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진 자로서의 삶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7,872회
작성일
2004-10-24 09:35
*** 빚진 자로서의 삶 / 요13:1-17
** 들어가는 말
‘가을에는 모두가 시인이 된다.’고 하든가요! 풍성하고 푸르던 산과 들이 낙엽이 지면서 앙상하게 변하고, 온갖 과일과 곡식들이 추수되어, 나무도 들도 텅비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연의 변화를 보면서 사람들도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겠지요. 저도 요즈음 많은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뜨거운 열정으로 신학을 연구하면서 안 될 것이 없을 것 같던 그 시절의 열정을 돌아봅니다. 그리고 거의 20여년이 흐른 지금의 마음은 어떤지, 하나님께로 향하는 사랑과 열정이 어떻게 변했는지도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자꾸만 아쉬움이 더해가는 것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지난 일들을 돌아보면서 ‘좀 더 이렇게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 때는 왜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라는 후회와 미련이 남는 일이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시편90:9-12절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나날은 주께서 터뜨리시는 분노 속에서 힘에 겹기만 합니다. 한낱 한숨처럼 사그라지고 맙니다. 인생살이 기껏해야 한 칠십 년 건강하게 살아도 팔십 년인데 그 인생살이 고통과 슬픔뿐 덧없이 지나가고 쏜살같이 빠르게 날아갑니다. 그 누가 주님의 노여움 그 무서움을 알며 그 누가 주님의 분노 그 두려움을 알까요? 인생살이가 얼마나 짧은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치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슬기롭게 살아가게 하소서.”
요즈음 저 역시 하나님께 간절히 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좀 더 보람 있는 생애가 되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의 열매를 내어 놓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 ‘나 자신의 남은 삶을 부끄럽지 않게, 진정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며 영광이 되게 해 달라.’고 간구하며,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지도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 속에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삶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너무나 유명하고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일을 얼마 앞두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친히 섬김의 본을 보이신 그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하여 주님은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행동으로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발을 다 씻기신 후에 본문14-15절에서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하시며, 17절에서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17절에서 말씀하신 “이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당시의 유대 관습에서는 낮은 신분의 사람이 높은 신분의 사람에게 예를 갖추고 발을 씻기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주’가 되시고, ‘선생’이 되시면서 ‘종’이며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렇게 했다고 하셨습니까? 제자들도 높고 낮음을 따지지 않고 ‘서로의 발을 씻겨주는 섬김’을 위해서였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왜냐고요? 예수님께 사랑과 섬김의 빚을 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것”은 바로 “사랑과 섬김의 빚”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주님으로부터 이런 ‘사랑과 섬김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1:14절에서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고백하며, 13:8절에서는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주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나니까 자신이 ‘사랑의 빚진 사람’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일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9:16절에서는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 까지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어둡고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주님으로부터 빚진 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1. 빚진 자로서의 삶은 사랑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가르치신 말씀은 ‘새 계명’인데, 곧 ‘사랑의 계명’입니다. 본문 뒤쪽의 34-35절을 봅시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전16:14)고 명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행동 원리는 곧 ‘사랑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왜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여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먼저 받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의 빚을 졌습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행하여야 할 이유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사랑으로 행하는 것은 빚진 자로서의 당연한 삶입니다.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 여사의 간증 속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코리는 그의 가족 모두가 유태인들을 숨겨 주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독일에서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수용소 생활을 했습니다. ‘라벤스브룩’이라는 참혹한 수용소에서 가족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독일이 패전했을 때에는 가족 중에서 코리만 기적적으로 살아 남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코리에게 한 가지 사명을 주셨습니다. ‘자기를 핍박하고 가족들을 잔혹하게 죽인 독일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코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독일의 마을과 도시를 돌면서 간증집회를 했습니다. 그 집회로 인하여 죄책감 가운데 사로 잡혔던 수많은 사람들이 죄에서 자유를 얻었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한번은 코리가 시골마을에서 말씀과 간증을 모두 마치고 사람들과 인사를 하는데, 그만 온 몸이 얼어붙어버렸습니다. 감옥에 있을 때 혹독한 고문으로 자기 언니 ‘벳시’를 죽게 했으며, 모든 사람들을 못살게 괴롭혔던 ‘라벤스브룩’수용소의 간수가 저만치 앞에 있었던 것입니다. 꿈에도 잊을 수 없는 그 간수를 보는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습니다. 코리는 마음속으로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저 사람은 안 돼요. 저 사람만은 용서할 수 없어요. 할 수 없어요. 저 사람만은 안돼요.”
