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해야 할 영의 삶10-사랑함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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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4-07-31 14:32
♡♥♡ 회복해야 할 영의 삶10 - 사랑 함
*** 들어가는 말
우리 마음을 아름답게 하는 103가지 이야기에 나오는 일화입니다.
국립묘지 옆에 묘지를 찾아오는 유가족들에게 꽃을 파는 꽃가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꽃가게 옆 길거리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꽃다발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매일 저녁이면 국립묘지를 돌면서 묘지 앞에 놓여 있는 꽃다발들을 모아 와서 다음 날이면 다시 팔았습니다. 묘지에 헌화하는 꽃들은 거의가 조화이기 때문이지요. 그 사실을 안 꽃가게 주인 아들이 분개하며 말했습니다.
“아버지! 고발해요. 그럴 수 있어요? 남의 묘지의 꽃다발을 갖다 파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러나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겨울, 눈이 많이 오는 날이었습니다. 묘지를 찾는 이가 없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수입이 없어졌습니다. 그 날 그 꽃가게 주인은 꽃다발을 한 아름 안고 묘지 여기저기 뿌려놓고 왔습니다. 저녁 무렵, 그 꽃다발을 주우러 가는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꽃가게 주인은 빙그레 웃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진한 이웃 사랑에 그만 울어버렸습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하며, 살맛나게 하는 것은 역시 ‘사랑’입니다. 인간 세상에 사랑이 없다면 얼마나 삭막하겠습니까?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가장 훌륭한 작품은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당신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본문8절 후반 절에서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하십니다.
이 시대에 회복해야 할 영의 삶 10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살펴보려는 주제는 ‘사랑함’입니다. 사랑은 은사 중에서 최고의 은사이며,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 중에 첫 번째이며, 베드로후서1장에서 말씀하는 말세의 성도의 삶의 자세 8가지 중에서 가장 위에 있는 것도 역시 사랑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613가지의 율법을 요약하셔서 새 계명을 가르치신 두 가지는 하나님 사랑함과 사람 사랑함입니다. 그리고 기독교를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왜 ‘사랑함’이라고 했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앞의 아홉 가지도 역시 기뻐함, 자원함 등으로 같은 표현을 썼습니다. 그 이유는 행동이 따라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사랑은 차라리 책망하는 것보다 못합니다. 잠언27:5절을 봅시다.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속으로 사랑하는 것보다 터놓고 꾸짖는 것이 낫다.”고 번역했습니다.
여러분은 사랑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부부간의 사랑표현, 부모자녀간의 사랑표현, 하나님께 대한 사랑표현이 다르겠지요. 이 시간에는 우리가 회복해야 할 사랑이 어떤 것이며, 어떻게 사랑해야 하며, 그 대상은 누구인지를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우리가 회복해야 할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의 칭찬과 책망, 그리고 권면이 담긴 편지를 받았던 계시록의 일곱 교회가 있습니다. 맨 처음으로 편지를 받은 에베소교회는 예수님으로부터 이런 책망을 받았습니다. 계시록2:4절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의 “처음 사랑”은 ‘처음 그리스도를 영접하면서 가졌던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의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악한 자들을 가려내고, 거짓 사도들을 구별하느라 교인 서로 간에 의심하고 사랑이 식어졌습니다. 비록 교리적으로는 칭찬할 만 했지만, 사랑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생명 없는 형식주의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주님께서는 5절에서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사랑은 ‘처음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여러분이 처음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았을 때를 돌아보십시오. 그저 막연히 교회를 다니다가 어느 날, 주님의 사랑을 깨달았을 때의 그 기쁨과 감격은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새벽기도회, 철야기도회, 부흥회까지 열심히 쫓아다니며, 교회 일에 봉사하면서도 마냥 즐거웠던 그 열정 말입니다. 찬양하면 눈물이 나고 왠지 모르게 주님이 좋기만 하던 그런 사랑. 아무런 대가를 기대하지 않았던 그 사랑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신앙생활이 익숙하여 지면서 점점 요령이 생기고 꾀가 생깁니다. 주님을 향하던 그 순수하던 사랑도 어느덧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요구하는 조건부 사랑으로 변해갑니다. 하나님의 일에 봉사하는 것도 자꾸만 이유가 생기고 피하게 됩니다. 순수하던 사랑은 잃어가고 대신 인간의 잔꾀가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꾀가 생긴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이 식어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전도자 솔로몬은 전도서7:29절에서 이러한 인생의 심리를 이렇게 간파하고 있습니다.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
이제 우리도 에베소 교회에 책망하시던 주님의 음성에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계시록2:5절을 현대어성경으로 읽겠습니다. “네가 처음으로 나를 사랑하던 그 시절을 돌이켜 보라. 그래서 그렇게 달라진 이유를 찾아 깊이 뉘우치고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 그전처럼 힘써 노력하라. 만일 그렇게 하지 않을 때는 내가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치워 버릴 것이다.” 우리가 처음 사랑과 열정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서의 우리의 자리를 없애버리시겠다고 하십니다. 여러분이 회복해야 할 사랑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듯”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서야 돌아선다고 부산을 떨지 말고, 지금 기회가 있을 때에 처음 자리를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2. 어떤 사랑을 해야 합니까?
