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해야 할 영의 삶3 - 돌아봄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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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4-06-05 14:42
♡♥♡ 회복해야 할 영의 삶3 - 돌아봄
*** 들어가는 말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회복해야 할 영의 삶 세 번째는 ‘돌아봄’입니다. 돌아봄이란 내 삶의 주변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머무는 삶의 현장에서 사회의 일원으로서 생활을 나누는 삶을 말합니다. 이러한 삶은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신 삶이며 복음의 특성이기도 합니다. 복음은 자기중심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하신 것은 섬김과 봉사와 희생의 삶을 위한 것입니다. 마가복음10:45절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십니다.
어느 날, 유대 랍비의 집에 100세쯤 되어 보이는 노인이 찾아와서 ‘좀 쉬어 가게 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랍비는 즉시 노인을 들어오게 하고 하룻밤 쉬어가도록 했습니다. 잠시 후, 랍비는 소파에 앉아 있는 노인에게
“유대교인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나는 무신론잡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랍비는 화가 났습니다.
“우리 집에 무신론자를 묵게 할 수 없습니다.”
라고 소리를 지르고는 노인을 내어 쫓았습니다. 아무 말 없이 노인은 캄캄한 밖으로 비틀거리면서 걸어갔습니다. 마음을 진정한 랍비가 잠시 후 성경을 읽기 시작하자 성령의 나즈막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 아들아, 왜 그 노인을 내어 쫓았느냐?”
“그는 무신론잡니다, 저는 그와 함께 하룻밤 지낸다는 것을 참을 수 없습니다.”
다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나는 그를 거의 백년이나 참아주었다.”
랍비의 가슴은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랍비는 급히 뛰어나가 노인을 찾았습니다. 랍비는 노인을 다시 불러들여 친절하게 대해 주며 하룻밤을 편히 쉬게 해 주었습니다.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이 곧 돌아보는 삶이며, 하나님 자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13:35절에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1. 돌아봄의 실제적인 의미를 살펴봅시다.
고린도전서9:19-23절을 읽겠습니다.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의 동화적(同化的)인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 식의 돌아보는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교에 동화되거나 이방인의 삶에 동화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의 삶 속에 들어간 것입니다. 우리 옛 말에도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 속에 들어간다고 해서 그들과 같은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성품으로서 그들을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동화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돌아봄의 의미이고 목적입니다. 만일 돌아보는 삶에서 복음이 빠진다면 목적을 잃어버리는 것이 됩니다.
본문을 봅시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으며, 너는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라고 되물으셨습니다. 율법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율법사는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거의 죽도록 맞고는 입은 옷과 가진 것까지 다 빼앗기고 버려졌습니다. 얼마 후에 제사장이 그 길로 가다가 신음하며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는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또 얼마 후에 레위인도 지나다가 그를 보고는 그냥 지나갔습니다. 다시 조금 후에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다가 그를 보고는 불쌍하게 생각하여 급한 대로 응급처치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나귀에 실어서 가까운 여관까지 가서 여관주인에게 자신의 돈을 주면서 환자를 돌보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돈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주겠다는 부탁까지 남겼습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로서 당연히 긍휼을 베풀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으로 그를 외면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혼잡하고 더러운 민족이라고 비웃던 사마리아 사람은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이 비유의 결론은 36절의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사는 당연히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네 삶의 자리에서 주변을 돌아보는 삶을 살아라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야고보서1:27절에서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돌아본다는 것은 내 삶의 자리에서 주변의 사람들과 삶을 나누는 것입니다.
2. 지금 우리의 입장은 어떠합니까?
