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우리가 진정 기뻐할 것은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6,577회 작성일 2004-10-12 21:44
* 우리가 진정 기뻐할 것은 / 합3:17-19, 고후4:16-18

*** 들어가는 말

현대어성경 / 고후 4:16-18
16  우리는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 겉사람은 시들어 가지만 우리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집니다. 17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과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니며 오래가지도 않습니다. 이 짧은 고통은 영원히 다함이 없는 영광을 가져올 것입니다. 18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눈에 보이는 어려움에는 눈길을 돌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아직은 보이지 않지만 하늘에 있는 기쁨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려움은 곧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생활에 즐거움이 있습니까? 산다는 것이 기쁘고 즐겁습니까? 아니면 ‘요즈음 같이 어려운 때에 기쁠 일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고 싶으십니까? 사실 여러 가지 여건과 환경으로 보면 웃을 일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리스도인들의 표정도 썩 밝지가 않습니다. 생각할 일이 많은 탓이겠지요. 세상이 다양해지면서 알아야 할 것도 많아지고, 적응해야 할 일도 늘어나면서 부담감이 많아진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지혜자 솔로몬은 전도서1:18절에서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기쁨이 줄어들고, 웃음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쁨’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생명이 점점 꺼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듯이 그리스도인의 특징 중에서도 뛰어난 것은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확신시켜 주신 것이 ‘기쁨’입니다. 요한복음16:24절에서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하셨으며, 22절에서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4:4절에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했으며, 모든 성도들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강조했습니다.

바로 이 ‘기쁨’은 영혼에서 우러나는 기쁨입니다. 즉 주님이 함께 하심으로 인한 기쁨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사라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 남아있는 기쁨마저도 세상적인 만족이나 성취감, 쾌락으로 인한 것이 대부분이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심령에 떨어져서 싹이 나고 자라지만 결실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시떨기 밭’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가시떨기 밭을 마가복음4:19절에서는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라고 설명하십니다. 즉 세상에 마음이 빼앗겨서 하나님께 대한 관심이 멀어졌기 때문에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도에서 사역하는 선교사가 어느 주일예배 때에 ‘주님의 고난’에 대한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가 한참 진행되고 있을 때에 앞자리에 있던 소녀가 흐느껴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녀는 힌두교를 믿다가 얼마 전에 예수님을 영접한 소녀였습니다. 소녀의 흐느낌은 설교가 끝나고서도 계속되었습니다.
예배 후, 선교사는 그 소녀에게 ‘무슨 좋지 않은 일이나 슬픈 일이라도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소녀는
“주님이 나를 위해서 그토록 심한 고난을 받았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참지 못하게 하여 우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소녀의 말을 들은 선교사는 깊이 생각했습니다. ‘왜 나에게는 이런 감격과 처음 믿던 신앙의 열과 체험이 마비되었을까?’ 그러면서 자신의 무감각해진 신앙과 마비된 신앙의 체험을 안타까워하면서 회개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은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감격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 읽었던 하박국 선지자를 통한 말씀과 사도 바울을 통한 말씀이 우리를 그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먼저, 본문 말씀의 배경을 봅시다.

하박국 선지자는 예레미야 선지자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하박국 선지자는 유다가 멸망당하기 전까지 활동했으며,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다가 멸망하여 포로로 잡혀가는 동안에도 계속적으로 활동했습니다. 이 선지자들이 활동하던 당시에 이미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한 후였으며, 남 유다도 멸망을 눈앞에 두고 있는 암담한 현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세상의 세력을 의지하던 유다 민족에게 하나님이 심판을 결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민족이 의지하던 당시의 강대국인 이집트를 신흥 세력인 바벨론을 통하여 짓밟게 하셨습니다. 결국 유다는 바벨론에 막대한 조공을 바쳐야 했고, 이로 인한 무거운 세금으로 백성들의 삶은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 두려움이 얼마나 컸는지는 본문 바로 앞의 16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징계의 막대기로 결정하신 바벨론의 군대를 기다리는 두려움을 표현한 것입니다. 바로 멸망을 눈앞에 두고 있는 현실에 대한 극심한 두려움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러한 현실에서 “여호와여!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이 소리 언제 들어주시렵니까?”(합1:2절)라고 호소합니다.