처음 사랑의 자리를 찾으려니까 막연하지요? 그렇다면 처음 사랑의 자리를 회복한다는 것이 어떤 것이겠습니까? 우리가 사랑해야 할 내용을 알려면, 먼저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유를 찾아봅시다.
본문 말씀에서 7절과 11절을 보겠습니다. 먼저 7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1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7절에서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11절에서는 ‘이런 이유 때문에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렇다면 7절에서 11절 사이에는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할 이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9절과 10절에서는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회복케 하시려고,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화목제물로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거역한 인간을 살려주시려고 독생자까지 버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사랑을 해야 합니까? 요한복음13:34절을 봅시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즉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받은 사람은 그 사랑의 힘으로 사람세상에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서로 사랑하는 범위는 어디까지입니까? 요한복음15:13-14절을 봅시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하십니다. 사랑의 범위는 목숨을 줄 수 있는 것까지입니다. 너무 현실성이 없습니까? 요한복음13:14절입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빌립보서2:3절에서는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하셨습니다. 서로 발을 씻기고, 남을 나보다 나은 사람으로 여기는 것은 겸손한 사랑이며, 섬기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은 실천적인 사랑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사랑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하는 행동입니다.
2001년 9월 5일자 모 일간지에서, 2000년 한 해 동안 전국에서 헌혈한 종교인 통계를 낸 것을 보았습니다. 종교기관을 통하여 헌혈한 46,018명 중 기독교인이 38,344명, 천주교인은 5,648명, 불교인은 648명 그리고 기타종교가 1,378명이었습니다.
헌혈도 작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 예에서도 기독교는 사랑이 근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아래의 20절을 봅시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멀리서 찾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가까이에 있는 믿음의 형제자매를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며, 작은 것이라도 나누고 베풀고, 섬기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3. 누구를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
물론 사랑의 대상은 모든 사람입니다.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대상의 제한이 있겠습니까?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대로 성도 서로 간에 깊은 신앙적인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가르치신 계명대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더욱 관심을 가지고 힘써야 할 사랑의 대상이 있습니다. 이 사랑은 주님이 알아주시고, 갚아주시는 사랑입니다.
마태복음25:4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하여 그 대상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지극히 작은 자’는 소외되고, 인격적으로 무시당하는 존재입니다. 좀 더 상세하게 말씀하시는 누가복음14:12-14절을 봅시다.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즉 대가를 기대하고 베풀거나, 되갚음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을 피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6:10절에서는 사랑을 행할 대상의 우선권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고 하십니다.
이런 대상자들에게 어떻게 사랑을 해야 합니까? 구제, 기도, 금식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만 아시도록 은밀하게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하나님께서 갚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앞에 고의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다.’는 무언의 표현입니다. 만일 이렇게 드러내면 이미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인정을 받아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갚으실 것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구제도, 기도도, 금식도 사랑을 행하는 한 방법입니다. 이웃을 위하여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 더 나아가서 금식하면서까지 기도하는 간절함은 결코 쉬운 사랑이 아닙니다. 이처럼 어떤 방법으로 사랑을 하든지 하나님이 보시도록 은밀하고 진실하게 행하여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진실한 사랑은 따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따지시거나 책망하시는 말씀을 보신 적 있습니까? 제자들이 서로 자신이 높다고 싸울 때도,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저주하며 배반했을 때에도, 스승인 예수님을 팔기 위하여 무리를 모아서 이끌고 온 가룟 유다를 보시면서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후 모두가 실망하여 낙향했을 때, 그곳에 찾아 오셔서도,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던 도마에게도 주님은 책망하시거나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일본의 전도자 ‘가가와 토요히꼬(賀川豊彦)’의 이야기 중에 하나입니다.
