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된 사람들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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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4-10-12 21:33
* 충성된 사람들 / 딤후2:1-13
*** 들어가는 말
10주년을 맞이하는 저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시는 내용입니다. 특히 본문 마지막 부분인 11-13절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면서 주님의 부탁하시는 말씀을 상고하고자 합니다. (공동번역)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끝까지 참고 견디면 그분과 함께 다스리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이다. 우리는 진실하지 못해도 그분은 언제나 진실하시니 약속을 어길 줄 모르시는 분이시다.” 이것은 믿을 만한 말씀입니다.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말씀에 근거한 격려의 말씀입니다. 즉 끝까지 견디며 믿음을 지키는 충성된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나라에서의 영광된 삶의 약속입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께서는 일할 일군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사명을 맡기셔서 일을 감당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열두 제자를 택하셔서 사도의 직무를 맡기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칠십 명의 제자들을 뽑으셔서 전도의 직무를 맡기셨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일곱 명의 신실한 성도를 안수하여 세워서 구제의 일과 섬김의 일을 위한 집사의 직무를 하게 하셨습니다. 사도들은 말씀 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일에 전념했으며, 집사들은 구제와 섬김과 전도하는 일을 담당했습니다. 이렇게 각자의 일에 생명을 다하여 헌신하며 충성했을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교회가 부흥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포함하는 디모데 서신의 수신자가 사도 바울의 제자이자 에베소 교회의 목회자였던 디모데입니다. 디모데 역시 실라와 마가, 에바브로디도, 아굴라 등과 함께 초대교회의 사역자로 세움 받은 일군이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려고 “충성된 사람들”을 선택하시고 사명을 맡기십니다. 그 중에 우리 대복교회가 있으며 저와 여러분들이 이 시대의 충성된 사람들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중요한 것은 ‘추수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많지만 일군은 적습니다. 더욱이 충성된 일군은 더 적습니다. 왜냐하면 불법이 성행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지고, 믿음보다는 불신이 많아짐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마음이 닫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때를 말씀하시는 마태복음24장에서 예수님은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12절)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육신의 욕망을 좇고, 쾌락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때에 ‘충성된 일군’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은 분명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주님의 일군으로 부름 받은 것이 행복하지 않으십니까? 본문의 내용을 중심으로, 충성된 사람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살펴봅시다.
1. 충성된 사람은 예수님의 좋은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3-4절을 봅시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충성된 사람을 왜 하필이면 ‘군인’에 비유했겠습니까? 군대를 다녀온 분들은 그 의미를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군인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형편과 상황, 자신의 생각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이 받은 명령대로 행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몸이 불편하다고, 고난이 있다고, 위험하다고, 싸우다가 집으로 갈 수는 없습니다. 비록 싸우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싸워야 하며, 생명을 다하여 명령을 수행해야 합니다. 이것이 군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good a soldier)로 부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의 특징은 ‘헌신된 사람’입니다. 즉 세상의 일에 매여 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가장 가치 있고, 보람 있고, 소망이 있는 영의 삶을 중심으로 살며, 예수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복종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헌신된 사람이며 충성된 사람입니다. 갈라디아서2:20절에서 사도 바울이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복음송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그런데 그리스도의 군인으로서 주의해야 할 마음자세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쁨으로 감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병역이 국민의 의무사항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내키지 않지만 오로지 의무감에 매여서 일하며, 제대할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의무감에 매이게 되면 창조력도 , 생동력도 없습니다. 요나 선지자처럼 불평불만이 많아지고, 마지못해서 흉내만 내게 될 때가 많습니다. 혹 우리의 신앙이 이런 의무감처럼 무감동하고 소신도 없는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신앙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항상 기뻐하며, 감사하기를 잊지 말라고 거듭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식당 아르바이트를 하던 ‘스테이시 가델라’라는 여대생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접시 하나를 닦아도 물기 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이 닦았습니다. 그 자세가 사장의 눈에 띄어 정식직원으로 채용 되었고, 불과 5년 만에 본사의 마케팅이사가 되었습니다. 그 회사는 미국 외식업계 4위인 “아웃백 스테이크 하우스”였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체인점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에버랜드에서 티켓을 파는 평범한 여직원으로 입사한 ‘이은혜’라는 신입사원이 있었습니다. 이 여직원은 공원입구에서 신발이 눈에 젖어서 발을 동동거리는 아이에게 자기 신을 벗어줄 정도로 서비스에 투철했습니다. 그래서 입사 4년 만에 ‘서비스 아카데미 강사’로 전격 발탁되었습니다.
