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바라느냐?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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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4-10-12 21:41
*무엇을 바라느냐? / 요5:2-9상
*** 들어가는 말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나름대로의 소망이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소원이 없는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사람은 소망 속에서 사는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이 바라는 가장 큰 소원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동화 중에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라고 소개된 동화가 있습니다. 이 동화는 주인공인 엘리스가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신비로운 세계를 여행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동화에는 ‘체셔 캣’이라는 말재주가 좋고 꾀가 많은 고양이가 등장합니다.
엘리스는 이상한 나라에서 빠져나가는 길을 찾다가 갈림길에서 ‘체셔 캣’을 만납니다. 엘리스가 중얼거리듯 “어떤 길로 가야하나?”라고 묻자, 체셔 캣은 엘리스에게 “어디로 가는데?”라고 되묻습니다. 엘리스는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체셔 캣은 웃으면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 아무 데도 갈 수가 없어!”라고 대답합니다.
동화 속의 아이처럼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을 모르고,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면,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산다고 해도 단지 동물적인 생을 사는 것일 뿐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고, 무엇을 바라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하여 목적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욥은 원인을 알 수 없는 고난 속에서도 그 고난의 의미를 욥기23:10절에서 분명하게 고백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하나님께서도 우리 인생에게는 분명하게 정하신 길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잠언16:9절에서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했으며, 시편37:23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라고 하십니다. 이는 모든 인생에게는 반드시 자신만이 가야하는 길이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간의 말씀 본문에는 안타까운 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염없이 기다리며, 요행을 바라는 안타까운 삶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중에서도 가장 소망이 없는 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셔서 소원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적을 통하여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려고 하신 것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이 참으로 가장 절실하게 바라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1. 허무한 기대로 가득한 삶의 현장이 있습니다.
베데스다, 그곳에는 육신의 질병을 짊어진 수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기다리며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 ‘은혜의 집’이라는 의미가 있는데, 예루살렘 성의 양문(羊門) 곁에 있는 연못의 이름입니다. 이 연못은 길이가 100m 넓이가 60m쯤 되는 꽤 큰 직사각형의 연못입니다. 이 연못은 본래 빗물을 받아놓기 위한 저수지였는데, 그 바닥으로 간헐천이 흐르고 있어서 가금씩 뜨거운 온천수를 뿜어 올리곤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보고,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움직이는 것으로 생각한 듯 합니다. 그리고 그 물이 움직이고 있을 때에 가장 먼저 물 속에 들어가면 병이 낫는다는 소문이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이 베데스다는 주님 없이 살아가는 세상이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샘플입니다. 이 베데스다가 위치하고 있는 장소는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가까운 곳입니다. 양문(羊門)이란 성전에서 제사할 때 사용되는 제물용 양이 들어오는 문입니다. 이 양문으로 들어서면 곧 성전 뜰에 이르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성전이 가까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어쩌다가 한 번씩 일어나는 확실하지도 않은 연못의 요행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마치 병원을 옆에다 두고도 그 고통을 감내하며 요행을 기다리는 환자와 같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보시는 하나님의 탄식을 보십시오. 이사야1:4-6절을 봅시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 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온통 병들고, 삶은 고통스럽고, 환경은 어두워만 가는데 여전히 형식적인 예배의식에만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고 탄식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아뢰면 될 일을 제쳐두고, 허망하고도 아무 보장도 없는 베데스다 연못가에 모여서 요행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병자를 고치시고 이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헛된 기다림에만 빠져 있었습니다.