우리가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이 시대의 모든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시대에 돌아보는 삶을 살라고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이대로 좋습니까? 예수님이 지금 심판의 주(主)로 세상에 다시 오신다면 이 모습 이대로 후회 없이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까? 이 물음에 ‘아멘’이라고 할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로부터 ‘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고 불렸으며,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라고까지 불렸던 우리민족은 정이 많은 민족입니다. 불과 얼마 전에 북한의 룡천참사를 돕고자 발 벗고 나서는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한 핏줄임을 실감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천재지변이나 어려운 재난을 만난 이웃이 있을 때면 허리를 졸라매며 힘을 합하여 돕는 사람들입니다. 지금도 세계인들은 우리민족의 ‘부조문화’에 대하여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큰 일이 있을 때에는 관심을 가지는 것 같은데,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는 혈연, 지연, 학연, 지역주의 등의 연고를 찾아 똘똘 뭉치는 개인 중심적인 특성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고린도교회가 파벌로 인하여 책망을 받았는데, 오늘의 교회들은 고린도교회가 무색할 정도로 파벌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작은 울타리 안에서조차 친한 사람 친하지 않은 사람이 나뉘고, 생활의 정도를 따라서 나뉩니다. 고린도전서3:3-4절입니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솔직히 일주일동안 지내시면서 함께 지체된 성도들을 얼마나 생각해 봅니까? 나하고 마음이 맞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생각하고 위해서 기도하며 돌아보는 마음의 여유가 있습니까? 한걸음 더 나아가서 내 생활의 자리에서 주변의 이웃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있습니까?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친한 사람이든 친하지 않는 사람이든지 그들을 돌아볼 줄 아는 마음을 하나님은 기대하십니다.
어느 교통사고 수기입니다.
김 씨는 1남1여를 둔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 사는 평범한 가장이었습니다. 작은 회사에 다니지만 성실하고 검소하게 산 덕분에 작은 집 한 채를 마련할 수 있었고, 가족들과 그런대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어느 날, 김씨는 밀린 회사 업무를 처리하고 밤늦게야 집으로 향했습니다. 컴컴한 골목 어귀를 지나갈 때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담벼락에 비스듬히 누워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흘낏 쳐다보며 취객이겠거니 라고 생각하고는 무심히 지나쳤습니다.
집에 들어오니 아들이 아직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과외 공부를 저녁 늦게까지 하는 아들이라 그날은 좀 늦겠지 하고 큰 염려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2시가 넘어도 돌아오지 않자 그제야 부부는 부랴부랴 아들의 친구, 친척집 등에 연락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밤을 하얗게 새운 김씨 부부는 다음날 아침 인근의 병원에서 아들이 응급실에 있으니 빨리 오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병원에 도착해 보니, 의사는 상처가 너무 커서 살 가망이 없다고 했습니다. 아들은 과외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다 뺑소니 자동차에 치어 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김씨 자신을 포함해서 어제 밤에 그 길을 지나가던 많은 사람들의 무관심 때문에 오랜 시간 방치되었다가 어느 노인의 도움으로 겨우 병원에 실려 온 것입니다. 그제야 김씨는 어제 밤, 담벼락에 기대어 신음하던 사람이 바로 자신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금만 더 일찍 병원으로 데려왔으면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을 텐데….”
라는 의사의 말에 김씨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조금만 관심을 가졌더라면 …”이라는 후회를 해 본적이 없습니까?
3. 어떻게 돌아보아야 합니까?
본문에서 율법사가 하나님의 율법을 요약해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답했을 때에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무엇을 행하라는 말입니까? 생활 속에서 온 삶과 생명까지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야고보서2:15-17절을 봅시다.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어떻게 돌아보아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돌아보는 것은 생활이지 이론이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찾아다니셨고, 구체적으로 병을 고쳐주시고 도우셨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사역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마태복음9:35절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돌아보심은 구체적인 생활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과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스도인들이 핍박과 죽음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하며, 섬기고, 봉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돌아보아야 합니까? 갈라디아서6:10절에서,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고 했으며, 히브리서10:24절에서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2:10절에서는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고 구체적으로 돌아볼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고아, 과부, 나그네 등과 같은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생각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신명기14:29절에서는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고 하셨으며, 이사야1:17절에서는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합당한 재능(은사)을 주셨습니다. 자신의 재능으로 주님을 섬기며, 이웃에 봉사하며, 서로 돌아보아서 이 세대에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는 복된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회복해야 할 영의 삶 세 번째는 ‘돌아봄’입니다. 돌아봄이란 내 삶의 주변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머무는 삶의 현장에서 사회의 일원으로서 생활을 나누는 삶을 말합니다. 이러한 삶은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신 삶이며 복음의 특성이기도 합니다. 복음은 자기중심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하신 것은 섬김과 봉사와 희생의 삶을 위한 것입니다. 마가복음10:45절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십니다.
