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좇는 사람들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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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4-08-28 14:39
♡♥♡ 믿음을 좇는 사람들 / 히11:1-12
*** 들어가는 말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하여 가르치시면서 누가복음18:1절 이하에서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하셨습니다. 억울한 사정이 있는 과부가 그 도시의 재판관에게 찾아가서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살펴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그 재판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사람을 무시하는 불의한 재판관이어서 힘이 없는 과부의 호소를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과부는 매일 찾아가서 사정을 살펴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재판관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하시면서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기도가 중요하지만 그보다 앞서서 해결해야 할 문제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6절에서는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하십니다. 믿음이 없는 어떤 행위도 하나님 앞에는 아무 효력도 나타내지 못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중요하지만 그 믿음의 방향이 더더욱 중요합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 남북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노예 해방을 위한 전쟁이니 만큼 의미가 큰 것이었지만, 어쨌든 동족끼리 서로 총을 쏘고 죽였습니다. 남쪽의 사람이든 북쪽의 사람이든 모두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전쟁 중에도 양편이 모두 찬송을 부르며 기도했습니다. 간단히 끝날 줄 알았던 전쟁은 7년이라는 긴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희생자가 생겼습니다. 대통령의 참모들이 고민에 빠졌습니다. 마침내 한 참모가 대통령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런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편에 계시다면 참 좋겠는데요. 그것을 도무지 알 수가 없군요.”
대통령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 나는 하나님께서 내편에 계신지 안계신지 의심해본 일이 없네. 내 관심은 오직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지, 내가 정말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지, 그것뿐이네.”
링컨 대통령의 믿음을 보십시오. 믿음의 관점이 바르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세상은 자신의 생각을 중심에 두고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사상들을 저울질합니다. 오늘의 많은 사람들은 ‘믿음’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세상의 사업가들도, 설교자들도 외칩니다. “내 말을 믿기만 하라. 그러면 승리할 것이다. 믿음을 가지기만 하라. 구원을 얻을 것이다.”라고 외칩니다. 마치 ‘믿음’이 만사형통케 하는 신비한 주문이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사람들은 믿음 그 자체가 어떤 신비한 힘이 있어서 자신이 바라는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는 충분히 믿기만 한다면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그 꿈을 실현시켜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은 믿음의 대상이 너무 적절하지 못하며, 믿음의 방향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세상에는 자신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모두 참 진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이나 삶이 가장 옳다고 믿고 있습니다. 마치 옛 과학자들이 ‘천동설’을 주장한 것처럼 말입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모든 별과 하늘은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진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지동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정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경우를 ‘교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무엇인가?’ 또는 믿음이 어떤 가치를 가지기 위해서는 최소한 ‘그 믿음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이 시간에는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하는 올바른 믿음에 대하여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믿음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믿음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지금까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그 믿음이 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까?
일본의 신앙의 거장인 우찌무라 간조의 일화입니다.
일본에 큰 가뭄이 들었습니다. 몇 달을 두고 비가 오지 않자 이대로 가다가는 농사를 다 망치겠다고 사람들은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었습니다. 한쪽에서는 기우제를 지낸다 굿을 한다 하고 난리였습니다. 어느 날 아침, 우찌무라 간조는 아이들과 함께 식사기도를 하면서
“하나님, 비를 주십시오. 땅이 너무 메말라 갑니다. 오늘 꼭 비를 주실 줄로 굳게 믿습니다.”
하고 기도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아이들이 학교 갈 채비를 합니다. 그런데 소학교 6학년인 큰 아이는 아무 소리 없는데, 3학년인 작은아이가 난데없이 우산을 찾습니다. “아버지, 우산!” 그러자 우찌무라 간조는 어리둥절해 하면서 “맑은 하늘에 우산은 왜 찾느냐?”라고 합니다. 그러자 작은아이는
“아버지, 아까 기도하실 때에 오늘 비 주실 것으로 믿는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우산을 가지고 가야지요!”
