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해야 할 영의 삶8-기뻐함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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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4-07-09 22:47
♡♥♡ 회복해야 할 영의 삶8 - 기뻐함 / 요16:20-24, 느8:10
*** 들어가는 말
요한복음16:20-24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느헤미야8:10 “느헤미야가 또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이 시대에 회복해야 할 영의 삶 여덟 번째는 ‘기뻐함’입니다. 기뻐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무척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내면적인 신앙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삶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 중에서 ‘사랑’ 다음이 ‘희락’ 즉 기뻐함입니다.
미국의 어느 교회에는 낮 열두시 무렵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초라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 노인은 교회에 들어갔다가 2,3분이 지나면 다시 나와서 어디론가 가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노인에 대하여 궁금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관리인에게 그 노인을 만나서 사연을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어느 날, 관리인이 교회에서 나오는 노인에게 왜 왔는지를 물었습니다.
“나요? 기도하려고 왔지요.”
“할아버지는 기도할 만큼 오랫동안 교회에 머무르지 않으셨어요.”
“나 참, 난 오래 기도할 줄 몰라요. 날마다 열 두 시만 되면 이리로 와서 ‘예수님 나왔어요. 나, 짐이에요.’ 하는 거요. 그러다가 그냥 간단 말이요. 그저 짧은 기도죠. 그래도 들어주실 것 같아서요.”
얼마 후, 노인이 사고를 당하여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입원해 있는 병동에 놀라운 감화를 끼쳤습니다. 투덜대기만 하던 환자들이 즐거워하게 되고, 가끔씩 폭소가 터져 나오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노인을 담당하는 간호사가 물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 다들 그러는데 병실 분위기가 이렇게 달라진 것이 할아버지 덕분이라더군요. 할아버지는 항상 즐거우시다면서요?”
“그래요 간호사 선생, 나는 그렇고 말고. 그런데 그것은 내 방문객 덕분이야. 날마다 그 분이 나를 기쁘게 하거든.”
간호사는 어안이 벙벙해졌습니다. 왜냐하면 그 노인은 친척도 없어서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으며 늘 혼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간호사는 궁금한 듯 물었습니다.
“날마다 찾아오는 방문객이라뇨? 그 방문객은 언제 오나요?”
“날마다 오지, 암 그렇고 말고. 날마다 열두시면 내 침대 저쪽에 그분이 와서는 서 계신단 말이오. 내가 그분을 쳐다보면 그분은 싱긋이 웃으시면서 ‘짐, 날세. 나, 예수네.’ 하지 않겠어.”
이 흥미로운 이야기 속에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이며, 기쁨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줍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은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의 삶’이며, 기쁨의 근원은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복음15:11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기쁨’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영적 삶의 요소입니다. 이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어떤 환경이나 조건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기쁨은 한계가 있으며, 기뻐하기고 즐겁기 위하여 필요한 환경과 조건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어떤 환경과 상황도 뛰어넘는 진정한 기쁨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고 고백합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기쁨은 모든 환경을 초월하는 기쁨입니다. 핍박과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영혼에서 솟아오르는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기쁨이 바로 이 기쁨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5:16절에서는 “항상 기뻐하라.”고 하셨으며, 빌립보서4:4절에서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성도의 얼굴은 항상 밝아야 합니다.
1. 기뻐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구약 본문인 느헤미야8:10절을 봅시다. “느헤미야가 또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기뻐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어떻게 힘이 됩니까? 하나님을 기뻐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감사하는 것이며, 내 삶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지난 주일에도 보았던 말씀입니다. 신명기28:47-48절입니다.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을 인하여,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핍절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대적을 섬기게 될 것이니, 그가 철 멍에를 네 목에 메워서 필경 너를 멸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필요를 채우시며 은혜로 인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할 줄 모르고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것은 스스로 재앙을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사람이 되셨으며, 생명까지 주신 일이 감사하고 기뻐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기뻐하고 또 기뻐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뻐하며 즐거워하고 존귀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더욱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이사야58:13-14절을 봅시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영국의 대 설교가인 ‘스펄젼’ 목사님은 설교 중에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촛불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전등불을 주시고, 전등불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햇빛을 주시고, 햇빛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촛불도 전등불도 달빛도 필요 없는 영원한 천국을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역사하시며 섭리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힘이 됩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어려울수록 기뻐하려고 힘쓰십시오. 예로부터 물건을 파는 상술에, ‘불경기가 되고 장사가 안 될수록 점포를 확장하고 화려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사람들의 관심을 더 끌기 때문입니다. 일이 안 된다고, 어렵다고 얼굴 찡그리고 세상 고민 혼자 다 짊어진 것처럼 하고 있으면 누가 예쁘다고 찾아주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인하여 기뻐하십시오. 쉽지 않겠지만 힘써야 합니다. 쉽다면 모든 성도가 다 그렇게 하지 않았겠습니까?!