리츠칼튼호텔에서 날마다 방을 정리하는 한 여자청소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침대보를 접는 방식을 개선하는 방법이 없을까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 여자청소부가 고안해낸 편리한 방법으로 관리 비용까지 상당히 절감하게 되어 회사에 유익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말콤 볼드리지 생산성 대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충성된 사람들은 자신의 일을 즐겁게 감당할 뿐만 아니라, 더욱 발전시켜 나가는 성실한 사람들입니다. 즉 일을 시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일을 찾으며, 주인을 유익하게 하고 주인의 뜻에 합당한 헌신적인 삶을 가꾸어 갑니다. 창세기39장 이하에 나오는 요셉의 이야기를 아시지요. 요셉은 형제들의 미움을 사서 억울하게 노예로 팔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성실하게 행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의 마음에 들었으며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인인 보디발 장군 부인의 유혹을 뿌리쳤다가 미움을 사서 노예보다 더욱 혹독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요셉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성실하게 행했으며, 전 감옥을 맡아 관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결국은 그의 하나님을 경외하여 성실하게 행한 일이 열매를 맺어 대국인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최선을 다하는 이런 사람이 충성된 사람이며, 헌신된 사람이며, 좋은 군사입니다.
2. 충성된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일해야 합니다.
본문5절입니다.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라고 합니다. 본문에서의 ‘법’은 ‘경기의 규칙’을 말합니다. 너무도 당연한 말입니다. 경기의 규칙을 무시하게 되면 그 경기는 인정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따라야 할 어떤 규칙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규정하는 규칙은 곧 하나님의 뜻입니다. 본문을 지나서 20-21절을 봅시다. (공동번역)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그릇뿐만 아니라 나무그릇과 질그릇도 있어서 어떤 것은 귀하게 쓰이고 또 어떤 것은 천하게 쓰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귀하게 쓰이는 그릇이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주인에게 쓸모 있는 그릇으로 바쳐져서 모든 좋은 일에 쓰입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은 ‘스스로 깨끗케 하는 사람’ 즉 ‘거룩하고 온전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레위기19:2절에서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5:48절에서 예수님은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7:21절에서 더 상세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에는 당연히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어떤 큰일을 이루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고 하나님의 뜻을 어긴다면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당연히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는 ‘내 생각’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 마태복음7:22절에서 하시는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심판 때에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의를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계획으로 주님의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주님의 이름으로 위대한 일을 했을지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일이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3. 충성된 사람에게는 보상이 있습니다.
본문11-12절입니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에로의 부활과 영광의 자리에 대한 약속입니다. 이는 전적으로 헌신하고 충성된 일군에 대한 보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곳에서 충성된 사람들에 대한 보상을 약속하셨습니다. 대표적으로 히브리서11:6절에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10:41-42절에서는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보상은 내세, 즉 하나님의 나라에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육신으로 살 때에도 보상은 주어집니다. 마가복음10:29-30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즉 헌신되고 충성된 사람에게 주시는 보상을, 이 땅에서의 삶에서 ‘백배’라고 하셨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충만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단서가 있습니다. 이 땅에서는 역시 핍박이 따른다고 하셨습니다. 로마서8:17-18절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고난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표시가 되며, 더 큰 영광을 얻게 하기 위한 길입니다. 그래서 본문3절에서 사도 바울은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라고 합니다. 초대교회 당시, 로마의 박해가 심할 때의 순교사화에서는 성도들이 자신도 그리스도인임을 당당하게 밝히고 죽음을 향하여 나아갔다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힘들고 어려웠던 개척교회의 시절을 잘 견뎌오셨습니다. 여러분이 행한 대로 하나님께서 갚아주시리라 확신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더욱 하나님으로부터 충성된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힘을 모으고 한 마음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갑시다. 그리하여 이 세대에 대복교회가 하나님의 뜻에 깨어있는 교회,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사랑으로 행하는 교회로써 주님이 오실 때까지 빛의 사명을 다하는 신실한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10주년을 맞이하는 저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시는 내용입니다. 