오늘도 이러한 현상은 여전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지만,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의 은혜를 아는 그리스도인들조차 이런 어리석음에 빠져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말씀을 통하여 수없이 ‘염려하지 말고 믿음으로 기도하라.’고 말씀하시지만, 성도들은 여전히 염려하며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도와달라고 주님께 손만 내밀면 되는데, 자신의 경험과 세상적인 재물과 권력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이사야2:22절에서는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라고 하시며, 시편146:3,4절에서는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라고 하십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이사야45:11절에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라. 또 내 아들들의 일과 내 손으로 한 일에 대하여 내게 부탁하라.”고 하십니다. 전기 시설이 다 갖추어진 방에서 어둡다고 탄식하며 앉아 있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잠시 일어서서 전등의 스위치만 켜면 밝아질 텐데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언제라도 기도한다면 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하나님을 외면하고, 확실하지도 않은 허무한 것을 기대하고, 바라고, 기다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2. 절실하게 주님을 바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고통의 현장에 오셨습니다. 진정으로 소망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고 허무한 것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병자들 중에서 단 한 사람, 38년 된 병자만을 만나셨습니다. 이 병자는 병 고침을 받을만한 믿음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예수님의 능력을 알고 믿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본문6,7절에서 예수님이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에 그 병자는 ‘물이 움직일 때에 넣어줄 사람이 없다.’고 딴 소리를 한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병의 원인이 자신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주신 후 성전에서 다시 만났을 때에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14절)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자신의 병을 고쳐준 사람이 ‘예수’라고 유대인들에게 고자질까지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셨겠습니까? 말씀에서는 그 이유를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19절 이하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시고 증거 하시기 위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가 ‘도움이 가장 절실한 사람’이었음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병자의 병이 오래 되었음을 아셨으며, 그를 도와줄 아무 사람이 없음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셨으며,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하셨습니다.
왜 도움이 가장 절실한 사람을 택하셨을까요?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힘이 있을 때에는 다른 것을 의지하려는 마음이 많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이루어보겠다는 교만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고치실 때마다 그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간절함이 있는지를 보셨습니다. 그리고는 ‘네 믿은 대로 되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간절한 마음을 찾고 계십니다. 잠언8:17절에서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고 하셨으며, 예레미야29:13절에서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야고보서5:17절에서는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라고 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38년 동안이나 중병으로 누워있다면 건강하게 되는 것을 바라고 또 바라지 않겠습니까? 38년 된 병자는 스스로는 잘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그래도 물에 들어갈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그곳에 누워 있었습니다. 이것이 간절함입니다. 주님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그는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고 자신의 소망을 피력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간절한 심정으로 하나님을 기대하고 소망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3. 소망을 이루시는 주님을 저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38년 된 병자는 자신의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병을 고침 받은 그날은 안식일이었고, 유대인들은 자리를 들고 다니는 것을 일이라 하여 금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병자가 고침을 받고 자신의 자리를 들고 가다가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고 유대인들에게 책망을 들었습니다. 병자는 자신의 병을 고쳐주신 분이 자리를 들고 가라고 해서 이렇게 했다고 변명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가 누구냐고 물었지만 병자였던 사람은 그분이 예수님인 줄 알지 못했습니다.
며칠이 지나서 병자가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깨어있어 죄를 멀리할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 병자였던 사람은 돌아서서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분이 ‘예수’라고 고자질을 했습니다. 이 병자였던 사람이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자신을 고쳐주신 주님을 저버렸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병자였던 사람에게 ‘더 심한 병이 생길 수 있음’을 분명히 경고하셨습니다. 오늘에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다시 세상으로 돌아서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베드로후서2:22절에서는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라고 했으며, 히브리서6:4-6절에서는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술로 유명한 이태리 밀라노의 한 성당에는 의미심장한 글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성당 입구의 문 오른편에는 장미 화환 조각이 있는데. 그 조각 밑에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은 모두 순간적인 것이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왼쪽에는 가시 십자가 조각이 있고 그 밑에는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은 모두 순간적인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문 위쪽에는 “영원한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이 땅의 즐거움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휴가는 금방 끝나며. 새 옷은 금방 닳아지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은 금방 녹아버립니다. 세상일에 매어 있다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만들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고린도후서6:1절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생명의 은혜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때까지 지켜가야 합니다.