라고 합니다. 우찌무라 간조는 무엇에 맞은 것처럼 ‘나의 믿음은 전부 거짓이다. 저 아이의 믿음이야말로 참 믿음이다.’라고 하면서 회개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아이 보기가 부끄러울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마태복음8:5-10절의 내용을 봅시다. 가버나움의 한 백부장이 중풍 병으로 고생하는 자신의 하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간청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가서 고쳐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주님께서는 신기하게 여기시며 이 믿음을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바로 이 백부장의 믿음이 “바라는 것의 실상”입니다. 즉 백부장은 시공을 초월하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던 것입니다. 백부장의 믿음의 실상은 능력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이런 믿음은 지금 세대에도 찾아보기가 힘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믿을만한 다른 보조 수단을 찾습니다. 즉 안수하거나, 기름을 붓거나, 적어도 가까이 가서 기도라도 해 주신다면 병이 더 쉽게 치유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들은 사람들의 자기신념입니다. 사람들이 우상에게 비는 것도 이와 같은 자기신념의 산물입니다.
믿음은 결코 사람의 신념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당연히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백부장은 바로 이 믿음의 원리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 자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한 마디가 시공을 초월함을 믿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분명히 위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유익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진리에 근거를 둔 믿음이어야 합니다.
2. 믿음의 대상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사람 각자의 신념과 세상적인 믿음을 필요로 합니다. 버스를 타거나, 운전을 하거나, 걷는 것이나, 심지어 음식을 먹을 때에도 신념이나 믿음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만일 내가 탈 버스가 사고가 날 것이라고 의심을 한다면 아마 타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음식에 독을 넣었을 것이라고 의심이 된다면 먹지 않겠지요. 세상의 모든 일에는 나름대로의 신념과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믿음을 오구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믿음은 그 대상이 세상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그 대상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호주에서 사역하던 선교사가 어떤 일을 계획하면서 2000만원 정도의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일주일동안 편지 50여 통을 쓰고 국제전화도 하고 온갖 궁리를 다해서 계산해 보았지만 삼백만원 정도 밖에 나올 것 같지 않았습니다. 물론 기도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없어서 그 계획을 취소하는 방향으로 마음이 기울어져 갔습니다. 그러다보니 초조감과 좌절감 패배의식 같은 것으로 영적 저기압 상태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본 그의 부인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그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시나요?” 선교사가 “그렇다.”고 했더니, “그러면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면 들으신다는 것도 확신하시는지요?” 이 물음에 ‘너는 정말 나를 믿느냐?’라고 번개처럼 스치는 주님의 책망이 있었습니다. 선교사는 사실 하나님 보다 그 많은 후원자들을 믿었던 자신을 회개하고 다시 믿음의 기도를 통하여 응답을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선교사처럼 잘못된 대상을 향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참 믿음과 거짓 믿음의 차이는 믿음의 대상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앞서 잠간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신약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병자들이 치유 받는 과정을 보면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고백이 들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9:23절에서,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아들을 고치러 온 사람을 향하여,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의 ‘믿는 자’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인의 힘과 능력이 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진정한 믿음은 근심하거나 염려하거나 의심하지 않습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 야고보서1:6-8절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3. 참 믿음은 곧 생활입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장식품이나 생활을 좀더 윤기 있게 해 주는 윤활유나 자신의 소원을 위해 필요한 요술방망이가 아닙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그 자체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바라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셨는데, ‘실상’과 ‘증거’는 현존하는 사람의 삶을 말합니다. 본문의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그리고 11장 전체가 그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산 위에서 만드는 거대한 배,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출발하는 이삿짐, 폐경기가 지나 임신이 불가능한 상황에서의 잉태의 약속. 이런 것들이 가능하게 여겨집니까? 이러한 불가능을 믿는 믿음은 생활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모든 일을 주님께 의지하는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대상이 확실히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고, 그 믿음의 분량이 큰 것이라 할지라도, 실생활에서 활용되지 못하는 추상적인 것이라면 그 믿음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생활 속에서 활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믿음의 중요성에 대하여 이론적인 설명으로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생활 속에서 믿음으로 체험할 수 있는 엄청난 복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기초가 되는 믿음으로 인한 복이 ‘영적 생명’입니다. 곧 요한복음5:24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는 약속이 그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영적 생명’은 ‘더욱 풍성한 삶’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10:10절에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마가복음11:22,23절에서는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를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삶에서 나타나는 능력을 말씀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진실한 믿음의 실상입니다.
