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처럼...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7,027회
작성일
2004-05-01 22:33
♡♥♡ 어린아이처럼... / 막10:13-16
*** 들어가는 말
흔히 어른들은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이는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오늘은 교회가 어린이주일로 지킵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아이들의 영적인 환경을 깊이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요즈음 많은 부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풍족한 생활과 세상적인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만이 아이들을 사랑하는 표현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러한 환경은 아이들에게 방종과 세상적인 안일과 쾌락을 쫓게 하는 필요악이 될 수 있습니다.
구세군의 창설자인 ‘부스’의 부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이 하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우는 것이 세계를 구원하는 첫걸음입니다. 나는 언제나 사탄보다 한 발 앞서서 내 아이들을 인도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사탄보다 한 발 앞서는 노력과 열심, 이는 아이들을 영적인 사람으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즉 이 시대의 아이들이 사탄의 공격에 무너지지 않게 하려면, 사탄보다 한 발 앞서는 영적 관심과 기도와 신앙의 본을 보이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부모들에게 ‘아이들을 신앙적으로 지도할 것’을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잠언22:6절에서는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했으며, 잠언13:24절에서는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초달을 차마 못한다.’는 말은 자식이 너무 애처롭고 안쓰러워서 엄하게 가르치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잠언23:13,14절에서는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고 하셨고 잠언29:15절에서는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고 경고합니다. 이 모든 말씀을 종합하면, 아이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은 육신적으로 어린아이가 아닌,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말씀하시는 ‘어린아이 같은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보고 우리 삶의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표현되고 있지만, 여러 성경에서 ‘어린아이처럼’이라는 표현이 여러 곳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나라와 신앙의 삶을 표현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긍정적인 의미가 대부분이지만 부정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예수님께서 특별히 강조하시고 성도의 삶에 요구하신 ‘어린아이처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봅시다.
1.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삶은 온전한 신뢰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레아 지역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였습니다. 한참 말씀을 전하실 때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예수님 앞으로 나왔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아이들을 데려온 부모들로서 아이들에게 예수님의 축복을 받게 하려고 온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어린아이’란 ‘아기들’, ‘갓난아기’를 나타내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만져 주심을 바라고’라고 했는데, 이는 단순히 어루만지는 것이 아니라 축복의 행위를 의미합니다. 당시에는 아이들에게 랍비로부터의 축복을 받게 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들을 막으면서 꾸짖었습니다. 아마도 어른들이 말씀을 듣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광경을 보시고 화를 내시면서,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화를 내셨다는 간접적인 기록은 성경 여러 곳에 있지만, 직접적인 기록은 이곳뿐입니다. 이는 이 일이 대단히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암시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어린아이와 같이 받드는 자’로 말씀하시면서 어린아이들의 존재가치를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이는 아이들을 경시하는 당시의 풍속을 뒤집으시는 것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의 순수한 신뢰심을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나라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결코 어린아이가 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추호의 의심이나 근심이 없이 부모를 의지하는 어린아기들의 온전하고 순수한 신뢰를 요청하신 것입니다. 어른들의 마음에 온전하고 순수한 신뢰심이 일어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나름대로의 판단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일을 계획한다든지 결정을 할 때면 자신의 판단기준이 작용을 하게 됩니다. 이는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에는 자신의 경험에 의한 염려 혹은 사람을 의지하는 것, 대가를 기대하는 것 등.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를 못합니다. 이것이 야고보 선생을 통하여 말씀하신 “두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은 ‘기도의 응답도 못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린아이처럼 받아들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은 ‘아멘’으로 받아들이지만, 마음에 들지 않거나 믿어지지 않는 것은 거부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순수하고도 온전한 신뢰를 요구하십니다. 만일 영생을 얻고자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청년처럼, 믿을 수 있는 일부만의 믿음이 필요했다면 세상의 거의 전부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전적인 신뢰를 요청하십니다. 부자청년은 자신이 계명을 철저히 지켰다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눅18:22)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온전하고 자 한다면”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전적인 신뢰와 헌신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만일 내게 하나님께 대한 온전하고 순수한 신뢰심이 없다면 먼저 하나님을 알도록 힘써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남부 지방에 사는 어느 청년이 한겨울에 북부 지역에 사는 친구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 날은 날씨도 좋고 기온도 영상 5도 정도여서 오후에 둘은 차를 타고 주변 지역을 둘러보기 위해서 출발했습니다. 큰 호수 옆을 지나다가 물이 꽁꽁 얼어있는 것을 보고는 차를 세워놓고 호수를 구경하기로 했습니다.