다음으로, 로마서5:2절을 봅시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이 은혜에 들어감”이란 이신득의(以信得義), 즉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은혜에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후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영광을 최고로 기뻐하고 자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하나님의 영광을 기뻐합니까? 이는 하나님의 영광은 곧 성도들의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성도들에게 주어질 영광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나타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위하여 계획하신 구원이 완성될 것입니다. 즉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영광입니다. 이 영광을 소망하기 때문에 기뻐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러한 소망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생활 속에서 내게 이런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기뻐합니까? 아니면 당장 눈앞에 다가온 어려움과 고통으로 인하여 근심하며 불평하고 원망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여러분의 삶의 소망이 되면 힘과 능력이 됨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영원한 즐거움과 행복을 누릴 하나님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면서 기뻐합시다. 이렇게 하나님을 기뻐하면 어느 사이엔가 우리가 소망하는 항구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시편107:30절입니다.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2. 어떻게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까?
기뻐해야 한다는 것은 이제 알았습니다. 그러나 기뻐해야 한다고 기뻐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까? 해답은 단 하나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담겨있는 요한복음17장에서 13절을 봅시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기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집니다. 신약 본문 말씀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24절을 봅시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어떤 환경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진정한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집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구하지 않았다면 구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세상의 것과는 분명히 구별이 됩니다. 본문 말씀에서 세상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과 주님의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기쁨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소망이 이루어짐으로서 기뻐합니다. 성도들도 세상적인 관점으로 살 때에는 눈앞에 보이는 세상의 일로 기뻐하기도 하고 근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이후에는 주님이 주시는 참된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좋은 가문에서 출생한 것을 부러워하며, 좋은 부모, 넉넉한 집안에서 생활하는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또한 이러한 조건이 행복한 삶, 기쁨의 삶을 보장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서도 이러한 세상적인 조건으로 인하여 행복하게 살았다고 하는 증거 하는 곳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도 그런 조건으로 인하여 평생토록 행복과 기쁨을 누렸다고 하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1923년 어느 날, 미국의 시카고에 있는 ‘에드워드 비치’호텔에서는 당대 미국의 최고 부자로 손꼽히는 일곱 사람이 모였습니다. 이 모임은 사람들의 큰 관심을 모았습니다. 어떤 신문에서는 이 일곱 사람의 재산을 합치면 미국 전체의 국고를 능가할 것이라고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신문 기자가 시카고에서 그들이 모였던 1923년의 그 날로 시작해서 꼭 25년이 지난 1948년에 그 사람들의 생애를 다시 추적해서 발표했습니다.
첫 번째, 강철회사 사장인 ‘찰스 슈언’은 25년 후 한 푼 없는 거지가 되어 죽었습니다. 두 번째, 밀농사로 거부가 되었던 ‘알써 카튼’ 역시 사업이 파산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쓸쓸하고 고독한 가운데, 아무도 그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채 죽었습니다. 세 번째, 뉴욕 은행의 총재였던 ‘리차드 위트니’는 자기를 둘러싼 여러 가지 상황이 잘못되어 감옥에서 고독하게 여생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네 번째, 미국의 재무장관까지 지냈던 ‘엘버트 홀’은 감옥에서 막 보석으로 풀려 나와 외로운 여생을 지내고 있었습니다. 다섯 번째, 월스트리트의 회장이었던 ‘J.C.리버모아’는 자살했습니다. 여섯 번째, 국제은행의 총재였던 ‘리온 프레이져’ 역시 자살로 자기의 삶을 마쳤습니다. 일곱 번째, 부동산업계의 거부였던 ‘이반 크루컬’은 자살 미수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 거부들의 비극적인 종말은 1948년 당시 미국사람들에게 큰 충격이었다고 보도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나라의 역대 권력자들이나 재력가들이 권력이나 재물로 평생 행복과 기쁨을 누리며 산 사람을 알고 계십니까? 성경의 위대한 인물인 사도 바울도 당대에는 최고의 학식과 지혜를 겸비했으며, 권력을 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난 후에 무엇이라고 고백했습니까? 빌립보서3:7-9절 상반절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무엇인가 얻으려고 기웃거리지 마십시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씀대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면 됩니다. 그리고 세상의 환경 때문에 전전긍긍하지 말고 세상의 진정한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부탁하면 됩니다. 오직 하나님을 기뻐하며 당당하게 나아갑시다. 어떤 환경과 위협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당당하게 나아갔던 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하나님을 기뻐하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 들어가는 말
요한복음16:20-24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느헤미야8:10 “느헤미야가 또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이 시대에 회복해야 할 영의 삶 여덟 번째는 ‘기뻐함’입니다. 기뻐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무척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내면적인 신앙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삶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 중에서 ‘사랑’ 다음이 ‘희락’ 즉 기뻐함입니다.