그러나 부정할수록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사랑하라. 그것은 명령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코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그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사랑할 용기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명령이라면 해보겠습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어느새 그 사람이 자기 눈앞에 왔으며, 코리는 사랑의 감정이 없이 그에게 손을 내밀고 그를 끌어안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은 그녀의 마음에 그를 사랑할 수 있는 넉넉한 감정을 부어주셨습니다.
코리는 간수를 사랑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명령 앞에 순종하기로 결단한 순간, 하나님께서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사랑은 이와 같이 원수까지라도 품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요한복음15:16절에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택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고 의지하면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약함도 아시고, 원수를 사랑할 만한 사랑도 의지도 없음을 아십니다.
주님은 이러한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우리를 향하신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본문1절을 봅시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제자들을 통하여 주님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날까지 전하게 하시려고, 식사 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께 사랑으로 빚을 졌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제자들에게 그 사랑을 전했으며,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그러면 지금의 우리는 역시 그 사랑을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 사랑을 어떻게 전합니까? 우리의 생활 속에서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2. 빚진 자로서의 삶은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섬김의 실제적인 본이었습니다. 유대를 포함하는 팔레스타인 지역은 건조한 아열대성 지역입니다. 그들의 통상적인 신발은 ‘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행자들의 발은 먼지와 오염물질로 더럽혀져 있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집을 방문한 손님에게 주인이나 혹은 종들이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예의이자 관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식사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을 씻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하나 나서서 발을 씻겨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일까요? 제자들 서로가 자신이 높다고 우겼기 때문입니다. 발을 씻겨주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낮은 신분임을 자처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누구도 발을 씻겨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면서 발도 씻지 못한 채 식탁에 앉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자신의 발을 씻기시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못하겠다고 버틴 것입니다. 제자들이 신분의 문제로 스스로의 고집들을 꺾지 않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섬김의 물길을 터놓으시려고 일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식사하시다가 도중에 일어나셔서 한 사람씩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다 씻기신 후에 겉옷을 다시 입으시고 식탁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의 발을 씻긴 뜻을 알겠느냐? 너희는 나를 `선생님' 또는 `주님'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옳은 말이다. 사실이 그렇다. 그렇다면 주요,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남의 발을 씻어 주어야 옳지 않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베푼 것같이 너희도 남에게 베풀도록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종이 주인보다 높지 못하며 보냄을 받은 사람은 보낸 사람보다 높지 않다. 너희가 이것을 깨달아 이제 그대로 행하면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즉 ‘내가 이 일을 한 것은 너희의 빚으로 남겨둔다.’는 말씀이십니다. 스스로 낮아지지 못하고 섬기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억지로라도 하도록 빚을 남겨두신 것입니다.
여러분, 미국의 흑인작가‘알렉스 헤일리(Alex Haley)’가 쓴 ‘뿌리’라는 소설을 아시지요? 이 소설은 작가 자신의 조상인 ‘쿤타 킨테’로부터 ‘헤일리’ 자신에 이르기까지 7대에 이르는 노예 가족사를 사회고발적인 시각으로 세심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이 쿤타 킨테의 조국이 검은 대륙의 가장 작은 나라인 ‘감비아’입니다. 그 감비아에서 1984년부터 15년간 선교사역을 하고 돌아 온 ‘이재환’ 선교사가 ‘검은색이 아름답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는 선교사로서의 고민과 갈등, 보람과 기쁨 등을 감동 깊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 중에 감동적인 한 부분을 소개합니다.