문제는 두려움과 의심, 세상적인 믿음과 신념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우리 마음에 쌓여있으면 우리의 생활이 혼란스럽게 됩니다. 세상적인 가치관과 영적인 가치관이 섞여서 생활을 혼란스럽게 하고 삶을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나이아가라 폭포 상류에 가면 뱃놀이를 할 수 있는 호수와 같은 큰 강이 있다고 합니다. 물론 이 강은 계속해서 나이아가라 폭포로 흐르는 물입니다. 여기서는 노를 젓지 않아도 보트가 하류로 흘러 내려갑니다. 그런데, 어느 지점까지 내려오면 빨간 줄이 처져있으며 위험에 대한 제 1 경고문이 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위험하니 되돌아가라는 것이므로, 노를 저어서 상류로 올라가야 합니다. 제 1 경고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제 2 경고가 있고, 여기서부터는 되돌아가기가 조금 더 어려움을 알려 줍니다. 마지막 세 번째 경고에서는, 이 경계선을 넘어가면 아무리 노를 저어도 상류로 올라가지 못하는 지점이며, 그대로 폭포인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위험한 지점임을 알립니다.
우리 인생의 삶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에서 조금씩 벗어날 때마다 생활 속에서 경고를 하십니다. 가정생활, 자녀문제, 물질의 문제, 육신의 건강 등등. 경고 등이 켜질 때는 멈추어 서서 자신의 믿음의 생활을 돌아보십시오. 지금 머물러 있는 믿음의 자리가 어떠한지 살펴보십시오. 계속 무시하고 나아간다면 기다리는 것은 패망뿐입니다. 미루지 마시고 지금 영적 건강의 척도인 믿음을 점검하셔서 후회를 남기지 않는 신실한 삶을 이루어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하여 가르치시면서 누가복음18:1절 이하에서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하셨습니다. 억울한 사정이 있는 과부가 그 도시의 재판관에게 찾아가서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살펴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그 재판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사람을 무시하는 불의한 재판관이어서 힘이 없는 과부의 호소를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과부는 매일 찾아가서 사정을 살펴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재판관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하시면서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기도가 중요하지만 그보다 앞서서 해결해야 할 문제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6절에서는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하십니다. 믿음이 없는 어떤 행위도 하나님 앞에는 아무 효력도 나타내지 못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중요하지만 그 믿음의 방향이 더더욱 중요합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 남북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노예 해방을 위한 전쟁이니 만큼 의미가 큰 것이었지만, 어쨌든 동족끼리 서로 총을 쏘고 죽였습니다. 남쪽의 사람이든 북쪽의 사람이든 모두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전쟁 중에도 양편이 모두 찬송을 부르며 기도했습니다. 간단히 끝날 줄 알았던 전쟁은 7년이라는 긴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희생자가 생겼습니다. 대통령의 참모들이 고민에 빠졌습니다. 마침내 한 참모가 대통령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런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편에 계시다면 참 좋겠는데요. 그것을 도무지 알 수가 없군요.”
대통령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 나는 하나님께서 내편에 계신지 안계신지 의심해본 일이 없네. 내 관심은 오직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지, 내가 정말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지, 그것뿐이네.”
