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지금,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 지금,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 야고보서 4:1-8
야고보서 4:1-8, “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2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5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 들어가는 말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무척 기능적으로는 다양하고, 복잡하고, 정보의 양으로는 ‘빅데이터’ 세상입니다. 실시간 통계사이트 ‘Worldometers’에 따르면, 현대인은 하루에 2,100억 개 이상의 e-mail을 주고받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하루 정보량은 20세기 초로 따지면, 전 세계인의 평생 정보량과 맞먹을 정도입니다. 즉 인류 5,000년 축적된 데이터가 단 하루 만에 생성되는 것입니다. 이런 거대한 데이터를 가리켜 ‘빅데이터’라고 합니다. 이러한 세상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긴급하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분별력입니다. 분별(分別, dokimavzw, to test, prove)이라 함은, 문자적으로는 ‘시험하다, 입증하다, 구별하다.’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영적으로 사용될 때의 의미는 조금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의 분별력이란, ‘세상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는 것이며,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이 깨달음을 방해하는 사단의 술수를 아는 것’입니다. 곧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구별하는 능력입니다. 이 분별에 대하여 사도 바울을 통하여 고린도전서 2:12-1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이처럼, 분별력은 영적인 것을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이 능력은 성령께서 나누어주시는 은사입니다(고전 12:8-11). 그래서 이 시간에는 이러한 시대를 사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분별해야 하는지를 살펴봅시다.
※ 본문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야고보서는 여러 가지 점에서 산상수훈과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삶을 기록했으며, 복음적 신앙을 깨우치는 내용입니다. 야고보서는 교리를 해설하기 위해 기록한 것이 아니지만, 복음을 신앙의 결과인 행위에 연결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래서 편지의 형식이면서도 특정한 문제를 취급한 편지가 아니라 일반적인 권면입니다. 그런데 편지의 기록자를 1:1절에서 밝힌대로 ‘야고보’라고 보는데, 야고보라는 이름을 가진 특별한 인물이 여럿입니다. 유력한 인물로는 열두 사도 중에 둘, 주의 형제 야고보입니다. 사도 중의 야고보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막 3:17-18)이며, 주의 형제 야고보는 초대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략 주의 형제 야고보가 유력합니다.
야고보서의 목적은 환난을 겪는 그리스도인을 위로하고, 또 격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에 도취하여 행위를 무시하는 자를 경계해야(약 1:22,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기를 속이는 자가 되지 말고 이를 행하는 자가 되라.”) 할 것을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야고보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믿음만을 중요시하고, 행위를 무시하는 것을 경계하여, “아! 어리석은 사람아! 너도 행함이 없는 믿음이 무익하다는 것을 알고 싶은가? 우리 조상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렸을 때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 아닌가? 너희가 본대로 그의 믿음에 행함이 따랐기 때문에 행함으로 믿음이 완전하게 된 것이다.”(2:20-22)라고 강조합니다. 야고보에게 있어서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었습니다(2:26). 지금처럼, 하나님 없이 사는 시대에는 영적인 분별과 행함으로 나타내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 우리가 가져야 할 분별력은 어떤 것입니까?
본문 1-3절을 봅시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2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우리의 삶에서 길이 열리지 않고, 고통과 괴로움으로 가득하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인생의 문제가 생겨있다는 표시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삶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사모했지만, 여전히 우상숭배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서 무엇이 문제인지 찾지를 못했습니다. 사무엘상 7:2절에서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을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모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문제점을 알고 있었고, 그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고치라고 했습니다.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방금 읽은 본문 말씀에서도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라고 하십니다. 이는 자신들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모르면서 다투고 싸우기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자기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는 분별력이 없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이기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은 분별력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특히, 지금처럼 온 세계가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워가는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양 떼 효과’라는 말이 있습니다. 양들은 산만해서 한 곳에 모아놓으면 아주 무질서해집니다. 하지만 우두머리 양이 선두에 나서면 양들은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우두머리 양을 따라갑니다. 연구자들이 양 떼의 습성을 알아보기 위해 양 떼가 지나가는 길목에 긴 나무를 가로로 눕혀놓고 관찰했습니다. 우두머리 양이 나무를 폴짝 뛰어넘자, 두 번째, 세 번째 양도 모두 폴짝폴짝 뛰어넘었습니다. 도중에 연구자들이 그 나무를 치워버렸습니다. 그런데 양들이 그 자리에만 오면 앞선 양처럼 폴짝 뛰어 지나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양 떼 효과’라고 합니다.