감비아 선교의 대 선배인 미국인 선교사 ‘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미국에서 농업대학을 졸업하고 23세의 나이로 감비아에 와서 옥수수, 수수, 콩, 땅콩, 조 등을 재배하는 법을 가르치면서 감비아 사람들을 가난에서 해방시키는 일을 했습니다. 그곳에서 ‘로라’ 선교사와 결혼하여 다섯 명의 딸을 감비아에서 낳아 감비아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신임 선교사들에게 항상 권면하는 말씀이 있는데
“좋은 선교사가 되려면 노새가 되십시오.”
라는 것입니다. 감비아에는 노새가 많은데, 평소에는 주민들의 교통수단이 되고 농사철에는 자기 몸통보다 몇 배나 크고 무거운 짐을 실은 수레를 묵묵히 끌고 다닙니다. 그런데 그 노새들이 밤이 되면 하루의 피곤함과 서러움이 몰려오듯 “끄윽, 끄윽, 큭,큭,큭”하며 슬프게 운답니다. 이처럼 선교사의 삶이란 주인을 위해 존재하는 노새처럼, 현지인들을 위해 그저 최선을 다해 헌신적으로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선교지의 사람들은 선교사들의 주머니에만 관심이 있지 정작 그가 전하려는 복음에는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톰 선교사가 감비아 주민들로부터 그렇게 속임을 당하면서도 여전히 그들을 믿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감비아를 향한 선교사의 뜨거운 사랑이며 섬김이었습니다.
사랑이 그를 미치게 만들고, 지치지 않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아무런 보상도 주어지지 않으며, 배신감만 느껴지는 현장에서 조차 노새처럼 섬기고 헌신할 수 있게 만든 것은 사랑의 힘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이렇게 실천해야 합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것이 그냥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 여기지 않고, 항상 빚진 자의 의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빚진 자로서 사는 사람에게는 자신을 나타낼 공로의식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4:7절에서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라고 했으며, 고린도후서11:30절에서는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더 많은 사랑을 빚진 사람들입니다. 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생각합시다. 따지지 말고, 헤아리지 말고, 주님처럼 그리고 우리 앞서 간 믿음의 선조들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빚진 자로서 사랑으로 행하며, 섬기는 삶을 삽시다. 그리하여 생활 속에서 기쁨이 충만하며, 주님의 증인으로서 깨어있는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가을에는 모두가 시인이 된다.’고 하든가요! 풍성하고 푸르던 산과 들이 낙엽이 지면서 앙상하게 변하고, 온갖 과일과 곡식들이 추수되어, 나무도 들도 텅비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연의 변화를 보면서 사람들도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겠지요. 저도 요즈음 많은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뜨거운 열정으로 신학을 연구하면서 안 될 것이 없을 것 같던 그 시절의 열정을 돌아봅니다. 그리고 거의 20여년이 흐른 지금의 마음은 어떤지, 하나님께로 향하는 사랑과 열정이 어떻게 변했는지도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자꾸만 아쉬움이 더해가는 것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지난 일들을 돌아보면서 ‘좀 더 이렇게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 때는 왜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라는 후회와 미련이 남는 일이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시편90:9-12절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나날은 주께서 터뜨리시는 분노 속에서 힘에 겹기만 합니다. 한낱 한숨처럼 사그라지고 맙니다. 인생살이 기껏해야 한 칠십 년 건강하게 살아도 팔십 년인데 그 인생살이 고통과 슬픔뿐 덧없이 지나가고 쏜살같이 빠르게 날아갑니다. 그 누가 주님의 노여움 그 무서움을 알며 그 누가 주님의 분노 그 두려움을 알까요? 인생살이가 얼마나 짧은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치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슬기롭게 살아가게 하소서.”
