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해야 할 영의 삶1 - 약함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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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4-05-22 22:08
♡♥♡ 회복해야 할 영의 삶1 - 약함
*** 들어가는 말
오늘부터 몇 번에 걸쳐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회복해야 할 영성(靈性)에 대하여 살펴보려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로 ‘약함’의 영성에 대하여 본문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듯이 하나님의 복음은 역설적인 면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섬김을 받고 싶으면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천국을 차지하게 되고, 자신의 것을 줌으로서 부하게 되는 것 등입니다. 본문 말씀에도 그 역설의 진리가 있습니다. 27,28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라고 하십니다. 즉 약할 때 강하게 되고, 어리석을 때 지혜롭게 되는 것이 복음입니다.
영국의 세계적인 기독교 지도자인 ‘존 스토트’ 박사는 사경회에서 “기독교의 근본적인 진리의 하나는 약함과 어리석음에 있다. 십자가의 복음 자체가 약하고 어리석은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본문 앞 쪽의 18절을 봅시다. 상반 절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라고 했으며, 21절 하반 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굳이 약하고 어리석고 미련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하셨겠습니까? 좀더 사람들에게 친밀하고 지혜롭고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하셨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기 않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셨는지 지금부터 살펴봅시다.
1. 지금 이 말씀이 필요한 우리 시대의 상황을 살펴봅시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인 우리나라의 기독교 초기 때에나, 불과 3, 40년 전만하더라도 한국교회는 참으로 가난했고 약했습니다. 그래서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의지하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초기 선교사 중의 한 사람인 ‘블레어’ 목사는 당시의 한국교회 성도들이 “선교사님, 한국 사람들처럼 불행하고 불쌍하고 소망이 없는 민족이 있습니까?”라고 탄식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약하고 힘이 없고 소망이 없는 이 나라의 교회와 지도자들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시고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오늘처럼 세계 속에서 최대의 기독교 부흥 국가로 성장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나라의 교회는 너무 커지고, 너무 강해지고, 너무 지혜로워졌습니다. 이민교회의 어느 목사님은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너무 크고 높아서 쳐다보면 머리가 어지럽다.”고 했습니다. 이 나라의 교회는 너무나 강하고 똑똑해져서 하나님 없이도 잘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머무실 자리가 없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아니라 사람의 잘 짜여진 경영으로 교회는 화려하게 변모했습니다. 성도들의 자기 열심은 하나님의 간섭을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들의 생각대로 예배하고 섬기고 봉사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얼마나 비참한 모습이겠습니까? 자기 나름대로는 시간과 물질과 정성을 드려서 열심히 섬기고 봉사했는데, 주님으로부터 ‘불법을 행하는 자’라고 외면당한다면 그보다 더 억울하고 안타까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일들이야 다시 할 수도 있고 포기한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안타깝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섰을 때에 받는 선언은 다시 할 수 있는 기회도 긍휼도 없습니다. 이러한 절망의 지경에 처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전도자도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전12:1)고 했습니다.
