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7,149회
작성일
2004-05-15 22:18
♡♥♡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 엡3:14-21
*** 들어가는 말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의 에베소교회를 향한 간절한 기도 내용입니다. 그 내용은 영의 삶과 육신의 삶이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하고 충만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풍성’과 ‘충만’, 이 두 단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친숙한 것이며, 소망의 단어이기도 합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의 영이나 육신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고 풍성하기를 간절히 소망할 것입니다. 다윗도 시편141:8절에서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 대로 버려두지 마옵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
특히 지금처럼 삶의 환경이 뒤숭숭하고, 경제적인 여건이 어려운 때면 풍성하고 충만한 삶을 더욱 간절히 소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도들의 하나님께 대한 자세입니다. 어려움뿐만 아니라 어떤 문제도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아뢰면 되는데, 소극적으로 기도한다든지 세상의 도움을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소극적인 기도란 귀신들린 아들을 예수님께 데려왔던 의심에 싸인 아버지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9:22절에서,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께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소극적인 기도입니다. 즉 우리의 작은 믿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을 제한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 아버지에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을 절대 신뢰하라는 말씀입니다.
나의 삶이 풍성하고 충만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능력을 절대 신뢰하면서 풍성하기를 구하십시오. ‘내 주제에 너무 큰 것을 구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나,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처럼, 능력의 하나님 앞에서 반신반의하는 태도를 가지는 것은 결코 소망하는 것을 얻을 수 없는 부정적인 자세입니다. 그렇다면 풍성하고 충만한 삶은 어떻게 얻을 수가 있습니까?
1. 바른 기도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본문16-17절을 봅시다.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이 내용이 무엇을 말씀합니까? 성령으로 말미암는 영의 충만한 삶을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초대교회 당시의 에베소 지역의 환경이 신앙을 지켜가기가 무척 힘든 곳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후에 에베소교회는 예수님으로부터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로 경고를 받았습니다. 이처럼 위기 속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안전이나 건강이나 물질의 풍요가 아니었습니다.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영이 강건하고,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되는 영의 충만 이었습니다.
어느 여자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목사님의 어머님은 84세였는데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였습니다. 이 어머님이 암으로 투병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목사님은 어머니의 회복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는 자신의 모습 속에서, 자신의 기도가 너무도 소극적이고 유치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머니의 영혼이 버림받는다면, 비록 어머니의 육신이 치유되어 건강하게 된다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즉 어머니의 육신의 병을 위한 기도보다, 어머님의 영혼의 구원을 위한 기도가 더 급하고 의미 있는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육신의 건강을 위한 기도나, 경제적인 어려운 형편을 위한 기도가 의미 없는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는 우선권의 문제이며,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기도의 바른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산상보훈인 마태복음6:33절의 내용이 바로 이것을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십니다. 요한삼서2절에서 사도 요한도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는 기도에도 영의 삶이 먼저 임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작정 잘 되고, 풍성하고, 충만하고, 건강하고, 형통하기를 기도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감정에 빠져서 슬픈 눈물로 어려움과 고통을 호소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눈물이나 값지게 보아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값지게 여기시는 눈물은 참회하는 눈물입니다. 즉 자신의 영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세우는 것이 먼저 해야 할 일이며 값진 것입니다. 내 영이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는 것이 하나님의 풍성함이 우리 삶에 부어지는 통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의 영적인 강건함과 충만함을 먼저 구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본문18-19절을 봅시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기를 구하노라.”
