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누리는 삶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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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4-04-24 22:39
♡♥♡ 기적을 누리는 삶 / 눅 17:11-19
*** 들어가는 말
사람이라는 존재는 일평생 무엇인가를 갈망하면서 삽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이 시간에도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일하기도 하며, 찾아다니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결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화나 드라마, 만화, 공상과학의 세계를 통하여 대리만족을 추구합니다. 즉 현실의 세상에서 이룰 수 없는 기적 같은 꿈을 연극의 세계를 통하여 느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과학이 발달한 현대에 와서도 풀지 못하는 자연계의 이적과 같은 일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동물들의 ‘귀소본능’이라고 부르는 이주능력입니다. 동물들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수천 킬로나 떨어진 목적지를 나침판이나 지도의 도움 없이 찾아갑니다. 특히 새는 이러한 능력이 아주 뛰어납니다. 예를 들면,
북극 지방의 제비갈매기는 생후 6주 밖에 안 된 어린 새도 따뜻한 곳을 찾아서 17,700km를 여행합니다. 여름이 돌아오면 이 새는 다시 북극의 자기 둥지를 찾아 돌아옵니다. 그들이 훈련을 받았을까요? 그들이 태양을 따라서 갔을까요? 북극성이 그들을 인도했을까요? 과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어느 누구도 새들의 이러한 능력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어느 과학자가 시험을 했습니다. 그는 영국 웨일즈 해안에서 섬새(Manx Shearwater) 한 마리를 잡아 다리에 띠를 맨 후, 미국 매사추세츠의 보스톤으로 운반했습니다. 거기서 그 새를 풀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새는 정확히 13일째에 4,900km떨어진 자기의 보금자리에 돌아왔습니다. 섬새는 아무런 표시도 없는 바다를 홀로 건너 자기의 보금자리로 안전하게 도착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이 있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본능과 능력’을 주셨습니다. 식물은 식물들 나름대로, 동물은 동물들 나름대로 사람이 설명할 수 없는 본능과 그것을 이루는 능력이 있습니다. 자연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이 법칙을 잘 순종합니다. 나무는 뿌리를 땅으로 뻗고, 가지와 잎은 빛을 향하여 위로 뻗습니다. 새나 물고기나 동물들은 새끼를 낳고 기르며, 자기 집을 찾아가는 본능이 있습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기적 같은 현상’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동물들의 입장에서는 기적이 아닌 자연스러운 삶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만 이러한 능력을 주지 않으셨겠습니까?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이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놀라운 능력을 주셨습니다. 오히려 사람에게는 육적인 본능과 영적인 본능, 이 두 가지를 주셨습니다. 만일 사람도 하나님이 주신 영의 본능을 따라간다면 이러한 이적과 같은 삶을 날마다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이 이 사실을 중언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어떻게 하면 우리의 삶에서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기적을 누릴 수 있는지를 생각해봅시다.
먼저, 본문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사마리아 지역의 한 촌을 지나실 때였습니다. 갑자기 저만치 멀리서 한 무리가 예수님을 부르며 도움을 구했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이들은 열 명이나 되는 문둥병자들이었으며, 예수님께 병을 고쳐주시기를 구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아무 것도 묻지 않으시고 다만 말씀하시기를,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라고만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둥병자들도 아무 것도 더 요구하지 않았으며, 즉석에서 제사장이 있는 마을로 향했습니다.
길을 가는 도중에 문둥병자들은 자신의 병이 나았음을 알았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신의 병이 나은 것을 확인하는 동시에 오던 길로 돌아섰습니다. 다시 그 마을로 가서 예수님께 나아가 땅바닥에 엎드려 절하며 감사의 뜻을 표했습니다. 돌아와서 예수님께 경배한 사람은 사마리아 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혼자 말처럼 탄식하시듯이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그리고는 그 사마리아 사람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그날 횡재 했습니다. 두 가지의 기적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난치병이자 저주의 병인 문둥병을 고침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방인으로서 영혼의 구원까지도 얻은 것입니다. 이러한 횡재는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바로 모든 사람들이 기대하는 기적 같은 삶입니다. 이 기적은 오늘에도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런 기적 같은 삶을 누릴 수가 있습니까?
1. 예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열명의 문둥병자들은 모두가 예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와서 부르짖은 것이 그러하며, 예수님께서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을 때에 그 말씀을 믿고 갔던 것이 그러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율법의 규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율법에는 문둥병자가 병이 나았을 때에는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정결하게 되었다.’는 판결을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너희 병이 나았으니 제사장에게 가서 판결을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는 모두 병을 고침 받을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열 명 모두가 깨끗하게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 치유의 기적은 믿음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 우리의 삶에서도 예수님을 진실로 믿고 의지할 때에 기적 같은 삶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히브리서 기자는 11:6절에서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열 명 중에 아홉 명이 ‘육신적인 본능’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육신의 병이 고쳐진 사실에만 기뻐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육신의 병은 고침 받았지만 생활까지도 치유 받지는 못했습니다. 즉 병에서는 벗어났지만 불행한 삶은 여전히 계속된다는 뜻입니다.