가가와의 친구가 한 번은 가가와가 전도하는 빈민굴에 찾아왔습니다. 그 친구는 가가와가 전도하는 것을 보니 아무리 봐도 이 사람이 허송세월을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도박꾼, 싸움해서 살인한 사람, 전과자, 창녀들을 전도하여 모아 놓고 예배를 드리는데, 모두들 찬송을 모르니까 자기 혼자 찬송을 목이 터져라 부르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도박꾼이자 깡패인데, 예배당에 술 먹고 토해놓고, 창녀들은 앉아서 히죽히죽 웃고 있습니다. 또 뒤에서는 남자들이 와서 예배드리는 중에 창녀를 끌어내면 창녀는 일어나서 나갑니다. 그런가 하면 깡패들이 찾아와서 돈을 내라고 가가와의 따귀를 때립니다. 그러면 돈을 주었습니다. 이 친구는 그 모습을 보면서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가가와에게
“저 사람들에게 돈을 주면 가서 술 마시고 도박을 할 텐데 너는 위선이다. 네가 알고 주느냐?”
고 따졌습니다. 그때 가가와는
“나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하신 것같이 한다.” 고 하면서
“우리가 어린이를 키울 때 넘어지면 일으켜 주듯이, 의사가 병자에게 주사를 놓고 또 놓듯이, 넘어지면 일으켜 줘야 한다. 다 알고 있지만 마지막까지 믿어 주고 참아 주는 것이 사랑이 아니냐?”
고 했습니다.
사랑은 이렇게 마지막까지 참아 주고, 견디고, 속아 주는 것입니다. ‘내가 네게 어떻게 했는데, 네가 이럴 수 있느냐?’라고 따지지 않습니다. ‘내가 이 돈 주면 너 가서 술 먹을 거지?’라고 따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시면서 ‘너 지난번에도 그랬지 않느냐? 지금 용서해 주면 다음에 또 그럴 거지?’라고 따지지 않으십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사랑합시다. 우리교회가 이런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어 주님의 기쁨이 됩시다.
여러분, 사랑은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값없이 받았기 때문에 당연히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행하지 않는 어떤 일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린도전서13:3절 말씀입니다.
*** 들어가는 말
우리 마음을 아름답게 하는 103가지 이야기에 나오는 일화입니다.
국립묘지 옆에 묘지를 찾아오는 유가족들에게 꽃을 파는 꽃가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꽃가게 옆 길거리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꽃다발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매일 저녁이면 국립묘지를 돌면서 묘지 앞에 놓여 있는 꽃다발들을 모아 와서 다음 날이면 다시 팔았습니다. 묘지에 헌화하는 꽃들은 거의가 조화이기 때문이지요. 그 사실을 안 꽃가게 주인 아들이 분개하며 말했습니다.
“아버지! 고발해요. 그럴 수 있어요? 남의 묘지의 꽃다발을 갖다 파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러나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겨울, 눈이 많이 오는 날이었습니다. 묘지를 찾는 이가 없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수입이 없어졌습니다. 그 날 그 꽃가게 주인은 꽃다발을 한 아름 안고 묘지 여기저기 뿌려놓고 왔습니다. 저녁 무렵, 그 꽃다발을 주우러 가는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꽃가게 주인은 빙그레 웃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진한 이웃 사랑에 그만 울어버렸습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하며, 살맛나게 하는 것은 역시 ‘사랑’입니다. 인간 세상에 사랑이 없다면 얼마나 삭막하겠습니까?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가장 훌륭한 작품은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당신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본문8절 후반 절에서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하십니다.
이 시대에 회복해야 할 영의 삶 10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살펴보려는 주제는 ‘사랑함’입니다. 사랑은 은사 중에서 최고의 은사이며,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 중에 첫 번째이며, 베드로후서1장에서 말씀하는 말세의 성도의 삶의 자세 8가지 중에서 가장 위에 있는 것도 역시 사랑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613가지의 율법을 요약하셔서 새 계명을 가르치신 두 가지는 하나님 사랑함과 사람 사랑함입니다. 그리고 기독교를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왜 ‘사랑함’이라고 했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앞의 아홉 가지도 역시 기뻐함, 자원함 등으로 같은 표현을 썼습니다. 그 이유는 행동이 따라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사랑은 차라리 책망하는 것보다 못합니다. 잠언27:5절을 봅시다.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속으로 사랑하는 것보다 터놓고 꾸짖는 것이 낫다.”고 번역했습니다.