육신과 영의 충만함을 얻을 수 있는 길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것이며,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의 성장은 예수 그리스도가 목표입니다. 본문 다음에 오는 4장이 이 실제적인 성장을 말씀합니다. 4:15절을 봅시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영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려면 당연히 목표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앎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하고 충만한 삶을 누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10:10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세계적인 부흥사인 ‘빌리 그레함’ 목사는 “하늘에는 우리가 전혀 기도해 보지 않았던 기도들에 대한 수많은 응답들이 넘쳐난다.(Heaven is full of answers to prayers we have never prayed.)”고 했습니다. 즉 기도만 했더라면 받을 수 있었던 것들이,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그대로 쌓여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상상하거나 기대하지도 않은 것들까지도 준비해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그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시기를 기다리십니다. 지금도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일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믿음으로서,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영과 육신의 모든 삶에서 풍성하고 충만함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은 우리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본문20절에서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영이 바르게 서기만 하면, 우리의 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것까지도 충만하게 응답하신다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영의 삶과 육신의 삶이 풍성하기를 위하여 어떻게 하십니까? 기도를 하고 있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고 응답도 없습니까? 그렇다면 자신의 삶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 있는지를 살펴보십시오. 만일 하나님의 뜻을 잘 알 수도 없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서 있지 못하다면 무엇을 구하기 전에 자신을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우는 일부터 하십시오. 만일, 하나님을 알고 바르게 기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려움이 계속되고, 삶이 고통스럽다면 자신을 한 번 더 돌아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받으셨다면 마음에 평안을 주시고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비록 삶에는 고통이 있을지라도 영은 주님으로 인하여 평안이 있고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면 됩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이루실 테니까 말입니다.
어느 시골 교회를 다니던 한 젊은이가 큰 뜻을 품고서 복숭아 과수원을 매입했습니다. 그는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는 복숭아 재배자로서 꼭 성공을 해야겠다는 꿈을 가지고 복숭아 과수원에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했습니다. 자신의 노력대로 복숭아나무는 아름다운 꽃을 피웠고, 순조롭게 성장하여 열매가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청년은 자신감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했습니다. 복숭아가 막 꽃을 떨어뜨리고 탐스럽게 자라기 시작할 무렵에 서리가 내린 것입니다. 자그마한 복숭아는 서리를 맞고 얼어버렸고 모두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동안의 모든 수고와 정성이 한 순간에 수포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낙심한 청년은 주일날 교회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주에도, 또 그 다음 주에도 그는 교회에 가지 않았습니다. 기다리다 못한 목사님이 마침내 청년을 찾아와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청년은 시무룩하게
“저는 앞으로도 계속 교회에 나가지 않겠습니다. 목사님은 애써 키운 복숭아나무에 서리를 내려 다 죽게 할 정도로 가혹하신 하나님을 제가 계속 의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목사님은 잠시 동안 아무 말 없이 청년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자네 복숭아들보다 자네를 더 사랑하신다네. 물론 그분은 서리가 내리지 않아야 복숭아들이 잘 자란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 하지만 서리 없이는 인간이 훌륭하게 성장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알고 계신다네. 그분의 관심은 사람을 키우는 데 있지 복숭아를 키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일세.”
하나님은 세상의 어떤 피조물보다 우리 인생을 사랑하시고,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제물로 내 놓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에서 비참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고 용기 있는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가난한 것이 부끄럽습니까? 남들보다 살림살이가 못해서 당당하지 못합니까? 진정한 풍성함은 세상적인 물질에 있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을 다 가졌지만 영의 생명이 없다면 그는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입니다. 비록 세상의 것은 많이 없지만 하나님을 알고, 영원한 생명을 소유했다면 모든 것을 가진 것입니다. 훗날 주님이 오실 때에는 세상의 물질로 떵떵거리던 사람이 부끄러워서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6:15-17절입니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 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내세의 소망만 가지고 인내하라고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의 말씀은 이 땅에서의 영과 육신의 삶 모두의 풍성함과 충만함을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빌립보서4:19절에서는 “너희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하셨으며, 고린도후서9:8절에서는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도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모두 이 땅에서의 삶을 말씀하십니다.
이 혼탁하고 어두워가는 세대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성령 충만함과 육신적인 삶의 풍성함을 구하십시오. 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삶을 통하여 많은 사람이 주님께로 돌아오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에 합당한 기도는 어떤 것이라도 들으시며 응답하십니다. 가난하더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내가 구하지 아니하여 얻지 못한 가난이라면 그것도 죄입니다.
