 생명에 이르는 첫 번째 길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영생의 길을 물었을 때, 예수님의 첫 번째 대답은 ‘계명을 지켜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청년에게 “네가 계명을 아나니…”라고 하셨는데, 청년이 ‘계명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즉 이미 청년의 생각을 읽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러면서 십계명 중에서 5계명부터 10계명까지, 사람에게 해당하는 부분만을 열거하셨습니다. 청년은 그 계명들을 어려서부터 잘 지켜왔다고 자신 있게 대답 했으며, 예수님께서는 수긍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두 가지로 요약해서 새 계명으로 가르치신 것을 아시지요? 마태복음 22:36-40절입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청년에게 이 두 계명 중에서 두 번째 것을 먼저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이것을 먼저 말씀하셨겠습니까? 이유는 요한일서4:20절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누가복음16:11-12절을 봅시다.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생각하기 전에, 사람이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육신의 삶에서 먼저 성실하게 충성하고, 사랑해야 함을 말씀합니다. 이것이 참된 생명에 이르는 첫 번째 길입니다.
2. 생명에 이르는 두 번째 길은 온전한 헌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청년이 첫 번째 길을 잘 통과했음을 사랑스럽게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온전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가 부족하다.’고 하시면서 두 번째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민감하고 결단하기가 크게 어려운 부분입니다.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이는 세상적인 삶의 포기와 제자의 길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부르실 때를 기억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고, 제자들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청년을 제자의 길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 제자의 길은 청년이 원하던 것보다 훨씬 더 영광스러운 길입니다. 단순히 영원한 생명만을 얻는 길이 아니라 지극히 큰 영광의 길입니다. 그런데 부자 청년은 그 영광된 길을 포기하고 맙니다. 세상에 쌓아둔 부귀영화가 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고 하시면서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불가능입니다. 그만큼 어렵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부귀영화, 세상에서 즐기던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버리는 것, 이것이 어찌 쉽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청년에게 제시하신 이 두 번째 길은 하나님께로 향한 온전한 헌신과 희생입니다. 이것이 두 계명 중에서 첫 번째 계명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년이 계명들을 다 지켰다고 했을 때에 “오히려 한 가지가 부족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이전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렇게 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이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따르는 제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고 하셨고, 야고보서4:4절에서는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확증하시려고 이 이야기의 뒤쪽에 ‘하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헌신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을 말씀하셨습니다. 27절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은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하고 희생한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혹시, 여러분도 이 말씀을 듣고 나니 부자 청년처럼 마음이 무겁고, 갈등이 생기고, 염려가 되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홀로 무거운 짐을 지고 가도록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약속을 생각하십시오. 주님의 보상은 우리가 버린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그토록 중요하게 여겼던 부귀와 명예를 ‘배설물’처럼 여기고 버렸다고 했습니다.
우리 하나씩 차근차근 풀어갑시다. 올해에는 사람 사랑하는 연습부터 해 나갑시다. 서로를 위해서 배려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사랑으로 품읍시다. 이렇게 한 걸음씩 나아가노라면 주님을 진실하게 사랑하며 모든 것을 헌신할 수 있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생명의 길로 성실하게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생명의 길로 나아갈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약속하신 은혜를 넘치도록 풍족하게 받아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