여러분은 사랑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부부간의 사랑표현, 부모자녀간의 사랑표현, 하나님께 대한 사랑표현이 다르겠지요. 이 시간에는 우리가 회복해야 할 사랑이 어떤 것이며, 어떻게 사랑해야 하며, 그 대상은 누구인지를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우리가 회복해야 할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의 칭찬과 책망, 그리고 권면이 담긴 편지를 받았던 계시록의 일곱 교회가 있습니다. 맨 처음으로 편지를 받은 에베소교회는 예수님으로부터 이런 책망을 받았습니다. 계시록2:4절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의 “처음 사랑”은 ‘처음 그리스도를 영접하면서 가졌던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의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악한 자들을 가려내고, 거짓 사도들을 구별하느라 교인 서로 간에 의심하고 사랑이 식어졌습니다. 비록 교리적으로는 칭찬할 만 했지만, 사랑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생명 없는 형식주의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주님께서는 5절에서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사랑은 ‘처음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여러분이 처음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았을 때를 돌아보십시오. 그저 막연히 교회를 다니다가 어느 날, 주님의 사랑을 깨달았을 때의 그 기쁨과 감격은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새벽기도회, 철야기도회, 부흥회까지 열심히 쫓아다니며, 교회 일에 봉사하면서도 마냥 즐거웠던 그 열정 말입니다. 찬양하면 눈물이 나고 왠지 모르게 주님이 좋기만 하던 그런 사랑. 아무런 대가를 기대하지 않았던 그 사랑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신앙생활이 익숙하여 지면서 점점 요령이 생기고 꾀가 생깁니다. 주님을 향하던 그 순수하던 사랑도 어느덧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요구하는 조건부 사랑으로 변해갑니다. 하나님의 일에 봉사하는 것도 자꾸만 이유가 생기고 피하게 됩니다. 순수하던 사랑은 잃어가고 대신 인간의 잔꾀가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꾀가 생긴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이 식어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전도자 솔로몬은 전도서7:29절에서 이러한 인생의 심리를 이렇게 간파하고 있습니다.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
이제 우리도 에베소 교회에 책망하시던 주님의 음성에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계시록2:5절을 현대어성경으로 읽겠습니다. “네가 처음으로 나를 사랑하던 그 시절을 돌이켜 보라. 그래서 그렇게 달라진 이유를 찾아 깊이 뉘우치고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 그전처럼 힘써 노력하라. 만일 그렇게 하지 않을 때는 내가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치워 버릴 것이다.” 우리가 처음 사랑과 열정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서의 우리의 자리를 없애버리시겠다고 하십니다. 여러분이 회복해야 할 사랑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듯”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서야 돌아선다고 부산을 떨지 말고, 지금 기회가 있을 때에 처음 자리를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2. 어떤 사랑을 해야 합니까?
처음 사랑의 자리를 찾으려니까 막연하지요? 그렇다면 처음 사랑의 자리를 회복한다는 것이 어떤 것이겠습니까? 우리가 사랑해야 할 내용을 알려면, 먼저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유를 찾아봅시다.
본문 말씀에서 7절과 11절을 보겠습니다. 먼저 7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1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7절에서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11절에서는 ‘이런 이유 때문에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렇다면 7절에서 11절 사이에는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할 이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9절과 10절에서는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회복케 하시려고,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화목제물로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거역한 인간을 살려주시려고 독생자까지 버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사랑을 해야 합니까? 요한복음13:34절을 봅시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즉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받은 사람은 그 사랑의 힘으로 사람세상에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서로 사랑하는 범위는 어디까지입니까? 요한복음15:13-14절을 봅시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하십니다. 사랑의 범위는 목숨을 줄 수 있는 것까지입니다. 너무 현실성이 없습니까? 요한복음13:14절입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빌립보서2:3절에서는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하셨습니다. 서로 발을 씻기고, 남을 나보다 나은 사람으로 여기는 것은 겸손한 사랑이며, 섬기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은 실천적인 사랑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사랑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하는 행동입니다.
2001년 9월 5일자 모 일간지에서, 2000년 한 해 동안 전국에서 헌혈한 종교인 통계를 낸 것을 보았습니다. 종교기관을 통하여 헌혈한 46,018명 중 기독교인이 38,344명, 천주교인은 5,648명, 불교인은 648명 그리고 기타종교가 1,378명이었습니다.