오늘 말씀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의 삶을 먼저 생각하는 바른 기도의 자세와 하나님을 알도록 힘씁시다. 그리하여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대로 우리 모두의 삶이 풍성하고 충만하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의 에베소교회를 향한 간절한 기도 내용입니다. 그 내용은 영의 삶과 육신의 삶이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하고 충만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풍성’과 ‘충만’, 이 두 단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친숙한 것이며, 소망의 단어이기도 합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의 영이나 육신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고 풍성하기를 간절히 소망할 것입니다. 다윗도 시편141:8절에서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 대로 버려두지 마옵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
특히 지금처럼 삶의 환경이 뒤숭숭하고, 경제적인 여건이 어려운 때면 풍성하고 충만한 삶을 더욱 간절히 소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도들의 하나님께 대한 자세입니다. 어려움뿐만 아니라 어떤 문제도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아뢰면 되는데, 소극적으로 기도한다든지 세상의 도움을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소극적인 기도란 귀신들린 아들을 예수님께 데려왔던 의심에 싸인 아버지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9:22절에서,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께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소극적인 기도입니다. 즉 우리의 작은 믿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을 제한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 아버지에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을 절대 신뢰하라는 말씀입니다.
나의 삶이 풍성하고 충만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능력을 절대 신뢰하면서 풍성하기를 구하십시오. ‘내 주제에 너무 큰 것을 구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나,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처럼, 능력의 하나님 앞에서 반신반의하는 태도를 가지는 것은 결코 소망하는 것을 얻을 수 없는 부정적인 자세입니다. 그렇다면 풍성하고 충만한 삶은 어떻게 얻을 수가 있습니까?
1. 바른 기도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본문16-17절을 봅시다.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이 내용이 무엇을 말씀합니까? 성령으로 말미암는 영의 충만한 삶을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초대교회 당시의 에베소 지역의 환경이 신앙을 지켜가기가 무척 힘든 곳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후에 에베소교회는 예수님으로부터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로 경고를 받았습니다. 이처럼 위기 속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안전이나 건강이나 물질의 풍요가 아니었습니다.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영이 강건하고,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되는 영의 충만 이었습니다.
어느 여자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목사님의 어머님은 84세였는데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였습니다. 이 어머님이 암으로 투병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목사님은 어머니의 회복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는 자신의 모습 속에서, 자신의 기도가 너무도 소극적이고 유치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머니의 영혼이 버림받는다면, 비록 어머니의 육신이 치유되어 건강하게 된다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즉 어머니의 육신의 병을 위한 기도보다, 어머님의 영혼의 구원을 위한 기도가 더 급하고 의미 있는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육신의 건강을 위한 기도나, 경제적인 어려운 형편을 위한 기도가 의미 없는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는 우선권의 문제이며,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기도의 바른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산상보훈인 마태복음6:33절의 내용이 바로 이것을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십니다. 요한삼서2절에서 사도 요한도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는 기도에도 영의 삶이 먼저 임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작정 잘 되고, 풍성하고, 충만하고, 건강하고, 형통하기를 기도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감정에 빠져서 슬픈 눈물로 어려움과 고통을 호소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눈물이나 값지게 보아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값지게 여기시는 눈물은 참회하는 눈물입니다. 즉 자신의 영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세우는 것이 먼저 해야 할 일이며 값진 것입니다. 내 영이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는 것이 하나님의 풍성함이 우리 삶에 부어지는 통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의 영적인 강건함과 충만함을 먼저 구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본문18-19절을 봅시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기를 구하노라.”