오직 한 사람, 유대인들에게는 저속하고 상대하지 못할 사람으로 치부되었던 사마리아 사람은 ‘영의 본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육신의 병을 고침 받은 사실보다 주님께 감사하고 경배하는 것이 중요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적인 믿음입니다. 그에게는 제사장에게 가기보다는 예수님께 돌아가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 결과는 또 하나의 기적이자 진정한 기적을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에도 교회를 다니는 수많은 교인들이 있지만, 이 두 가지의 본능을 다 가지고, 육신과 영의 삶이 모두 기적 같은 삶을 누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믿음이 없어서 아무 것도 누리지 못하며, 어떤 이들은 조금 더 나은 믿음으로 어느 정도의 육신적인 필요를 채움 받는 기적은 누립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하고 신앙의 일을 등한히 하는 교인들이 대부분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따르면 열의 아홉이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철학자 니체는 기독교인들의 믿음을 “지팡이(clutch)에 불과하다.”고 비판했습니다. 즉 기독교인들은 믿음을 지팡이처럼 필요할 때만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지팡이를 의지하듯 예수님을 의지하다가 더 이상 필요가 없으면 지팡이를 버리듯 예수님을 떠나버립니다. 아홉 명의 문둥병자처럼 말입니다. 한 가지만 아는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진정으로 기적의 삶을 누리려면 모든 생활에서 예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2. 모든 일에 예수님을 인정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사마리아 인은 문둥병이 나음 받았음을 안 즉시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는 즉시 걸음을 돌이켜 곧장 예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사례했습니다. 여러분은 열 명의 행동의 차이를 보십니까? 아홉 명은 자신들의 병이 나았음을 알고는 소리를 지르고 얼싸안고 뛰고 즐거워하며, 한시라도 빨리 자유를 얻으려고 제사장에게로 달려갔을 것입니다. 오직 한 사람만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했습니다. 그는 다시 예수님이 계시는 마을로 돌아섰습니다. 아홉 명이 보기에는 바보 같고 어리석은 짓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그 마을에 계셨습니다. 돌아 올 사람을 기다리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라고 하신 말씀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푸실 더 큰 은혜를 가지고 기다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돌아온 사람은 이방인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안타까움과 탄식으로 가득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세대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이적을 바라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면서도 능력을 베푸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세상으로 달려가 버립니다. 결국은 실망하고 후회하게 될 세상으로 말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이사야30:18절에서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저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십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사례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worship, 禮拜, 경의를 표하여 절함)입니다. 사마리아 인은 예수님께 경배하며 예배했습니다. 이는 사마리아 인이 예수님을 영광 받으실 하나님으로 인정한 것을 나타냅니다. 예배를 영어로 'worship'이라고 하는데, 'worship'은 'worthy'에서 유래했습니다. worthy는 ‘존경할만한’, ‘가치가 있는’이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으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의 삶이 형통하고 성공적이기를 원하신다면,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하십시오. 하나님을 생명의 주이시며, 모든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존경과 경외심과 신실함으로 예배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을 그렇게 귀하게 여기시고 높여주실 것입니다. 시편91:14-15절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
이 나라의 교회가 뜨겁게 부흥하던 6-70년대의 가장 큰 신앙의 특징은 열정이었습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살림살이였지만, 정성껏 준비한 옷을 입고, 설레는 마음으로 예배를 기다렸습니다. 토요일부터 주일을 준비하는 성도들로 교회가 붐볐습니다. 주일이면 예배가 있기 한 시간 전부터 기도하고, 말씀을 읽으며, 준비하는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30분전이 되면 찬송으로 준비했습니다. 그 가난 속에서도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득했습니다. 저는 나면서부터 교회에서 교회를 보면서 자랐습니다. 지금도 그때의 성도들의 사랑과 열심과 감사가 배어 있는 마음들이 잊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의 신앙의 결실로 우리는 지금과 같은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육신과 영의 필요를 알고 계시며,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육신의 본능만 따라가는지, 아니면 영의 본능에 충실한지가 문제입니다. ‘기적’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 가까이 있으며 내 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기적은 내 삶에서도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의 구주되시고 생명 되심을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존경과 감사로 예배하면 ‘기적 같은 삶’이 내게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삶이 생활 속에서 실천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육신의 치유로 만족한 아홉 명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육신의 삶과 영의 생명을 모두 얻은 한 명이 되고 싶습니까? 여러분의 영적인 본능을 회복하셔서 영과 육신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사람이라는 존재는 일평생 무엇인가를 갈망하면서 삽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이 시간에도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일하기도 하며, 찾아다니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결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화나 드라마, 만화, 공상과학의 세계를 통하여 대리만족을 추구합니다. 즉 현실의 세상에서 이룰 수 없는 기적 같은 꿈을 연극의 세계를 통하여 느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과학이 발달한 현대에 와서도 풀지 못하는 자연계의 이적과 같은 일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동물들의 ‘귀소본능’이라고 부르는 이주능력입니다. 동물들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수천 킬로나 떨어진 목적지를 나침판이나 지도의 도움 없이 찾아갑니다. 특히 새는 이러한 능력이 아주 뛰어납니다. 예를 들면,