어느 날, 유대 랍비의 집에 100세쯤 되어 보이는 노인이 찾아와서 ‘좀 쉬어 가게 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랍비는 즉시 노인을 들어오게 하고 하룻밤 쉬어가도록 했습니다. 잠시 후, 랍비는 소파에 앉아 있는 노인에게
“유대교인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나는 무신론잡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랍비는 화가 났습니다.
“우리 집에 무신론자를 묵게 할 수 없습니다.”
라고 소리를 지르고는 노인을 내어 쫓았습니다. 아무 말 없이 노인은 캄캄한 밖으로 비틀거리면서 걸어갔습니다. 마음을 진정한 랍비가 잠시 후 성경을 읽기 시작하자 성령의 나즈막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 아들아, 왜 그 노인을 내어 쫓았느냐?”
“그는 무신론잡니다, 저는 그와 함께 하룻밤 지낸다는 것을 참을 수 없습니다.”
다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나는 그를 거의 백년이나 참아주었다.”
랍비의 가슴은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랍비는 급히 뛰어나가 노인을 찾았습니다. 랍비는 노인을 다시 불러들여 친절하게 대해 주며 하룻밤을 편히 쉬게 해 주었습니다.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이 곧 돌아보는 삶이며, 하나님 자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13:35절에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1. 돌아봄의 실제적인 의미를 살펴봅시다.
고린도전서9:19-23절을 읽겠습니다.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의 동화적(同化的)인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 식의 돌아보는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교에 동화되거나 이방인의 삶에 동화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의 삶 속에 들어간 것입니다. 우리 옛 말에도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 속에 들어간다고 해서 그들과 같은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성품으로서 그들을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동화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돌아봄의 의미이고 목적입니다. 만일 돌아보는 삶에서 복음이 빠진다면 목적을 잃어버리는 것이 됩니다.
본문을 봅시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으며, 너는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라고 되물으셨습니다. 율법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율법사는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거의 죽도록 맞고는 입은 옷과 가진 것까지 다 빼앗기고 버려졌습니다. 얼마 후에 제사장이 그 길로 가다가 신음하며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는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또 얼마 후에 레위인도 지나다가 그를 보고는 그냥 지나갔습니다. 다시 조금 후에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다가 그를 보고는 불쌍하게 생각하여 급한 대로 응급처치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나귀에 실어서 가까운 여관까지 가서 여관주인에게 자신의 돈을 주면서 환자를 돌보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돈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주겠다는 부탁까지 남겼습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로서 당연히 긍휼을 베풀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으로 그를 외면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혼잡하고 더러운 민족이라고 비웃던 사마리아 사람은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이 비유의 결론은 36절의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사는 당연히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네 삶의 자리에서 주변을 돌아보는 삶을 살아라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야고보서1:27절에서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돌아본다는 것은 내 삶의 자리에서 주변의 사람들과 삶을 나누는 것입니다.
2. 지금 우리의 입장은 어떠합니까?