육신과 영의 충만함을 얻을 수 있는 길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것이며,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의 성장은 예수 그리스도가 목표입니다. 본문 다음에 오는 4장이 이 실제적인 성장을 말씀합니다. 4:15절을 봅시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영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려면 당연히 목표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앎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하고 충만한 삶을 누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10:10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세계적인 부흥사인 ‘빌리 그레함’ 목사는 “하늘에는 우리가 전혀 기도해 보지 않았던 기도들에 대한 수많은 응답들이 넘쳐난다.(Heaven is full of answers to prayers we have never prayed.)”고 했습니다. 즉 기도만 했더라면 받을 수 있었던 것들이,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그대로 쌓여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상상하거나 기대하지도 않은 것들까지도 준비해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그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시기를 기다리십니다. 지금도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일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믿음으로서,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영과 육신의 모든 삶에서 풍성하고 충만함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은 우리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본문20절에서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영이 바르게 서기만 하면, 우리의 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것까지도 충만하게 응답하신다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영의 삶과 육신의 삶이 풍성하기를 위하여 어떻게 하십니까? 기도를 하고 있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고 응답도 없습니까? 그렇다면 자신의 삶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 있는지를 살펴보십시오. 만일 하나님의 뜻을 잘 알 수도 없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서 있지 못하다면 무엇을 구하기 전에 자신을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우는 일부터 하십시오. 만일, 하나님을 알고 바르게 기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려움이 계속되고, 삶이 고통스럽다면 자신을 한 번 더 돌아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받으셨다면 마음에 평안을 주시고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비록 삶에는 고통이 있을지라도 영은 주님으로 인하여 평안이 있고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면 됩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이루실 테니까 말입니다.
어느 시골 교회를 다니던 한 젊은이가 큰 뜻을 품고서 복숭아 과수원을 매입했습니다. 그는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는 복숭아 재배자로서 꼭 성공을 해야겠다는 꿈을 가지고 복숭아 과수원에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했습니다. 자신의 노력대로 복숭아나무는 아름다운 꽃을 피웠고, 순조롭게 성장하여 열매가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청년은 자신감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했습니다. 복숭아가 막 꽃을 떨어뜨리고 탐스럽게 자라기 시작할 무렵에 서리가 내린 것입니다. 자그마한 복숭아는 서리를 맞고 얼어버렸고 모두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동안의 모든 수고와 정성이 한 순간에 수포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낙심한 청년은 주일날 교회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주에도, 또 그 다음 주에도 그는 교회에 가지 않았습니다. 기다리다 못한 목사님이 마침내 청년을 찾아와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청년은 시무룩하게
“저는 앞으로도 계속 교회에 나가지 않겠습니다. 목사님은 애써 키운 복숭아나무에 서리를 내려 다 죽게 할 정도로 가혹하신 하나님을 제가 계속 의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목사님은 잠시 동안 아무 말 없이 청년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자네 복숭아들보다 자네를 더 사랑하신다네. 물론 그분은 서리가 내리지 않아야 복숭아들이 잘 자란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 하지만 서리 없이는 인간이 훌륭하게 성장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알고 계신다네. 그분의 관심은 사람을 키우는 데 있지 복숭아를 키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일세.”
하나님은 세상의 어떤 피조물보다 우리 인생을 사랑하시고,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제물로 내 놓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에서 비참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고 용기 있는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가난한 것이 부끄럽습니까? 남들보다 살림살이가 못해서 당당하지 못합니까? 진정한 풍성함은 세상적인 물질에 있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을 다 가졌지만 영의 생명이 없다면 그는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입니다. 비록 세상의 것은 많이 없지만 하나님을 알고, 영원한 생명을 소유했다면 모든 것을 가진 것입니다. 훗날 주님이 오실 때에는 세상의 물질로 떵떵거리던 사람이 부끄러워서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6:15-17절입니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 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내세의 소망만 가지고 인내하라고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의 말씀은 이 땅에서의 영과 육신의 삶 모두의 풍성함과 충만함을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빌립보서4:19절에서는 “너희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하셨으며, 고린도후서9:8절에서는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도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모두 이 땅에서의 삶을 말씀하십니다.
이 혼탁하고 어두워가는 세대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성령 충만함과 육신적인 삶의 풍성함을 구하십시오. 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삶을 통하여 많은 사람이 주님께로 돌아오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에 합당한 기도는 어떤 것이라도 들으시며 응답하십니다. 가난하더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내가 구하지 아니하여 얻지 못한 가난이라면 그것도 죄입니다.
오늘 말씀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의 삶을 먼저 생각하는 바른 기도의 자세와 하나님을 알도록 힘씁시다. 그리하여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대로 우리 모두의 삶이 풍성하고 충만하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