북극 지방의 제비갈매기는 생후 6주 밖에 안 된 어린 새도 따뜻한 곳을 찾아서 17,700km를 여행합니다. 여름이 돌아오면 이 새는 다시 북극의 자기 둥지를 찾아 돌아옵니다. 그들이 훈련을 받았을까요? 그들이 태양을 따라서 갔을까요? 북극성이 그들을 인도했을까요? 과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어느 누구도 새들의 이러한 능력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어느 과학자가 시험을 했습니다. 그는 영국 웨일즈 해안에서 섬새(Manx Shearwater) 한 마리를 잡아 다리에 띠를 맨 후, 미국 매사추세츠의 보스톤으로 운반했습니다. 거기서 그 새를 풀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새는 정확히 13일째에 4,900km떨어진 자기의 보금자리에 돌아왔습니다. 섬새는 아무런 표시도 없는 바다를 홀로 건너 자기의 보금자리로 안전하게 도착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이 있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본능과 능력’을 주셨습니다. 식물은 식물들 나름대로, 동물은 동물들 나름대로 사람이 설명할 수 없는 본능과 그것을 이루는 능력이 있습니다. 자연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이 법칙을 잘 순종합니다. 나무는 뿌리를 땅으로 뻗고, 가지와 잎은 빛을 향하여 위로 뻗습니다. 새나 물고기나 동물들은 새끼를 낳고 기르며, 자기 집을 찾아가는 본능이 있습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기적 같은 현상’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동물들의 입장에서는 기적이 아닌 자연스러운 삶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만 이러한 능력을 주지 않으셨겠습니까?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이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놀라운 능력을 주셨습니다. 오히려 사람에게는 육적인 본능과 영적인 본능, 이 두 가지를 주셨습니다. 만일 사람도 하나님이 주신 영의 본능을 따라간다면 이러한 이적과 같은 삶을 날마다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이 이 사실을 중언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어떻게 하면 우리의 삶에서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기적을 누릴 수 있는지를 생각해봅시다.
먼저, 본문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사마리아 지역의 한 촌을 지나실 때였습니다. 갑자기 저만치 멀리서 한 무리가 예수님을 부르며 도움을 구했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이들은 열 명이나 되는 문둥병자들이었으며, 예수님께 병을 고쳐주시기를 구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아무 것도 묻지 않으시고 다만 말씀하시기를,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라고만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둥병자들도 아무 것도 더 요구하지 않았으며, 즉석에서 제사장이 있는 마을로 향했습니다.
길을 가는 도중에 문둥병자들은 자신의 병이 나았음을 알았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신의 병이 나은 것을 확인하는 동시에 오던 길로 돌아섰습니다. 다시 그 마을로 가서 예수님께 나아가 땅바닥에 엎드려 절하며 감사의 뜻을 표했습니다. 돌아와서 예수님께 경배한 사람은 사마리아 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혼자 말처럼 탄식하시듯이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그리고는 그 사마리아 사람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그날 횡재 했습니다. 두 가지의 기적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난치병이자 저주의 병인 문둥병을 고침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방인으로서 영혼의 구원까지도 얻은 것입니다. 이러한 횡재는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바로 모든 사람들이 기대하는 기적 같은 삶입니다. 이 기적은 오늘에도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런 기적 같은 삶을 누릴 수가 있습니까?
1. 예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열명의 문둥병자들은 모두가 예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와서 부르짖은 것이 그러하며, 예수님께서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을 때에 그 말씀을 믿고 갔던 것이 그러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율법의 규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율법에는 문둥병자가 병이 나았을 때에는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정결하게 되었다.’는 판결을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너희 병이 나았으니 제사장에게 가서 판결을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는 모두 병을 고침 받을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열 명 모두가 깨끗하게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 치유의 기적은 믿음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 우리의 삶에서도 예수님을 진실로 믿고 의지할 때에 기적 같은 삶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히브리서 기자는 11:6절에서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열 명 중에 아홉 명이 ‘육신적인 본능’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육신의 병이 고쳐진 사실에만 기뻐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육신의 병은 고침 받았지만 생활까지도 치유 받지는 못했습니다. 즉 병에서는 벗어났지만 불행한 삶은 여전히 계속된다는 뜻입니다.