링컨 대통령의 믿음을 보십시오. 믿음의 관점이 바르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세상은 자신의 생각을 중심에 두고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사상들을 저울질합니다. 오늘의 많은 사람들은 ‘믿음’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세상의 사업가들도, 설교자들도 외칩니다. “내 말을 믿기만 하라. 그러면 승리할 것이다. 믿음을 가지기만 하라. 구원을 얻을 것이다.”라고 외칩니다. 마치 ‘믿음’이 만사형통케 하는 신비한 주문이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사람들은 믿음 그 자체가 어떤 신비한 힘이 있어서 자신이 바라는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는 충분히 믿기만 한다면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그 꿈을 실현시켜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은 믿음의 대상이 너무 적절하지 못하며, 믿음의 방향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세상에는 자신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모두 참 진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이나 삶이 가장 옳다고 믿고 있습니다. 마치 옛 과학자들이 ‘천동설’을 주장한 것처럼 말입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모든 별과 하늘은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진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지동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정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경우를 ‘교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무엇인가?’ 또는 믿음이 어떤 가치를 가지기 위해서는 최소한 ‘그 믿음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이 시간에는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하는 올바른 믿음에 대하여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믿음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믿음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지금까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그 믿음이 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까?
일본의 신앙의 거장인 우찌무라 간조의 일화입니다.
일본에 큰 가뭄이 들었습니다. 몇 달을 두고 비가 오지 않자 이대로 가다가는 농사를 다 망치겠다고 사람들은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었습니다. 한쪽에서는 기우제를 지낸다 굿을 한다 하고 난리였습니다. 어느 날 아침, 우찌무라 간조는 아이들과 함께 식사기도를 하면서
“하나님, 비를 주십시오. 땅이 너무 메말라 갑니다. 오늘 꼭 비를 주실 줄로 굳게 믿습니다.”
하고 기도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아이들이 학교 갈 채비를 합니다. 그런데 소학교 6학년인 큰 아이는 아무 소리 없는데, 3학년인 작은아이가 난데없이 우산을 찾습니다. “아버지, 우산!” 그러자 우찌무라 간조는 어리둥절해 하면서 “맑은 하늘에 우산은 왜 찾느냐?”라고 합니다. 그러자 작은아이는
“아버지, 아까 기도하실 때에 오늘 비 주실 것으로 믿는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우산을 가지고 가야지요!”
라고 합니다. 우찌무라 간조는 무엇에 맞은 것처럼 ‘나의 믿음은 전부 거짓이다. 저 아이의 믿음이야말로 참 믿음이다.’라고 하면서 회개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아이 보기가 부끄러울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마태복음8:5-10절의 내용을 봅시다. 가버나움의 한 백부장이 중풍 병으로 고생하는 자신의 하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간청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가서 고쳐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주님께서는 신기하게 여기시며 이 믿음을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바로 이 백부장의 믿음이 “바라는 것의 실상”입니다. 즉 백부장은 시공을 초월하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던 것입니다. 백부장의 믿음의 실상은 능력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이런 믿음은 지금 세대에도 찾아보기가 힘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믿을만한 다른 보조 수단을 찾습니다. 즉 안수하거나, 기름을 붓거나, 적어도 가까이 가서 기도라도 해 주신다면 병이 더 쉽게 치유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들은 사람들의 자기신념입니다. 사람들이 우상에게 비는 것도 이와 같은 자기신념의 산물입니다.
믿음은 결코 사람의 신념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당연히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백부장은 바로 이 믿음의 원리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 자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한 마디가 시공을 초월함을 믿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분명히 위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유익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진리에 근거를 둔 믿음이어야 합니다.