요즈음 저 역시 하나님께 간절히 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좀 더 보람 있는 생애가 되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의 열매를 내어 놓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 ‘나 자신의 남은 삶을 부끄럽지 않게, 진정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며 영광이 되게 해 달라.’고 간구하며,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지도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 속에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삶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너무나 유명하고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일을 얼마 앞두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친히 섬김의 본을 보이신 그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하여 주님은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행동으로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발을 다 씻기신 후에 본문14-15절에서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하시며, 17절에서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17절에서 말씀하신 “이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당시의 유대 관습에서는 낮은 신분의 사람이 높은 신분의 사람에게 예를 갖추고 발을 씻기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주’가 되시고, ‘선생’이 되시면서 ‘종’이며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렇게 했다고 하셨습니까? 제자들도 높고 낮음을 따지지 않고 ‘서로의 발을 씻겨주는 섬김’을 위해서였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왜냐고요? 예수님께 사랑과 섬김의 빚을 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것”은 바로 “사랑과 섬김의 빚”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주님으로부터 이런 ‘사랑과 섬김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1:14절에서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고백하며, 13:8절에서는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주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나니까 자신이 ‘사랑의 빚진 사람’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일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9:16절에서는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 까지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어둡고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주님으로부터 빚진 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1. 빚진 자로서의 삶은 사랑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가르치신 말씀은 ‘새 계명’인데, 곧 ‘사랑의 계명’입니다. 본문 뒤쪽의 34-35절을 봅시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전16:14)고 명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행동 원리는 곧 ‘사랑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왜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여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먼저 받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의 빚을 졌습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행하여야 할 이유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사랑으로 행하는 것은 빚진 자로서의 당연한 삶입니다.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 여사의 간증 속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코리는 그의 가족 모두가 유태인들을 숨겨 주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독일에서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수용소 생활을 했습니다. ‘라벤스브룩’이라는 참혹한 수용소에서 가족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독일이 패전했을 때에는 가족 중에서 코리만 기적적으로 살아 남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코리에게 한 가지 사명을 주셨습니다. ‘자기를 핍박하고 가족들을 잔혹하게 죽인 독일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코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독일의 마을과 도시를 돌면서 간증집회를 했습니다. 그 집회로 인하여 죄책감 가운데 사로 잡혔던 수많은 사람들이 죄에서 자유를 얻었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한번은 코리가 시골마을에서 말씀과 간증을 모두 마치고 사람들과 인사를 하는데, 그만 온 몸이 얼어붙어버렸습니다. 감옥에 있을 때 혹독한 고문으로 자기 언니 ‘벳시’를 죽게 했으며, 모든 사람들을 못살게 괴롭혔던 ‘라벤스브룩’수용소의 간수가 저만치 앞에 있었던 것입니다. 꿈에도 잊을 수 없는 그 간수를 보는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습니다. 코리는 마음속으로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저 사람은 안 돼요. 저 사람만은 용서할 수 없어요. 할 수 없어요. 저 사람만은 안돼요.”
그러나 부정할수록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사랑하라. 그것은 명령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코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그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사랑할 용기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명령이라면 해보겠습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어느새 그 사람이 자기 눈앞에 왔으며, 코리는 사랑의 감정이 없이 그에게 손을 내밀고 그를 끌어안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은 그녀의 마음에 그를 사랑할 수 있는 넉넉한 감정을 부어주셨습니다.
코리는 간수를 사랑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명령 앞에 순종하기로 결단한 순간, 하나님께서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사랑은 이와 같이 원수까지라도 품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요한복음15:16절에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택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고 의지하면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약함도 아시고, 원수를 사랑할 만한 사랑도 의지도 없음을 아십니다.
주님은 이러한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우리를 향하신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본문1절을 봅시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제자들을 통하여 주님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날까지 전하게 하시려고, 식사 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께 사랑으로 빚을 졌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제자들에게 그 사랑을 전했으며,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그러면 지금의 우리는 역시 그 사랑을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 사랑을 어떻게 전합니까? 우리의 생활 속에서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2. 빚진 자로서의 삶은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섬김의 실제적인 본이었습니다. 유대를 포함하는 팔레스타인 지역은 건조한 아열대성 지역입니다. 그들의 통상적인 신발은 ‘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행자들의 발은 먼지와 오염물질로 더럽혀져 있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집을 방문한 손님에게 주인이나 혹은 종들이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예의이자 관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식사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을 씻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하나 나서서 발을 씻겨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일까요? 제자들 서로가 자신이 높다고 우겼기 때문입니다. 발을 씻겨주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낮은 신분임을 자처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누구도 발을 씻겨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면서 발도 씻지 못한 채 식탁에 앉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자신의 발을 씻기시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못하겠다고 버틴 것입니다. 제자들이 신분의 문제로 스스로의 고집들을 꺾지 않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섬김의 물길을 터놓으시려고 일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식사하시다가 도중에 일어나셔서 한 사람씩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다 씻기신 후에 겉옷을 다시 입으시고 식탁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의 발을 씻긴 뜻을 알겠느냐? 너희는 나를 `선생님' 또는 `주님'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옳은 말이다. 사실이 그렇다. 그렇다면 주요,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남의 발을 씻어 주어야 옳지 않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베푼 것같이 너희도 남에게 베풀도록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종이 주인보다 높지 못하며 보냄을 받은 사람은 보낸 사람보다 높지 않다. 너희가 이것을 깨달아 이제 그대로 행하면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즉 ‘내가 이 일을 한 것은 너희의 빚으로 남겨둔다.’는 말씀이십니다. 스스로 낮아지지 못하고 섬기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억지로라도 하도록 빚을 남겨두신 것입니다.