오직 한 사람, 유대인들에게는 저속하고 상대하지 못할 사람으로 치부되었던 사마리아 사람은 ‘영의 본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육신의 병을 고침 받은 사실보다 주님께 감사하고 경배하는 것이 중요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적인 믿음입니다. 그에게는 제사장에게 가기보다는 예수님께 돌아가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 결과는 또 하나의 기적이자 진정한 기적을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에도 교회를 다니는 수많은 교인들이 있지만, 이 두 가지의 본능을 다 가지고, 육신과 영의 삶이 모두 기적 같은 삶을 누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믿음이 없어서 아무 것도 누리지 못하며, 어떤 이들은 조금 더 나은 믿음으로 어느 정도의 육신적인 필요를 채움 받는 기적은 누립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하고 신앙의 일을 등한히 하는 교인들이 대부분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따르면 열의 아홉이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철학자 니체는 기독교인들의 믿음을 “지팡이(clutch)에 불과하다.”고 비판했습니다. 즉 기독교인들은 믿음을 지팡이처럼 필요할 때만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지팡이를 의지하듯 예수님을 의지하다가 더 이상 필요가 없으면 지팡이를 버리듯 예수님을 떠나버립니다. 아홉 명의 문둥병자처럼 말입니다. 한 가지만 아는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진정으로 기적의 삶을 누리려면 모든 생활에서 예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2. 모든 일에 예수님을 인정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사마리아 인은 문둥병이 나음 받았음을 안 즉시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는 즉시 걸음을 돌이켜 곧장 예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사례했습니다. 여러분은 열 명의 행동의 차이를 보십니까? 아홉 명은 자신들의 병이 나았음을 알고는 소리를 지르고 얼싸안고 뛰고 즐거워하며, 한시라도 빨리 자유를 얻으려고 제사장에게로 달려갔을 것입니다. 오직 한 사람만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했습니다. 그는 다시 예수님이 계시는 마을로 돌아섰습니다. 아홉 명이 보기에는 바보 같고 어리석은 짓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그 마을에 계셨습니다. 돌아 올 사람을 기다리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라고 하신 말씀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푸실 더 큰 은혜를 가지고 기다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돌아온 사람은 이방인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안타까움과 탄식으로 가득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세대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이적을 바라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면서도 능력을 베푸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세상으로 달려가 버립니다. 결국은 실망하고 후회하게 될 세상으로 말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이사야30:18절에서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저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십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사례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worship, 禮拜, 경의를 표하여 절함)입니다. 사마리아 인은 예수님께 경배하며 예배했습니다. 이는 사마리아 인이 예수님을 영광 받으실 하나님으로 인정한 것을 나타냅니다. 예배를 영어로 'worship'이라고 하는데, 'worship'은 'worthy'에서 유래했습니다. worthy는 ‘존경할만한’, ‘가치가 있는’이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으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의 삶이 형통하고 성공적이기를 원하신다면,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하십시오. 하나님을 생명의 주이시며, 모든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존경과 경외심과 신실함으로 예배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을 그렇게 귀하게 여기시고 높여주실 것입니다. 시편91:14-15절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
이 나라의 교회가 뜨겁게 부흥하던 6-70년대의 가장 큰 신앙의 특징은 열정이었습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살림살이였지만, 정성껏 준비한 옷을 입고, 설레는 마음으로 예배를 기다렸습니다. 토요일부터 주일을 준비하는 성도들로 교회가 붐볐습니다. 주일이면 예배가 있기 한 시간 전부터 기도하고, 말씀을 읽으며, 준비하는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30분전이 되면 찬송으로 준비했습니다. 그 가난 속에서도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득했습니다. 저는 나면서부터 교회에서 교회를 보면서 자랐습니다. 지금도 그때의 성도들의 사랑과 열심과 감사가 배어 있는 마음들이 잊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의 신앙의 결실로 우리는 지금과 같은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육신과 영의 필요를 알고 계시며,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육신의 본능만 따라가는지, 아니면 영의 본능에 충실한지가 문제입니다. ‘기적’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 가까이 있으며 내 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기적은 내 삶에서도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의 구주되시고 생명 되심을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존경과 감사로 예배하면 ‘기적 같은 삶’이 내게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삶이 생활 속에서 실천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육신의 치유로 만족한 아홉 명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육신의 삶과 영의 생명을 모두 얻은 한 명이 되고 싶습니까? 여러분의 영적인 본능을 회복하셔서 영과 육신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