세상의 허망한 것에 기대를 걸고 서성거리지 말고, 영원한 삶을 바라면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아룁시다.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기대하며 소망합시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대를 이루게 하시면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때까지 지켜가도록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도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찬양하는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나름대로의 소망이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소원이 없는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사람은 소망 속에서 사는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이 바라는 가장 큰 소원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동화 중에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라고 소개된 동화가 있습니다. 이 동화는 주인공인 엘리스가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신비로운 세계를 여행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동화에는 ‘체셔 캣’이라는 말재주가 좋고 꾀가 많은 고양이가 등장합니다.
엘리스는 이상한 나라에서 빠져나가는 길을 찾다가 갈림길에서 ‘체셔 캣’을 만납니다. 엘리스가 중얼거리듯 “어떤 길로 가야하나?”라고 묻자, 체셔 캣은 엘리스에게 “어디로 가는데?”라고 되묻습니다. 엘리스는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체셔 캣은 웃으면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 아무 데도 갈 수가 없어!”라고 대답합니다.
동화 속의 아이처럼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을 모르고,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면,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산다고 해도 단지 동물적인 생을 사는 것일 뿐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고, 무엇을 바라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하여 목적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욥은 원인을 알 수 없는 고난 속에서도 그 고난의 의미를 욥기23:10절에서 분명하게 고백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하나님께서도 우리 인생에게는 분명하게 정하신 길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잠언16:9절에서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했으며, 시편37:23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라고 하십니다. 이는 모든 인생에게는 반드시 자신만이 가야하는 길이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간의 말씀 본문에는 안타까운 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염없이 기다리며, 요행을 바라는 안타까운 삶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중에서도 가장 소망이 없는 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셔서 소원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적을 통하여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려고 하신 것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이 참으로 가장 절실하게 바라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1. 허무한 기대로 가득한 삶의 현장이 있습니다.
베데스다, 그곳에는 육신의 질병을 짊어진 수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기다리며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 ‘은혜의 집’이라는 의미가 있는데, 예루살렘 성의 양문(羊門) 곁에 있는 연못의 이름입니다. 이 연못은 길이가 100m 넓이가 60m쯤 되는 꽤 큰 직사각형의 연못입니다. 이 연못은 본래 빗물을 받아놓기 위한 저수지였는데, 그 바닥으로 간헐천이 흐르고 있어서 가금씩 뜨거운 온천수를 뿜어 올리곤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보고,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움직이는 것으로 생각한 듯 합니다. 그리고 그 물이 움직이고 있을 때에 가장 먼저 물 속에 들어가면 병이 낫는다는 소문이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이 베데스다는 주님 없이 살아가는 세상이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샘플입니다. 이 베데스다가 위치하고 있는 장소는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가까운 곳입니다. 양문(羊門)이란 성전에서 제사할 때 사용되는 제물용 양이 들어오는 문입니다. 이 양문으로 들어서면 곧 성전 뜰에 이르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성전이 가까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어쩌다가 한 번씩 일어나는 확실하지도 않은 연못의 요행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마치 병원을 옆에다 두고도 그 고통을 감내하며 요행을 기다리는 환자와 같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보시는 하나님의 탄식을 보십시오. 이사야1:4-6절을 봅시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 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온통 병들고, 삶은 고통스럽고, 환경은 어두워만 가는데 여전히 형식적인 예배의식에만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고 탄식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아뢰면 될 일을 제쳐두고, 허망하고도 아무 보장도 없는 베데스다 연못가에 모여서 요행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병자를 고치시고 이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헛된 기다림에만 빠져 있었습니다.