북부의 친구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호수의 얼음 위를 달려가면서 미끄럼을 탔습니다. 그러나 남부에서 온 친구는 호수 가운데로는 가지 않고 호숫가에서 조심스럽게 얼음 위를 걷고만 있었습니다. 그것도 발끝을 세우고 조심스럽게 걸었습니다. 친구는 나름대로 날씨도 따뜻하고 호수의 얼음 깊이도 모르니 깨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때 요란스러운 자동차 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어떤 농부가 커다란 트랙터를 몰고 호수로 들어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호수를 가로질러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발끝을 세우고 서 있는 자신을 내려다보았습니다.
트랙터를 타고 지나가는 그 똑같은 얼음판 위에 발끝으로 서 있는 차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신뢰심 이전에 그 호수의 얼음 상태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분명히 알고 있다면 전적인 신뢰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호세아6:6절에서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7:3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앎으로 인하여 어린아이와 같은 온전한 신뢰심을 가질 수 있고, 이 신뢰심이 하나님의 나라를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2. 지혜에 있어서는 어린아이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고린도전서13:11절을 봅시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 했으며, 14:20절에서는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어린아이처럼 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씀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믿음의 형태는 어린아이처럼 온전하고 순수해야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크기까지도 어린아이와 같아서는 안 됩니다. 믿음의 분량과 지혜에 있어서는 장성한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이 오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만년 아이와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일을 시켜야만 하고, 쉽게 짜증을 내고, 불평불만이 많으며,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신앙을 키워갈 줄을 모르는 것이 어린아이 같은 신앙입니다. 히브리서5:12-14절을 봅시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피터 팬 증후군’이라는 정신적인 질병이 있습니다. 이는 동화속의 소년 피터 팬이 더 이상 자라지 않고 만년 어린 소년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육체로는 어른이 되었으면서도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어린아이 같은 것을 말합니다. 피터 팬 증후군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세계에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신앙생활이 10년 20년이 되었지만, 영적인 성장도 없이 늘 어린아이처럼 변덕이 심하고,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며, 투정을 잘 부리는 신앙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것은 속히 벗어버려야 할 어린아이 신앙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라야합니다.
에베소서 4:13-15절을 봅시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이는 성장의 방법과 성장의 목표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젖먹이 어린아이에서 벗어나 자라려면, 너무나 당연히 부지런히 먹어야 합니다. 요즈음 ‘웰빙’이라 해서 육신의 건강과 성장을 위하여 얼마나 애씁니까? 아무거나 먹는 것이 아니라 농작물은 유기농과 자연식을 고르고, 생식과 채식을 주로 하며, 적당한 운동과 휴식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육신의 건강과 성장을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보다 더 중요한 영의 생명을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합니까?
우리의 영이 자라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처럼 ‘사랑 안에서 참된 삶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성장의 비결은 아는 것과 실천에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지식이 뛰어나다 할지라도 행함이 없으면 성장할 수 없습니다. 영적인 기형이 되겠지요. 마치 색맹처럼 말입니다.
소경은 전혀 볼 수 없기에 낮이든 밤이든 똑같이 더듬어야 합니다. 그런데 ‘색맹’은 다릅니다. 색을 분별할 수 없는 색맹에게는 주위의 화려한 모습들이 거의 비슷한 색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채색의 구별이 어렵습니다. 물체를 구별할 수도 있고 활동에도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계절 따라 채색되는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즐길 수가 없고, 신비로운 색의 조화를 느끼지도 못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어 오랜 신앙생활을 했지만, 아직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의 소유자가 마치 색맹과도 같습니다. 현실의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지만 기쁨을 알지 못합니다. 색맹처럼 자신에게 주어지는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현실이 좋아지면 기뻐하지만, 잠시 어려움이 오면 만사가 끝난 것처럼 땅이 꺼지듯이 탄식하며 주저앉아버립니다. 그 환경 속에서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을 분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할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온전하고 순수한 신뢰이기 때문입니다. 이 신뢰는 영의 삶의 기초입니다. 이 신뢰심이 없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아야 할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혜로움과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는 성장입니다. 이 성장이 없이는 자유와 기쁨과 평안을 누리지도 못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습니다. 이제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교회와 신앙의 가정이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육신적으로 어른이든, 영적으로 어른이든, 아이들이 따라올 수 있도록 어른이 먼저 행함으로 신앙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 교회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함으로 깨어있고,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도록 자라서 기쁨과 평안을 누리며, 우리 후손인 아이들에게도 상속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흔히 어른들은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이는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오늘은 교회가 어린이주일로 지킵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아이들의 영적인 환경을 깊이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요즈음 많은 부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풍족한 생활과 세상적인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만이 아이들을 사랑하는 표현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러한 환경은 아이들에게 방종과 세상적인 안일과 쾌락을 쫓게 하는 필요악이 될 수 있습니다.