이 현실과 본문의 말씀이 어울립니까? 전혀 어울리지 않지요? 본문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소망하는 기쁨으로 충만해져 있음을 봅니다. 유다 민족이 당면한 현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현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으로 기뻐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십니다.

본문17, 18절을 봅시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17절에서 거론한 과일나무와 밭의 소출, 양과 소는 유목민인 유대인들의 생명이 달린 생업입니다. 본문의 표현대로 이러한 것이 없으면 당장 먹고 살 길이 암담합니다. 마치 농부가 많은 노력을 투자하여 한해 농사를 지었지만 아무 것도 수확하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수고한 인건비는 고사하고 투자한 재료비조차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차라리 농사 때문이라면 다음 해에라도 소망이 있지만, 유다 인들에게는 그 소망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로 주어지는 것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하여 징계 기간을 70년이라고 하셨습니다. 타국 땅에서 거의 종신형이나 다름없는 종살이를 해야 하는데 소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한숨만 나오고 정신이 아득할 뿐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현실에서 전혀 다른 기쁨과 소망을 노래합니다.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것을 두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11:1절의 믿음의 정의를 상기해 봅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내게 아무 것도 주지 않으실지라도 나는 오직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기뻐하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신앙이 가능합니까? 19절 말씀처럼 ‘하나님이 나의 힘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과 모든 삶을 주관하시는 주인 되심을 믿기 때문에 이런 기쁨이 가능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본문을 같이 읽어봅시다(현대어 성경으로).
16  우리는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 겉사람은 시들어 가지만 우리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집니다. 17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과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니며 오래가지도 않습니다. 이 짧은 고통은 영원히 다함이 없는 영광을 가져올 것입니다. 18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눈에 보이는 어려움에는 눈길을 돌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아직은 보이지 않지만 하늘에 있는 기쁨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려움은 곧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고린도교회가 당면한 현실은 성도들 간에 서로의 골이 깊이 파였었습니다. 그리고 세속화 되었던 일들과 지금도 괴롭히고 있는 거짓 교사들의 미혹이 신앙을 위태롭게 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성도들이 진실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만날 것입니다. 그러나 장차 이루어질 영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기에 사도 바울은 이길 수 있음을 강조하며 믿음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의 어려움은 그리 길지 않음을 말하며 위로하고 있습니다.

혼란스러운 세상에 시달리면서 살다보면 하나님을 잊고, 기쁨도 감사도 없이 메마른 삶을 살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날마다 새로워지는 기쁨과 감격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좋은 환경과 여건 속에서는 누구나 감사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기쁨은 눈물과 한숨이 나오는 환경 속에서도 오직 구원이시며 힘이 되시는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돈이 잘 벌리고, 사업이 잘 되고, 자녀들이 출세하고 평안하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구원이시고 나의 전부이신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18-19절을 다시 봅시다.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어떻게 이러한 현실에서 하나님 때문에 기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 때문입니다.
하박국2:3-4절을 봅시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습니다. 이는 세상이 아무리 악하여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녀들을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에 반드시 구원하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틀림없이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그 약속을 바라며 인내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였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세운 신상에 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잡혀왔습니다. 느부갓네살이 한 번 더 기회를 줄테니 지금이라도 절하면 살려주겠다고 했을 때 그들은 거절했습니다. 다니엘3:16-18절입니다.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이들이 죽음도 불사하고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믿고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소망하며 믿음으로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들보다는 지금 우리가 더 많은 약속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과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니며 오래가지도 않습니다. 이 짧은 고통은 영원히 다함이 없는 영광을 가져올 것입니다.” 라고 위로하며 격려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보다도 더 확실한 약속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에 있든지, 어떤 환경과 형편에 처하든지 주님은 함께 하시며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이 사실만 잊지 않는다면 비록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닥친다 할지라도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북한에서 사역하는 가조(架弔)선교사들(예랑선교회에서, 갈라디아 2장 20절 말씀처럼 살기위해 파송된 선교사들에게 架弔(가조) 라는 이름을 주어 사역을 감당케 한 것. 가조라는 말은 사도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말씀을 이루자는 의미이며, 그들은 이미 순교할 각오로 일하는 사람들임) 이 이렇게 사역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잘되고 형통하기만을 바라는 보상심리로 주님을 따르는 길에서 벗어납시다. 진실로 주님을 사랑하며, 나를 구원하시고,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합시다. 이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기뻐해야 할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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