2. 믿음의 대상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사람 각자의 신념과 세상적인 믿음을 필요로 합니다. 버스를 타거나, 운전을 하거나, 걷는 것이나, 심지어 음식을 먹을 때에도 신념이나 믿음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만일 내가 탈 버스가 사고가 날 것이라고 의심을 한다면 아마 타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음식에 독을 넣었을 것이라고 의심이 된다면 먹지 않겠지요. 세상의 모든 일에는 나름대로의 신념과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믿음을 오구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믿음은 그 대상이 세상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그 대상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호주에서 사역하던 선교사가 어떤 일을 계획하면서 2000만원 정도의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일주일동안 편지 50여 통을 쓰고 국제전화도 하고 온갖 궁리를 다해서 계산해 보았지만 삼백만원 정도 밖에 나올 것 같지 않았습니다. 물론 기도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없어서 그 계획을 취소하는 방향으로 마음이 기울어져 갔습니다. 그러다보니 초조감과 좌절감 패배의식 같은 것으로 영적 저기압 상태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본 그의 부인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그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시나요?” 선교사가 “그렇다.”고 했더니, “그러면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면 들으신다는 것도 확신하시는지요?” 이 물음에 ‘너는 정말 나를 믿느냐?’라고 번개처럼 스치는 주님의 책망이 있었습니다. 선교사는 사실 하나님 보다 그 많은 후원자들을 믿었던 자신을 회개하고 다시 믿음의 기도를 통하여 응답을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선교사처럼 잘못된 대상을 향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참 믿음과 거짓 믿음의 차이는 믿음의 대상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앞서 잠간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신약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병자들이 치유 받는 과정을 보면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고백이 들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9:23절에서,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아들을 고치러 온 사람을 향하여,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의 ‘믿는 자’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인의 힘과 능력이 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진정한 믿음은 근심하거나 염려하거나 의심하지 않습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 야고보서1:6-8절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3. 참 믿음은 곧 생활입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장식품이나 생활을 좀더 윤기 있게 해 주는 윤활유나 자신의 소원을 위해 필요한 요술방망이가 아닙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그 자체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바라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셨는데, ‘실상’과 ‘증거’는 현존하는 사람의 삶을 말합니다. 본문의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그리고 11장 전체가 그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산 위에서 만드는 거대한 배,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출발하는 이삿짐, 폐경기가 지나 임신이 불가능한 상황에서의 잉태의 약속. 이런 것들이 가능하게 여겨집니까? 이러한 불가능을 믿는 믿음은 생활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모든 일을 주님께 의지하는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대상이 확실히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고, 그 믿음의 분량이 큰 것이라 할지라도, 실생활에서 활용되지 못하는 추상적인 것이라면 그 믿음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생활 속에서 활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믿음의 중요성에 대하여 이론적인 설명으로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생활 속에서 믿음으로 체험할 수 있는 엄청난 복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기초가 되는 믿음으로 인한 복이 ‘영적 생명’입니다. 곧 요한복음5:24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는 약속이 그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영적 생명’은 ‘더욱 풍성한 삶’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10:10절에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마가복음11:22,23절에서는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를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삶에서 나타나는 능력을 말씀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진실한 믿음의 실상입니다.
문제는 두려움과 의심, 세상적인 믿음과 신념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우리 마음에 쌓여있으면 우리의 생활이 혼란스럽게 됩니다. 세상적인 가치관과 영적인 가치관이 섞여서 생활을 혼란스럽게 하고 삶을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나이아가라 폭포 상류에 가면 뱃놀이를 할 수 있는 호수와 같은 큰 강이 있다고 합니다. 물론 이 강은 계속해서 나이아가라 폭포로 흐르는 물입니다. 여기서는 노를 젓지 않아도 보트가 하류로 흘러 내려갑니다. 그런데, 어느 지점까지 내려오면 빨간 줄이 처져있으며 위험에 대한 제 1 경고문이 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위험하니 되돌아가라는 것이므로, 노를 저어서 상류로 올라가야 합니다. 제 1 경고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제 2 경고가 있고, 여기서부터는 되돌아가기가 조금 더 어려움을 알려 줍니다. 마지막 세 번째 경고에서는, 이 경계선을 넘어가면 아무리 노를 저어도 상류로 올라가지 못하는 지점이며, 그대로 폭포인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위험한 지점임을 알립니다.
우리 인생의 삶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에서 조금씩 벗어날 때마다 생활 속에서 경고를 하십니다. 가정생활, 자녀문제, 물질의 문제, 육신의 건강 등등. 경고 등이 켜질 때는 멈추어 서서 자신의 믿음의 생활을 돌아보십시오. 지금 머물러 있는 믿음의 자리가 어떠한지 살펴보십시오. 계속 무시하고 나아간다면 기다리는 것은 패망뿐입니다. 미루지 마시고 지금 영적 건강의 척도인 믿음을 점검하셔서 후회를 남기지 않는 신실한 삶을 이루어 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