구세군의 창설자인 ‘부스’의 부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이 하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우는 것이 세계를 구원하는 첫걸음입니다. 나는 언제나 사탄보다 한 발 앞서서 내 아이들을 인도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사탄보다 한 발 앞서는 노력과 열심, 이는 아이들을 영적인 사람으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즉 이 시대의 아이들이 사탄의 공격에 무너지지 않게 하려면, 사탄보다 한 발 앞서는 영적 관심과 기도와 신앙의 본을 보이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부모들에게 ‘아이들을 신앙적으로 지도할 것’을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잠언22:6절에서는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했으며, 잠언13:24절에서는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초달을 차마 못한다.’는 말은 자식이 너무 애처롭고 안쓰러워서 엄하게 가르치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잠언23:13,14절에서는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고 하셨고 잠언29:15절에서는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고 경고합니다. 이 모든 말씀을 종합하면, 아이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은 육신적으로 어린아이가 아닌,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말씀하시는 ‘어린아이 같은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보고 우리 삶의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표현되고 있지만, 여러 성경에서 ‘어린아이처럼’이라는 표현이 여러 곳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나라와 신앙의 삶을 표현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긍정적인 의미가 대부분이지만 부정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예수님께서 특별히 강조하시고 성도의 삶에 요구하신 ‘어린아이처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봅시다.
1.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삶은 온전한 신뢰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레아 지역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였습니다. 한참 말씀을 전하실 때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예수님 앞으로 나왔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아이들을 데려온 부모들로서 아이들에게 예수님의 축복을 받게 하려고 온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어린아이’란 ‘아기들’, ‘갓난아기’를 나타내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만져 주심을 바라고’라고 했는데, 이는 단순히 어루만지는 것이 아니라 축복의 행위를 의미합니다. 당시에는 아이들에게 랍비로부터의 축복을 받게 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들을 막으면서 꾸짖었습니다. 아마도 어른들이 말씀을 듣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광경을 보시고 화를 내시면서,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화를 내셨다는 간접적인 기록은 성경 여러 곳에 있지만, 직접적인 기록은 이곳뿐입니다. 이는 이 일이 대단히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암시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어린아이와 같이 받드는 자’로 말씀하시면서 어린아이들의 존재가치를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이는 아이들을 경시하는 당시의 풍속을 뒤집으시는 것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의 순수한 신뢰심을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나라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결코 어린아이가 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추호의 의심이나 근심이 없이 부모를 의지하는 어린아기들의 온전하고 순수한 신뢰를 요청하신 것입니다. 어른들의 마음에 온전하고 순수한 신뢰심이 일어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나름대로의 판단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일을 계획한다든지 결정을 할 때면 자신의 판단기준이 작용을 하게 됩니다. 이는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에는 자신의 경험에 의한 염려 혹은 사람을 의지하는 것, 대가를 기대하는 것 등.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를 못합니다. 이것이 야고보 선생을 통하여 말씀하신 “두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은 ‘기도의 응답도 못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린아이처럼 받아들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은 ‘아멘’으로 받아들이지만, 마음에 들지 않거나 믿어지지 않는 것은 거부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순수하고도 온전한 신뢰를 요구하십니다. 만일 영생을 얻고자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청년처럼, 믿을 수 있는 일부만의 믿음이 필요했다면 세상의 거의 전부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전적인 신뢰를 요청하십니다. 부자청년은 자신이 계명을 철저히 지켰다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눅18:22)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온전하고 자 한다면”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전적인 신뢰와 헌신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만일 내게 하나님께 대한 온전하고 순수한 신뢰심이 없다면 먼저 하나님을 알도록 힘써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남부 지방에 사는 어느 청년이 한겨울에 북부 지역에 사는 친구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 날은 날씨도 좋고 기온도 영상 5도 정도여서 오후에 둘은 차를 타고 주변 지역을 둘러보기 위해서 출발했습니다. 큰 호수 옆을 지나다가 물이 꽁꽁 얼어있는 것을 보고는 차를 세워놓고 호수를 구경하기로 했습니다.