여러분, 미국의 흑인작가‘알렉스 헤일리(Alex Haley)’가 쓴 ‘뿌리’라는 소설을 아시지요? 이 소설은 작가 자신의 조상인 ‘쿤타 킨테’로부터 ‘헤일리’ 자신에 이르기까지 7대에 이르는 노예 가족사를 사회고발적인 시각으로 세심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이 쿤타 킨테의 조국이 검은 대륙의 가장 작은 나라인 ‘감비아’입니다. 그 감비아에서 1984년부터 15년간 선교사역을 하고 돌아 온 ‘이재환’ 선교사가 ‘검은색이 아름답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는 선교사로서의 고민과 갈등, 보람과 기쁨 등을 감동 깊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 중에 감동적인 한 부분을 소개합니다.
감비아 선교의 대 선배인 미국인 선교사 ‘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미국에서 농업대학을 졸업하고 23세의 나이로 감비아에 와서 옥수수, 수수, 콩, 땅콩, 조 등을 재배하는 법을 가르치면서 감비아 사람들을 가난에서 해방시키는 일을 했습니다. 그곳에서 ‘로라’ 선교사와 결혼하여 다섯 명의 딸을 감비아에서 낳아 감비아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신임 선교사들에게 항상 권면하는 말씀이 있는데
“좋은 선교사가 되려면 노새가 되십시오.”
라는 것입니다. 감비아에는 노새가 많은데, 평소에는 주민들의 교통수단이 되고 농사철에는 자기 몸통보다 몇 배나 크고 무거운 짐을 실은 수레를 묵묵히 끌고 다닙니다. 그런데 그 노새들이 밤이 되면 하루의 피곤함과 서러움이 몰려오듯 “끄윽, 끄윽, 큭,큭,큭”하며 슬프게 운답니다. 이처럼 선교사의 삶이란 주인을 위해 존재하는 노새처럼, 현지인들을 위해 그저 최선을 다해 헌신적으로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선교지의 사람들은 선교사들의 주머니에만 관심이 있지 정작 그가 전하려는 복음에는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톰 선교사가 감비아 주민들로부터 그렇게 속임을 당하면서도 여전히 그들을 믿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감비아를 향한 선교사의 뜨거운 사랑이며 섬김이었습니다.
사랑이 그를 미치게 만들고, 지치지 않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아무런 보상도 주어지지 않으며, 배신감만 느껴지는 현장에서 조차 노새처럼 섬기고 헌신할 수 있게 만든 것은 사랑의 힘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이렇게 실천해야 합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것이 그냥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 여기지 않고, 항상 빚진 자의 의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빚진 자로서 사는 사람에게는 자신을 나타낼 공로의식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4:7절에서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라고 했으며, 고린도후서11:30절에서는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더 많은 사랑을 빚진 사람들입니다. 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생각합시다. 따지지 말고, 헤아리지 말고, 주님처럼 그리고 우리 앞서 간 믿음의 선조들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빚진 자로서 사랑으로 행하며, 섬기는 삶을 삽시다. 그리하여 생활 속에서 기쁨이 충만하며, 주님의 증인으로서 깨어있는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