미국의 어느 교회에는 낮 열두시 무렵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초라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 노인은 교회에 들어갔다가 2,3분이 지나면 다시 나와서 어디론가 가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노인에 대하여 궁금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관리인에게 그 노인을 만나서 사연을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어느 날, 관리인이 교회에서 나오는 노인에게 왜 왔는지를 물었습니다.
“나요? 기도하려고 왔지요.”
“할아버지는 기도할 만큼 오랫동안 교회에 머무르지 않으셨어요.”
“나 참, 난 오래 기도할 줄 몰라요. 날마다 열 두 시만 되면 이리로 와서 ‘예수님 나왔어요. 나, 짐이에요.’ 하는 거요. 그러다가 그냥 간단 말이요. 그저 짧은 기도죠. 그래도 들어주실 것 같아서요.”
얼마 후, 노인이 사고를 당하여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입원해 있는 병동에 놀라운 감화를 끼쳤습니다. 투덜대기만 하던 환자들이 즐거워하게 되고, 가끔씩 폭소가 터져 나오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노인을 담당하는 간호사가 물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 다들 그러는데 병실 분위기가 이렇게 달라진 것이 할아버지 덕분이라더군요. 할아버지는 항상 즐거우시다면서요?”
“그래요 간호사 선생, 나는 그렇고 말고. 그런데 그것은 내 방문객 덕분이야. 날마다 그 분이 나를 기쁘게 하거든.”
간호사는 어안이 벙벙해졌습니다. 왜냐하면 그 노인은 친척도 없어서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으며 늘 혼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간호사는 궁금한 듯 물었습니다.
“날마다 찾아오는 방문객이라뇨? 그 방문객은 언제 오나요?”
“날마다 오지, 암 그렇고 말고. 날마다 열두시면 내 침대 저쪽에 그분이 와서는 서 계신단 말이오. 내가 그분을 쳐다보면 그분은 싱긋이 웃으시면서 ‘짐, 날세. 나, 예수네.’ 하지 않겠어.”
이 흥미로운 이야기 속에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이며, 기쁨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줍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은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의 삶’이며, 기쁨의 근원은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복음15:11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기쁨’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영적 삶의 요소입니다. 이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어떤 환경이나 조건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기쁨은 한계가 있으며, 기뻐하기고 즐겁기 위하여 필요한 환경과 조건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어떤 환경과 상황도 뛰어넘는 진정한 기쁨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고 고백합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기쁨은 모든 환경을 초월하는 기쁨입니다. 핍박과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영혼에서 솟아오르는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기쁨이 바로 이 기쁨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5:16절에서는 “항상 기뻐하라.”고 하셨으며, 빌립보서4:4절에서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성도의 얼굴은 항상 밝아야 합니다.
1. 기뻐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구약 본문인 느헤미야8:10절을 봅시다. “느헤미야가 또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기뻐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어떻게 힘이 됩니까? 하나님을 기뻐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감사하는 것이며, 내 삶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지난 주일에도 보았던 말씀입니다. 신명기28:47-48절입니다.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을 인하여,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핍절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대적을 섬기게 될 것이니, 그가 철 멍에를 네 목에 메워서 필경 너를 멸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필요를 채우시며 은혜로 인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할 줄 모르고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것은 스스로 재앙을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사람이 되셨으며, 생명까지 주신 일이 감사하고 기뻐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기뻐하고 또 기뻐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뻐하며 즐거워하고 존귀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더욱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이사야58:13-14절을 봅시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영국의 대 설교가인 ‘스펄젼’ 목사님은 설교 중에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촛불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전등불을 주시고, 전등불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햇빛을 주시고, 햇빛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촛불도 전등불도 달빛도 필요 없는 영원한 천국을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역사하시며 섭리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힘이 됩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어려울수록 기뻐하려고 힘쓰십시오. 예로부터 물건을 파는 상술에, ‘불경기가 되고 장사가 안 될수록 점포를 확장하고 화려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사람들의 관심을 더 끌기 때문입니다. 일이 안 된다고, 어렵다고 얼굴 찡그리고 세상 고민 혼자 다 짊어진 것처럼 하고 있으면 누가 예쁘다고 찾아주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인하여 기뻐하십시오. 쉽지 않겠지만 힘써야 합니다. 쉽다면 모든 성도가 다 그렇게 하지 않았겠습니까?!