우리가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이 시대의 모든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시대에 돌아보는 삶을 살라고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이대로 좋습니까? 예수님이 지금 심판의 주(主)로 세상에 다시 오신다면 이 모습 이대로 후회 없이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까? 이 물음에 ‘아멘’이라고 할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로부터 ‘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고 불렸으며,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라고까지 불렸던 우리민족은 정이 많은 민족입니다. 불과 얼마 전에 북한의 룡천참사를 돕고자 발 벗고 나서는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한 핏줄임을 실감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천재지변이나 어려운 재난을 만난 이웃이 있을 때면 허리를 졸라매며 힘을 합하여 돕는 사람들입니다. 지금도 세계인들은 우리민족의 ‘부조문화’에 대하여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큰 일이 있을 때에는 관심을 가지는 것 같은데,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는 혈연, 지연, 학연, 지역주의 등의 연고를 찾아 똘똘 뭉치는 개인 중심적인 특성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고린도교회가 파벌로 인하여 책망을 받았는데, 오늘의 교회들은 고린도교회가 무색할 정도로 파벌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작은 울타리 안에서조차 친한 사람 친하지 않은 사람이 나뉘고, 생활의 정도를 따라서 나뉩니다. 고린도전서3:3-4절입니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솔직히 일주일동안 지내시면서 함께 지체된 성도들을 얼마나 생각해 봅니까? 나하고 마음이 맞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생각하고 위해서 기도하며 돌아보는 마음의 여유가 있습니까? 한걸음 더 나아가서 내 생활의 자리에서 주변의 이웃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있습니까?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친한 사람이든 친하지 않는 사람이든지 그들을 돌아볼 줄 아는 마음을 하나님은 기대하십니다.
어느 교통사고 수기입니다.
김 씨는 1남1여를 둔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 사는 평범한 가장이었습니다. 작은 회사에 다니지만 성실하고 검소하게 산 덕분에 작은 집 한 채를 마련할 수 있었고, 가족들과 그런대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어느 날, 김씨는 밀린 회사 업무를 처리하고 밤늦게야 집으로 향했습니다. 컴컴한 골목 어귀를 지나갈 때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담벼락에 비스듬히 누워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흘낏 쳐다보며 취객이겠거니 라고 생각하고는 무심히 지나쳤습니다.
집에 들어오니 아들이 아직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과외 공부를 저녁 늦게까지 하는 아들이라 그날은 좀 늦겠지 하고 큰 염려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2시가 넘어도 돌아오지 않자 그제야 부부는 부랴부랴 아들의 친구, 친척집 등에 연락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밤을 하얗게 새운 김씨 부부는 다음날 아침 인근의 병원에서 아들이 응급실에 있으니 빨리 오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병원에 도착해 보니, 의사는 상처가 너무 커서 살 가망이 없다고 했습니다. 아들은 과외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다 뺑소니 자동차에 치어 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김씨 자신을 포함해서 어제 밤에 그 길을 지나가던 많은 사람들의 무관심 때문에 오랜 시간 방치되었다가 어느 노인의 도움으로 겨우 병원에 실려 온 것입니다. 그제야 김씨는 어제 밤, 담벼락에 기대어 신음하던 사람이 바로 자신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금만 더 일찍 병원으로 데려왔으면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을 텐데….”
라는 의사의 말에 김씨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조금만 관심을 가졌더라면 …”이라는 후회를 해 본적이 없습니까?
3. 어떻게 돌아보아야 합니까?
본문에서 율법사가 하나님의 율법을 요약해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답했을 때에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무엇을 행하라는 말입니까? 생활 속에서 온 삶과 생명까지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야고보서2:15-17절을 봅시다.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어떻게 돌아보아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돌아보는 것은 생활이지 이론이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찾아다니셨고, 구체적으로 병을 고쳐주시고 도우셨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사역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마태복음9:35절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돌아보심은 구체적인 생활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과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스도인들이 핍박과 죽음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하며, 섬기고, 봉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돌아보아야 합니까? 갈라디아서6:10절에서,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고 했으며, 히브리서10:24절에서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2:10절에서는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고 구체적으로 돌아볼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고아, 과부, 나그네 등과 같은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생각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신명기14:29절에서는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고 하셨으며, 이사야1:17절에서는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합당한 재능(은사)을 주셨습니다. 자신의 재능으로 주님을 섬기며, 이웃에 봉사하며, 서로 돌아보아서 이 세대에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는 복된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