큰 교회들이 윤리와 도덕적인 범죄로 세상의 법정에 서게 되고, 성도들의 신앙이 퇴색되면서 불거져 나오는 추한 모습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러한 때에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진실한 신앙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2. 성경말씀을 통하여 보이시는 약함의 영성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성경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이시는 것 중에서 중요한 것 하나는 ‘약한 자를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힘과 권력을 가진 왕이나 사람들을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게 하시는 그릇으로 사용된 사람들은 대부분 환경이 열악하거나 연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다에서 용 난다.”말 들어보셨습니까? 불신자의 세계에서도 “개천에서 용 난다.”고 하지 “바다에서 용 난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다음부분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문26-28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라고 하십니다. 약한 자, 미련한 자, 가난한 자, 천하고 멸시받는 자들을 하나님의 그릇으로 사용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며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때에도 헬라의 지혜로 포장하지 않고, 로마의 유창한 웅변술로 각색하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고백했습니다. 본문2:4절입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라고 했습니다. 즉 설교를 너무 지혜롭고 유창하고 멋지게 하지 않기로 작정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묻혀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사람의 화려한 웅변술과 지혜로 포장해버리면 전달되어야 할 진리는 관심 밖으로 밀려나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주님께 영광이 아니라 위대한 영웅의 시대로 착각될 지경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유명한 강사의 얼굴이 close up 되고 그 이름이 유명세를 떨칩니다. 사람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은 들러리가 된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초대교회에서도 그런 현상이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3:4절에서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라고 했습니다. 즉 고린도교회의 파벌 형성과 사람을 영웅시 하는데 대한 책망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이 우상화되는 일을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고린도전서3:5절에서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라고 반문합니다. 이 말은 그대로 번역하면 “바울은 무슨 물건이며, 아볼로는 무슨 물건이냐?”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7절에서는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는 아예 “아무 것도 아니다.(nothing/아무 물건도 아니다.)”라는 말까지 사용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4:13절에서는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즉 시궁창에 내버려지는 음식물의 찌꺼기 같은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 2:3절에서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약함을 강조하는 것일까요? 왜 이 시대의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이 약함을 회복해야 하는 것일까요? 도대체 약함의 영성이란 무엇입니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고린도후서에 있습니다. 고린도후서12:9-10절을 봅시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더 설명을 붙일 것도 없습니다. 진실로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강한 영과 육신의 삶을 이루려면 주님 앞에서 우리가 약해져야 합니다. 약함의 영성은 곧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3. 지금 우리가 회복해야 할 약함은 무엇입니까?
본문1:29-31절을 먼저 봅시다.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2:5절입니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사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 중에 태어나면서 자신의 어떤 소유물도 가지고 온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죽을 때에 어떤 것도 가지고 갈 사람도 없습니다. 이는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며, 이 땅에서 우리 육신이 사는 동안 잠시 맡겨두신 것뿐임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자랑하겠습니까? 영광을 받으실 유일한 분은 삶을 주시고 모든 것을 주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대에 회복해야 할 약함의 영성은 곧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싶다면 낮아지고 약해져야 합니다. 자신이 지혜롭고, 경험이 많고, 능력이 있고, 힘이 있고, 재물이 많다고 생각하는 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만 더할 것입니다. 이 시대는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 중에서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3:15-17절을 봅시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나는 부자’라고 떠벌리고 있으며, 자신이 살아가고 문제를 해결할 충분한 능력이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까지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일을 하나님께 맡기지도 않습니다. ‘내 것은 당연히 내 것이고, 하나님의 것도 내 것이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약함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인정하는 진실한 성찰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안다면 우리는 그분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도움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일생동안 오만번의 기도 응답을 받았다는 고아들의 아버지로 불리는 ‘죠지 뮬러’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들의 바로 그 연약함이 주 예수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날 기회가 됩니다. 찬송을 받으실 그분은 절대로 우리를 떠나거나 버리시지를 않으십니다. 연약함이 크면 클수록 그는 자기의 힘을 나타내시려고 더 가까이 오십니다. 우리들의 궁핍이 크면 클수록, 그가 친히 우리의 친구이심을 믿을 수 있는 더 큰 근거를 우리는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70여년 살아온 나 자신의 체험입니다. 시험이 크면 클수록 난관이 크면 클수록, 주님의 도우심은 더 가까이 나타납니다. 때때로 나는 완전히 어쩔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를 않았고, 앞으로도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더 많은 기도, 더 깊은 신앙, 더 많은 인내와 실천이 그 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할 일은 우리들의 마음을 그 앞에 쏟아 놓은 일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자기가 원하시는 시간에 자기가 원하시는 방법으로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뮬러 목사님의 고백처럼, 우리의 할 일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는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고 하나님을 의뢰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때에 하나님께서 일을 해결해 주실 것이며, 높여주실 것입니다.