다음으로, 로마서5:2절을 봅시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이 은혜에 들어감”이란 이신득의(以信得義), 즉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은혜에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후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영광을 최고로 기뻐하고 자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하나님의 영광을 기뻐합니까? 이는 하나님의 영광은 곧 성도들의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성도들에게 주어질 영광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나타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위하여 계획하신 구원이 완성될 것입니다. 즉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영광입니다. 이 영광을 소망하기 때문에 기뻐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러한 소망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생활 속에서 내게 이런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기뻐합니까? 아니면 당장 눈앞에 다가온 어려움과 고통으로 인하여 근심하며 불평하고 원망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여러분의 삶의 소망이 되면 힘과 능력이 됨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영원한 즐거움과 행복을 누릴 하나님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면서 기뻐합시다. 이렇게 하나님을 기뻐하면 어느 사이엔가 우리가 소망하는 항구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시편107:30절입니다.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2. 어떻게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까?
기뻐해야 한다는 것은 이제 알았습니다. 그러나 기뻐해야 한다고 기뻐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까? 해답은 단 하나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담겨있는 요한복음17장에서 13절을 봅시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기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집니다. 신약 본문 말씀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24절을 봅시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어떤 환경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진정한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집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구하지 않았다면 구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세상의 것과는 분명히 구별이 됩니다. 본문 말씀에서 세상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과 주님의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기쁨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소망이 이루어짐으로서 기뻐합니다. 성도들도 세상적인 관점으로 살 때에는 눈앞에 보이는 세상의 일로 기뻐하기도 하고 근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이후에는 주님이 주시는 참된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좋은 가문에서 출생한 것을 부러워하며, 좋은 부모, 넉넉한 집안에서 생활하는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또한 이러한 조건이 행복한 삶, 기쁨의 삶을 보장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서도 이러한 세상적인 조건으로 인하여 행복하게 살았다고 하는 증거 하는 곳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도 그런 조건으로 인하여 평생토록 행복과 기쁨을 누렸다고 하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1923년 어느 날, 미국의 시카고에 있는 ‘에드워드 비치’호텔에서는 당대 미국의 최고 부자로 손꼽히는 일곱 사람이 모였습니다. 이 모임은 사람들의 큰 관심을 모았습니다. 어떤 신문에서는 이 일곱 사람의 재산을 합치면 미국 전체의 국고를 능가할 것이라고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신문 기자가 시카고에서 그들이 모였던 1923년의 그 날로 시작해서 꼭 25년이 지난 1948년에 그 사람들의 생애를 다시 추적해서 발표했습니다.
첫 번째, 강철회사 사장인 ‘찰스 슈언’은 25년 후 한 푼 없는 거지가 되어 죽었습니다. 두 번째, 밀농사로 거부가 되었던 ‘알써 카튼’ 역시 사업이 파산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쓸쓸하고 고독한 가운데, 아무도 그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채 죽었습니다. 세 번째, 뉴욕 은행의 총재였던 ‘리차드 위트니’는 자기를 둘러싼 여러 가지 상황이 잘못되어 감옥에서 고독하게 여생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네 번째, 미국의 재무장관까지 지냈던 ‘엘버트 홀’은 감옥에서 막 보석으로 풀려 나와 외로운 여생을 지내고 있었습니다. 다섯 번째, 월스트리트의 회장이었던 ‘J.C.리버모아’는 자살했습니다. 여섯 번째, 국제은행의 총재였던 ‘리온 프레이져’ 역시 자살로 자기의 삶을 마쳤습니다. 일곱 번째, 부동산업계의 거부였던 ‘이반 크루컬’은 자살 미수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 거부들의 비극적인 종말은 1948년 당시 미국사람들에게 큰 충격이었다고 보도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나라의 역대 권력자들이나 재력가들이 권력이나 재물로 평생 행복과 기쁨을 누리며 산 사람을 알고 계십니까? 성경의 위대한 인물인 사도 바울도 당대에는 최고의 학식과 지혜를 겸비했으며, 권력을 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난 후에 무엇이라고 고백했습니까? 빌립보서3:7-9절 상반절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무엇인가 얻으려고 기웃거리지 마십시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씀대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면 됩니다. 그리고 세상의 환경 때문에 전전긍긍하지 말고 세상의 진정한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부탁하면 됩니다. 오직 하나님을 기뻐하며 당당하게 나아갑시다. 어떤 환경과 위협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당당하게 나아갔던 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하나님을 기뻐하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