오늘도 이러한 현상은 여전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지만,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의 은혜를 아는 그리스도인들조차 이런 어리석음에 빠져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말씀을 통하여 수없이 ‘염려하지 말고 믿음으로 기도하라.’고 말씀하시지만, 성도들은 여전히 염려하며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도와달라고 주님께 손만 내밀면 되는데, 자신의 경험과 세상적인 재물과 권력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이사야2:22절에서는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라고 하시며, 시편146:3,4절에서는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라고 하십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이사야45:11절에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라. 또 내 아들들의 일과 내 손으로 한 일에 대하여 내게 부탁하라.”고 하십니다. 전기 시설이 다 갖추어진 방에서 어둡다고 탄식하며 앉아 있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잠시 일어서서 전등의 스위치만 켜면 밝아질 텐데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언제라도 기도한다면 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하나님을 외면하고, 확실하지도 않은 허무한 것을 기대하고, 바라고, 기다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2. 절실하게 주님을 바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고통의 현장에 오셨습니다. 진정으로 소망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고 허무한 것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병자들 중에서 단 한 사람, 38년 된 병자만을 만나셨습니다. 이 병자는 병 고침을 받을만한 믿음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예수님의 능력을 알고 믿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본문6,7절에서 예수님이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에 그 병자는 ‘물이 움직일 때에 넣어줄 사람이 없다.’고 딴 소리를 한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병의 원인이 자신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주신 후 성전에서 다시 만났을 때에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14절)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자신의 병을 고쳐준 사람이 ‘예수’라고 유대인들에게 고자질까지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셨겠습니까? 말씀에서는 그 이유를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19절 이하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시고 증거 하시기 위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가 ‘도움이 가장 절실한 사람’이었음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병자의 병이 오래 되었음을 아셨으며, 그를 도와줄 아무 사람이 없음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셨으며,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하셨습니다.
왜 도움이 가장 절실한 사람을 택하셨을까요?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힘이 있을 때에는 다른 것을 의지하려는 마음이 많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이루어보겠다는 교만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고치실 때마다 그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간절함이 있는지를 보셨습니다. 그리고는 ‘네 믿은 대로 되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간절한 마음을 찾고 계십니다. 잠언8:17절에서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고 하셨으며, 예레미야29:13절에서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야고보서5:17절에서는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라고 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38년 동안이나 중병으로 누워있다면 건강하게 되는 것을 바라고 또 바라지 않겠습니까? 38년 된 병자는 스스로는 잘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그래도 물에 들어갈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그곳에 누워 있었습니다. 이것이 간절함입니다. 주님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그는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고 자신의 소망을 피력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간절한 심정으로 하나님을 기대하고 소망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3. 소망을 이루시는 주님을 저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38년 된 병자는 자신의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병을 고침 받은 그날은 안식일이었고, 유대인들은 자리를 들고 다니는 것을 일이라 하여 금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병자가 고침을 받고 자신의 자리를 들고 가다가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고 유대인들에게 책망을 들었습니다. 병자는 자신의 병을 고쳐주신 분이 자리를 들고 가라고 해서 이렇게 했다고 변명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가 누구냐고 물었지만 병자였던 사람은 그분이 예수님인 줄 알지 못했습니다.
며칠이 지나서 병자가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깨어있어 죄를 멀리할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 병자였던 사람은 돌아서서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분이 ‘예수’라고 고자질을 했습니다. 이 병자였던 사람이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자신을 고쳐주신 주님을 저버렸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병자였던 사람에게 ‘더 심한 병이 생길 수 있음’을 분명히 경고하셨습니다. 오늘에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다시 세상으로 돌아서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베드로후서2:22절에서는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라고 했으며, 히브리서6:4-6절에서는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술로 유명한 이태리 밀라노의 한 성당에는 의미심장한 글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성당 입구의 문 오른편에는 장미 화환 조각이 있는데. 그 조각 밑에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은 모두 순간적인 것이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왼쪽에는 가시 십자가 조각이 있고 그 밑에는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은 모두 순간적인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문 위쪽에는 “영원한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이 땅의 즐거움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휴가는 금방 끝나며. 새 옷은 금방 닳아지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은 금방 녹아버립니다. 세상일에 매어 있다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만들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고린도후서6:1절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생명의 은혜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때까지 지켜가야 합니다.
세상의 허망한 것에 기대를 걸고 서성거리지 말고, 영원한 삶을 바라면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아룁시다.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기대하며 소망합시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대를 이루게 하시면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때까지 지켜가도록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도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찬양하는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