*** 들어가는 말
오늘부터 몇 번에 걸쳐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회복해야 할 영성(靈性)에 대하여 살펴보려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로 ‘약함’의 영성에 대하여 본문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듯이 하나님의 복음은 역설적인 면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섬김을 받고 싶으면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천국을 차지하게 되고, 자신의 것을 줌으로서 부하게 되는 것 등입니다. 본문 말씀에도 그 역설의 진리가 있습니다. 27,28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라고 하십니다. 즉 약할 때 강하게 되고, 어리석을 때 지혜롭게 되는 것이 복음입니다.
영국의 세계적인 기독교 지도자인 ‘존 스토트’ 박사는 사경회에서 “기독교의 근본적인 진리의 하나는 약함과 어리석음에 있다. 십자가의 복음 자체가 약하고 어리석은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본문 앞 쪽의 18절을 봅시다. 상반 절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라고 했으며, 21절 하반 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굳이 약하고 어리석고 미련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하셨겠습니까? 좀더 사람들에게 친밀하고 지혜롭고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하셨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기 않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셨는지 지금부터 살펴봅시다.
1. 지금 이 말씀이 필요한 우리 시대의 상황을 살펴봅시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인 우리나라의 기독교 초기 때에나, 불과 3, 40년 전만하더라도 한국교회는 참으로 가난했고 약했습니다. 그래서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의지하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초기 선교사 중의 한 사람인 ‘블레어’ 목사는 당시의 한국교회 성도들이 “선교사님, 한국 사람들처럼 불행하고 불쌍하고 소망이 없는 민족이 있습니까?”라고 탄식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약하고 힘이 없고 소망이 없는 이 나라의 교회와 지도자들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시고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오늘처럼 세계 속에서 최대의 기독교 부흥 국가로 성장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나라의 교회는 너무 커지고, 너무 강해지고, 너무 지혜로워졌습니다. 이민교회의 어느 목사님은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너무 크고 높아서 쳐다보면 머리가 어지럽다.”고 했습니다. 이 나라의 교회는 너무나 강하고 똑똑해져서 하나님 없이도 잘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머무실 자리가 없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아니라 사람의 잘 짜여진 경영으로 교회는 화려하게 변모했습니다. 성도들의 자기 열심은 하나님의 간섭을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들의 생각대로 예배하고 섬기고 봉사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얼마나 비참한 모습이겠습니까? 자기 나름대로는 시간과 물질과 정성을 드려서 열심히 섬기고 봉사했는데, 주님으로부터 ‘불법을 행하는 자’라고 외면당한다면 그보다 더 억울하고 안타까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일들이야 다시 할 수도 있고 포기한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안타깝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섰을 때에 받는 선언은 다시 할 수 있는 기회도 긍휼도 없습니다. 이러한 절망의 지경에 처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전도자도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전12:1)고 했습니다.