특히 본문 마지막 부분인 11-13절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면서 주님의 부탁하시는 말씀을 상고하고자 합니다. (공동번역)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끝까지 참고 견디면 그분과 함께 다스리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이다. 우리는 진실하지 못해도 그분은 언제나 진실하시니 약속을 어길 줄 모르시는 분이시다.” 이것은 믿을 만한 말씀입니다.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말씀에 근거한 격려의 말씀입니다. 즉 끝까지 견디며 믿음을 지키는 충성된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나라에서의 영광된 삶의 약속입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께서는 일할 일군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사명을 맡기셔서 일을 감당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열두 제자를 택하셔서 사도의 직무를 맡기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칠십 명의 제자들을 뽑으셔서 전도의 직무를 맡기셨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일곱 명의 신실한 성도를 안수하여 세워서 구제의 일과 섬김의 일을 위한 집사의 직무를 하게 하셨습니다. 사도들은 말씀 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일에 전념했으며, 집사들은 구제와 섬김과 전도하는 일을 담당했습니다. 이렇게 각자의 일에 생명을 다하여 헌신하며 충성했을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교회가 부흥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포함하는 디모데 서신의 수신자가 사도 바울의 제자이자 에베소 교회의 목회자였던 디모데입니다. 디모데 역시 실라와 마가, 에바브로디도, 아굴라 등과 함께 초대교회의 사역자로 세움 받은 일군이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려고 “충성된 사람들”을 선택하시고 사명을 맡기십니다. 그 중에 우리 대복교회가 있으며 저와 여러분들이 이 시대의 충성된 사람들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중요한 것은 ‘추수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많지만 일군은 적습니다. 더욱이 충성된 일군은 더 적습니다. 왜냐하면 불법이 성행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지고, 믿음보다는 불신이 많아짐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마음이 닫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때를 말씀하시는 마태복음24장에서 예수님은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12절)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육신의 욕망을 좇고, 쾌락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때에 ‘충성된 일군’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은 분명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주님의 일군으로 부름 받은 것이 행복하지 않으십니까? 본문의 내용을 중심으로, 충성된 사람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살펴봅시다.
1. 충성된 사람은 예수님의 좋은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3-4절을 봅시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충성된 사람을 왜 하필이면 ‘군인’에 비유했겠습니까? 군대를 다녀온 분들은 그 의미를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군인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형편과 상황, 자신의 생각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이 받은 명령대로 행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몸이 불편하다고, 고난이 있다고, 위험하다고, 싸우다가 집으로 갈 수는 없습니다. 비록 싸우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싸워야 하며, 생명을 다하여 명령을 수행해야 합니다. 이것이 군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good a soldier)로 부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의 특징은 ‘헌신된 사람’입니다. 즉 세상의 일에 매여 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가장 가치 있고, 보람 있고, 소망이 있는 영의 삶을 중심으로 살며, 예수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복종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헌신된 사람이며 충성된 사람입니다. 갈라디아서2:20절에서 사도 바울이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복음송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그런데 그리스도의 군인으로서 주의해야 할 마음자세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쁨으로 감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병역이 국민의 의무사항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내키지 않지만 오로지 의무감에 매여서 일하며, 제대할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의무감에 매이게 되면 창조력도 , 생동력도 없습니다. 요나 선지자처럼 불평불만이 많아지고, 마지못해서 흉내만 내게 될 때가 많습니다. 혹 우리의 신앙이 이런 의무감처럼 무감동하고 소신도 없는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신앙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항상 기뻐하며, 감사하기를 잊지 말라고 거듭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식당 아르바이트를 하던 ‘스테이시 가델라’라는 여대생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접시 하나를 닦아도 물기 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이 닦았습니다. 그 자세가 사장의 눈에 띄어 정식직원으로 채용 되었고, 불과 5년 만에 본사의 마케팅이사가 되었습니다. 그 회사는 미국 외식업계 4위인 “아웃백 스테이크 하우스”였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체인점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에버랜드에서 티켓을 파는 평범한 여직원으로 입사한 ‘이은혜’라는 신입사원이 있었습니다. 이 여직원은 공원입구에서 신발이 눈에 젖어서 발을 동동거리는 아이에게 자기 신을 벗어줄 정도로 서비스에 투철했습니다. 그래서 입사 4년 만에 ‘서비스 아카데미 강사’로 전격 발탁되었습니다.