헌혈도 작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 예에서도 기독교는 사랑이 근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아래의 20절을 봅시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멀리서 찾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가까이에 있는 믿음의 형제자매를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며, 작은 것이라도 나누고 베풀고, 섬기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3. 누구를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
물론 사랑의 대상은 모든 사람입니다.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대상의 제한이 있겠습니까?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대로 성도 서로 간에 깊은 신앙적인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가르치신 계명대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더욱 관심을 가지고 힘써야 할 사랑의 대상이 있습니다. 이 사랑은 주님이 알아주시고, 갚아주시는 사랑입니다.
마태복음25:4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하여 그 대상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지극히 작은 자’는 소외되고, 인격적으로 무시당하는 존재입니다. 좀 더 상세하게 말씀하시는 누가복음14:12-14절을 봅시다.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즉 대가를 기대하고 베풀거나, 되갚음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을 피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6:10절에서는 사랑을 행할 대상의 우선권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고 하십니다.
이런 대상자들에게 어떻게 사랑을 해야 합니까? 구제, 기도, 금식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만 아시도록 은밀하게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하나님께서 갚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앞에 고의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다.’는 무언의 표현입니다. 만일 이렇게 드러내면 이미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인정을 받아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갚으실 것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구제도, 기도도, 금식도 사랑을 행하는 한 방법입니다. 이웃을 위하여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 더 나아가서 금식하면서까지 기도하는 간절함은 결코 쉬운 사랑이 아닙니다. 이처럼 어떤 방법으로 사랑을 하든지 하나님이 보시도록 은밀하고 진실하게 행하여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진실한 사랑은 따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따지시거나 책망하시는 말씀을 보신 적 있습니까? 제자들이 서로 자신이 높다고 싸울 때도,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저주하며 배반했을 때에도, 스승인 예수님을 팔기 위하여 무리를 모아서 이끌고 온 가룟 유다를 보시면서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후 모두가 실망하여 낙향했을 때, 그곳에 찾아 오셔서도,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던 도마에게도 주님은 책망하시거나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일본의 전도자 ‘가가와 토요히꼬(賀川豊彦)’의 이야기 중에 하나입니다.
가가와의 친구가 한 번은 가가와가 전도하는 빈민굴에 찾아왔습니다. 그 친구는 가가와가 전도하는 것을 보니 아무리 봐도 이 사람이 허송세월을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도박꾼, 싸움해서 살인한 사람, 전과자, 창녀들을 전도하여 모아 놓고 예배를 드리는데, 모두들 찬송을 모르니까 자기 혼자 찬송을 목이 터져라 부르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도박꾼이자 깡패인데, 예배당에 술 먹고 토해놓고, 창녀들은 앉아서 히죽히죽 웃고 있습니다. 또 뒤에서는 남자들이 와서 예배드리는 중에 창녀를 끌어내면 창녀는 일어나서 나갑니다. 그런가 하면 깡패들이 찾아와서 돈을 내라고 가가와의 따귀를 때립니다. 그러면 돈을 주었습니다. 이 친구는 그 모습을 보면서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가가와에게
“저 사람들에게 돈을 주면 가서 술 마시고 도박을 할 텐데 너는 위선이다. 네가 알고 주느냐?”
고 따졌습니다. 그때 가가와는
“나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하신 것같이 한다.” 고 하면서
“우리가 어린이를 키울 때 넘어지면 일으켜 주듯이, 의사가 병자에게 주사를 놓고 또 놓듯이, 넘어지면 일으켜 줘야 한다. 다 알고 있지만 마지막까지 믿어 주고 참아 주는 것이 사랑이 아니냐?”
고 했습니다.
사랑은 이렇게 마지막까지 참아 주고, 견디고, 속아 주는 것입니다. ‘내가 네게 어떻게 했는데, 네가 이럴 수 있느냐?’라고 따지지 않습니다. ‘내가 이 돈 주면 너 가서 술 먹을 거지?’라고 따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시면서 ‘너 지난번에도 그랬지 않느냐? 지금 용서해 주면 다음에 또 그럴 거지?’라고 따지지 않으십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사랑합시다. 우리교회가 이런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어 주님의 기쁨이 됩시다.
여러분, 사랑은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값없이 받았기 때문에 당연히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행하지 않는 어떤 일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린도전서13:3절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