큰 교회들이 윤리와 도덕적인 범죄로 세상의 법정에 서게 되고, 성도들의 신앙이 퇴색되면서 불거져 나오는 추한 모습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러한 때에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진실한 신앙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2. 성경말씀을 통하여 보이시는 약함의 영성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성경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이시는 것 중에서 중요한 것 하나는 ‘약한 자를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힘과 권력을 가진 왕이나 사람들을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게 하시는 그릇으로 사용된 사람들은 대부분 환경이 열악하거나 연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다에서 용 난다.”말 들어보셨습니까? 불신자의 세계에서도 “개천에서 용 난다.”고 하지 “바다에서 용 난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다음부분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문26-28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라고 하십니다. 약한 자, 미련한 자, 가난한 자, 천하고 멸시받는 자들을 하나님의 그릇으로 사용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며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때에도 헬라의 지혜로 포장하지 않고, 로마의 유창한 웅변술로 각색하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고백했습니다. 본문2:4절입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라고 했습니다. 즉 설교를 너무 지혜롭고 유창하고 멋지게 하지 않기로 작정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묻혀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사람의 화려한 웅변술과 지혜로 포장해버리면 전달되어야 할 진리는 관심 밖으로 밀려나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주님께 영광이 아니라 위대한 영웅의 시대로 착각될 지경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유명한 강사의 얼굴이 close up 되고 그 이름이 유명세를 떨칩니다. 사람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은 들러리가 된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초대교회에서도 그런 현상이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3:4절에서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라고 했습니다. 즉 고린도교회의 파벌 형성과 사람을 영웅시 하는데 대한 책망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이 우상화되는 일을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고린도전서3:5절에서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라고 반문합니다. 이 말은 그대로 번역하면 “바울은 무슨 물건이며, 아볼로는 무슨 물건이냐?”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7절에서는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는 아예 “아무 것도 아니다.(nothing/아무 물건도 아니다.)”라는 말까지 사용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4:13절에서는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즉 시궁창에 내버려지는 음식물의 찌꺼기 같은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 2:3절에서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약함을 강조하는 것일까요? 왜 이 시대의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이 약함을 회복해야 하는 것일까요? 도대체 약함의 영성이란 무엇입니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고린도후서에 있습니다. 고린도후서12:9-10절을 봅시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더 설명을 붙일 것도 없습니다. 진실로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강한 영과 육신의 삶을 이루려면 주님 앞에서 우리가 약해져야 합니다. 약함의 영성은 곧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3. 지금 우리가 회복해야 할 약함은 무엇입니까?
본문1:29-31절을 먼저 봅시다.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2:5절입니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사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 중에 태어나면서 자신의 어떤 소유물도 가지고 온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죽을 때에 어떤 것도 가지고 갈 사람도 없습니다. 이는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며, 이 땅에서 우리 육신이 사는 동안 잠시 맡겨두신 것뿐임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자랑하겠습니까? 영광을 받으실 유일한 분은 삶을 주시고 모든 것을 주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대에 회복해야 할 약함의 영성은 곧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싶다면 낮아지고 약해져야 합니다. 자신이 지혜롭고, 경험이 많고, 능력이 있고, 힘이 있고, 재물이 많다고 생각하는 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만 더할 것입니다. 이 시대는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 중에서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3:15-17절을 봅시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나는 부자’라고 떠벌리고 있으며, 자신이 살아가고 문제를 해결할 충분한 능력이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까지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일을 하나님께 맡기지도 않습니다. ‘내 것은 당연히 내 것이고, 하나님의 것도 내 것이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약함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인정하는 진실한 성찰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안다면 우리는 그분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도움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일생동안 오만번의 기도 응답을 받았다는 고아들의 아버지로 불리는 ‘죠지 뮬러’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들의 바로 그 연약함이 주 예수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날 기회가 됩니다. 찬송을 받으실 그분은 절대로 우리를 떠나거나 버리시지를 않으십니다. 연약함이 크면 클수록 그는 자기의 힘을 나타내시려고 더 가까이 오십니다. 우리들의 궁핍이 크면 클수록, 그가 친히 우리의 친구이심을 믿을 수 있는 더 큰 근거를 우리는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70여년 살아온 나 자신의 체험입니다. 시험이 크면 클수록 난관이 크면 클수록, 주님의 도우심은 더 가까이 나타납니다. 때때로 나는 완전히 어쩔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를 않았고, 앞으로도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더 많은 기도, 더 깊은 신앙, 더 많은 인내와 실천이 그 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할 일은 우리들의 마음을 그 앞에 쏟아 놓은 일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자기가 원하시는 시간에 자기가 원하시는 방법으로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뮬러 목사님의 고백처럼, 우리의 할 일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는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고 하나님을 의뢰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때에 하나님께서 일을 해결해 주실 것이며, 높여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