북부의 친구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호수의 얼음 위를 달려가면서 미끄럼을 탔습니다. 그러나 남부에서 온 친구는 호수 가운데로는 가지 않고 호숫가에서 조심스럽게 얼음 위를 걷고만 있었습니다. 그것도 발끝을 세우고 조심스럽게 걸었습니다. 친구는 나름대로 날씨도 따뜻하고 호수의 얼음 깊이도 모르니 깨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때 요란스러운 자동차 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어떤 농부가 커다란 트랙터를 몰고 호수로 들어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호수를 가로질러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발끝을 세우고 서 있는 자신을 내려다보았습니다.
트랙터를 타고 지나가는 그 똑같은 얼음판 위에 발끝으로 서 있는 차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신뢰심 이전에 그 호수의 얼음 상태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분명히 알고 있다면 전적인 신뢰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호세아6:6절에서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7:3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앎으로 인하여 어린아이와 같은 온전한 신뢰심을 가질 수 있고, 이 신뢰심이 하나님의 나라를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2. 지혜에 있어서는 어린아이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고린도전서13:11절을 봅시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 했으며, 14:20절에서는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어린아이처럼 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씀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믿음의 형태는 어린아이처럼 온전하고 순수해야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크기까지도 어린아이와 같아서는 안 됩니다. 믿음의 분량과 지혜에 있어서는 장성한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이 오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만년 아이와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일을 시켜야만 하고, 쉽게 짜증을 내고, 불평불만이 많으며,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신앙을 키워갈 줄을 모르는 것이 어린아이 같은 신앙입니다. 히브리서5:12-14절을 봅시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피터 팬 증후군’이라는 정신적인 질병이 있습니다. 이는 동화속의 소년 피터 팬이 더 이상 자라지 않고 만년 어린 소년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육체로는 어른이 되었으면서도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어린아이 같은 것을 말합니다. 피터 팬 증후군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세계에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신앙생활이 10년 20년이 되었지만, 영적인 성장도 없이 늘 어린아이처럼 변덕이 심하고,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며, 투정을 잘 부리는 신앙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것은 속히 벗어버려야 할 어린아이 신앙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라야합니다.
에베소서 4:13-15절을 봅시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이는 성장의 방법과 성장의 목표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젖먹이 어린아이에서 벗어나 자라려면, 너무나 당연히 부지런히 먹어야 합니다. 요즈음 ‘웰빙’이라 해서 육신의 건강과 성장을 위하여 얼마나 애씁니까? 아무거나 먹는 것이 아니라 농작물은 유기농과 자연식을 고르고, 생식과 채식을 주로 하며, 적당한 운동과 휴식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육신의 건강과 성장을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보다 더 중요한 영의 생명을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합니까?
우리의 영이 자라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처럼 ‘사랑 안에서 참된 삶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성장의 비결은 아는 것과 실천에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지식이 뛰어나다 할지라도 행함이 없으면 성장할 수 없습니다. 영적인 기형이 되겠지요. 마치 색맹처럼 말입니다.
소경은 전혀 볼 수 없기에 낮이든 밤이든 똑같이 더듬어야 합니다. 그런데 ‘색맹’은 다릅니다. 색을 분별할 수 없는 색맹에게는 주위의 화려한 모습들이 거의 비슷한 색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채색의 구별이 어렵습니다. 물체를 구별할 수도 있고 활동에도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계절 따라 채색되는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즐길 수가 없고, 신비로운 색의 조화를 느끼지도 못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어 오랜 신앙생활을 했지만, 아직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의 소유자가 마치 색맹과도 같습니다. 현실의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지만 기쁨을 알지 못합니다. 색맹처럼 자신에게 주어지는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현실이 좋아지면 기뻐하지만, 잠시 어려움이 오면 만사가 끝난 것처럼 땅이 꺼지듯이 탄식하며 주저앉아버립니다. 그 환경 속에서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을 분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할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온전하고 순수한 신뢰이기 때문입니다. 이 신뢰는 영의 삶의 기초입니다. 이 신뢰심이 없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아야 할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혜로움과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는 성장입니다. 이 성장이 없이는 자유와 기쁨과 평안을 누리지도 못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습니다. 이제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교회와 신앙의 가정이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육신적으로 어른이든, 영적으로 어른이든, 아이들이 따라올 수 있도록 어른이 먼저 행함으로 신앙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 교회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함으로 깨어있고,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도록 자라서 기쁨과 평안을 누리며, 우리 후손인 아이들에게도 상속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