리츠칼튼호텔에서 날마다 방을 정리하는 한 여자청소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침대보를 접는 방식을 개선하는 방법이 없을까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 여자청소부가 고안해낸 편리한 방법으로 관리 비용까지 상당히 절감하게 되어 회사에 유익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말콤 볼드리지 생산성 대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충성된 사람들은 자신의 일을 즐겁게 감당할 뿐만 아니라, 더욱 발전시켜 나가는 성실한 사람들입니다. 즉 일을 시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일을 찾으며, 주인을 유익하게 하고 주인의 뜻에 합당한 헌신적인 삶을 가꾸어 갑니다. 창세기39장 이하에 나오는 요셉의 이야기를 아시지요. 요셉은 형제들의 미움을 사서 억울하게 노예로 팔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성실하게 행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의 마음에 들었으며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인인 보디발 장군 부인의 유혹을 뿌리쳤다가 미움을 사서 노예보다 더욱 혹독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요셉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성실하게 행했으며, 전 감옥을 맡아 관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결국은 그의 하나님을 경외하여 성실하게 행한 일이 열매를 맺어 대국인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최선을 다하는 이런 사람이 충성된 사람이며, 헌신된 사람이며, 좋은 군사입니다.
2. 충성된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일해야 합니다.
본문5절입니다.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라고 합니다. 본문에서의 ‘법’은 ‘경기의 규칙’을 말합니다. 너무도 당연한 말입니다. 경기의 규칙을 무시하게 되면 그 경기는 인정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따라야 할 어떤 규칙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규정하는 규칙은 곧 하나님의 뜻입니다. 본문을 지나서 20-21절을 봅시다. (공동번역)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그릇뿐만 아니라 나무그릇과 질그릇도 있어서 어떤 것은 귀하게 쓰이고 또 어떤 것은 천하게 쓰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귀하게 쓰이는 그릇이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주인에게 쓸모 있는 그릇으로 바쳐져서 모든 좋은 일에 쓰입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은 ‘스스로 깨끗케 하는 사람’ 즉 ‘거룩하고 온전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레위기19:2절에서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5:48절에서 예수님은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7:21절에서 더 상세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에는 당연히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어떤 큰일을 이루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고 하나님의 뜻을 어긴다면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당연히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는 ‘내 생각’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 마태복음7:22절에서 하시는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심판 때에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의를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계획으로 주님의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주님의 이름으로 위대한 일을 했을지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일이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3. 충성된 사람에게는 보상이 있습니다.
본문11-12절입니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에로의 부활과 영광의 자리에 대한 약속입니다. 이는 전적으로 헌신하고 충성된 일군에 대한 보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곳에서 충성된 사람들에 대한 보상을 약속하셨습니다. 대표적으로 히브리서11:6절에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10:41-42절에서는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보상은 내세, 즉 하나님의 나라에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육신으로 살 때에도 보상은 주어집니다. 마가복음10:29-30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즉 헌신되고 충성된 사람에게 주시는 보상을, 이 땅에서의 삶에서 ‘백배’라고 하셨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충만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단서가 있습니다. 이 땅에서는 역시 핍박이 따른다고 하셨습니다. 로마서8:17-18절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고난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표시가 되며, 더 큰 영광을 얻게 하기 위한 길입니다. 그래서 본문3절에서 사도 바울은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라고 합니다. 초대교회 당시, 로마의 박해가 심할 때의 순교사화에서는 성도들이 자신도 그리스도인임을 당당하게 밝히고 죽음을 향하여 나아갔다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힘들고 어려웠던 개척교회의 시절을 잘 견뎌오셨습니다. 여러분이 행한 대로 하나님께서 갚아주시리라 확신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더욱 하나님으로부터 충성된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힘을 모으고 한 마음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갑시다. 그리하여 이 세대에 대복교회가 하나님의 뜻에 깨어있는 교회,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사랑으로 행하는 교회로써 주님이 오실 때까지 빛의 사명을 다하는 신실한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