즉 ‘양 떼 효과’는 ‘인간의 맹목적인 추종 심리를 상징적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오늘의 많은 교인이 ‘양 떼 효과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일에 교회당에 가며, 예배하며, 성경 읽고, 기도하는 진정한 이유도 생각하지 않고 맹목적이고 습관적으로 합니다. 옛말에 ‘거름 지고 장에 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장날이 되자 사람들이 너도나도 장터에 갑니다. 물건을 팔려는 사람, 사려는 사람 등등. 그런데 이 사람은 딱히 장에 갈 이유가 없어서 거름 지고 장에 갔습니다. 즉 ‘자신의 상황에 맞지 않게 무작정 남을 따라 하거나 격에 맞지 않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성도들에게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라고 책망하면서 깨우칩니다. 그러면서 그 해법을 2하-4절에서 제시합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야고보 선생이 제시한 해법은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올바른 기도를 하는 것과 우상을 버리는 것입니다. “간음한 여인들”이라는 표현은 ‘우상숭배’를 의미합니다. 야고보 선생은 우상을 “세상과 벗 된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마태복음 6:24절을 봅시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세상과 벗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가까이함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이 우상이 됩니다. 이렇게 세상을 가까이하면서 기도하게 되니, 당연히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뜻과 욕심으로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가까이하는지, 세상을 더 가까이하는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없는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한 여행객이 서아프리카 나미비아 사바나 초원을 여행할 때입니다. 안내인과 함께 여우를 추적하는데 갈림길이 나타났습니다. 그중 하나에는 함정이 설치되어 있었고 다른 길에는 안내인이 천천히 여우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여우는 갈림길에서 잠시 고민하는 듯 멈칫거리더니, 안내인이 오는 길로 달려들어 길을 뚫고 도망쳤습니다. 여우가 도망치고 나서 여행객은 안내인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희한하게도 왜 빈 길을 두고 사람이 있는 길로 도망가죠?” 그러자 안내인이 웃으면서 설명했습니다. “여우들은 아주 영리하거든요. 그들은 겉으로 평범해 보이는 길에는 반드시 함정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어려운 길을 뚫고 도망간 겁니다.”
한갓 미물인 여우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비록 힘든 길이지만 보다 안전한 길을 선택하여 돌파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삶,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삶은 비록 힘들고 어려운 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필요를 채우시고 수고에 따르는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우리가 분별해야 할 삶의 길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이 길입니다. 본문 5-8절을 봅시다.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하나님께 순복하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손을 깨끗이 하라.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이 명령들은 올바른 길을 분별하는 열쇠입니다. 이사야 30:20-21절을 봅시다.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스승”은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을 의미하며, 오늘에는 우리의 참 스승이신 주님이시고 성령님이십니다. 예수께서 요한복음 13:13절에서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라고 하시며, 14:26절에서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삶의 길은 하나님께서 보장하시고 친히 인도하시고 선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런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 이런 분별력을 어떻게 가질 수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2:13절을 봅시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한곳 더 고린도전서 12:10-11절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영적인 일을 분별하는 능력은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일들과 영적인 일들은 분별하기를 원한다면, 성령께서 주시도록 구하면 됩니다. 예수께서 누가복음 11:1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구하면 당연히 주신다.’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은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즉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올바로 구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영적인 것을 분별하는 능력은 세상의 지혜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함과 필요한 은사를 구해야 합니다. 엉뚱한 것 구하느라 시간과 힘을 낭비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분별하도록 기도하면 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기도했다면, 성령께서 인도하심을 믿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이루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세상은 영적인 어둠으로 깊어가고 있습니다. 어두울 때는 손전등으로 길을 밝히듯이, 성령께서 우리 발의 등불이 되셔서 올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지금은 마땅히 자다가 깰 때입니다. 영적으로 깨어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올바른 길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