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이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좋도다.
*** 이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좋도다. / 열왕기상 8:17-21
열왕기상 8:17-21, “17 내 아버지 다윗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더니 18 여호와께서 내 아버지 다윗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으니 이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좋도다. 19 그러나 너는 그 성전을 건축하지 못할 것이요 네 몸에서 낳을 네 아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라.’ 하시더니 20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시도다.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 아버지 다윗을 이어서 일어나 이스라엘의 왕위에 앉고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고 21 내가 또 그 곳에 우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그들과 세우신 바 여호와의 언약을 넣은 궤를 위하여 한 처소를 설치하였노라.”
** 들어가는 말
먼저 하나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사람들을 대할 때, 그 사람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편입니까? 아니면, 내 생각과 내 뜻을 내세우는 편입니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사람을 ‘사려(思慮) 깊다(여러 가지 일에 대하여 깊이 생각함).’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사려면, 그 사람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6:6절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번제는 구약의 제사(예배)제도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제사는 제물의 일부분만 태워드리고 나머지는 제사장에게 주어지거나 드리는 사람들이 함께 먹지만, 번제는 전부를 태워드리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온전하게 드리는 예배로써, 중요한 예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중요한 예배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한다.’라고 하십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아는 것, 즉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요한계시록 2:23절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이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라고 하시며, 역대상 28:9절에서는 “여호와께서는 모든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의도를 아시나니”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을 원하시며, 그 사람의 마음의 모든 의도를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본문 18절에서 “네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으니 이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좋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님 앞에서 사는 우리는 마음 씀씀이가 중요함을 살펴보려 합니다.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 말씀의 배경은 이스라엘의 3대 왕인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후에 백성들에게 축복하면서 성전건축 과정을 말하는 내용입니다. 그 가운데서 본문 말씀은 ‘성전건축을 소망했던 다윗 왕과 하나님께서 다윗에 대한 마음을 표현한 것, 그리고 솔로몬 자신이 성전건축을 이루었다.’라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에서 다윗이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얻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본문 17-18절입니다. “내 아버지 다윗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더니, 여호와께서 내 아버지 다윗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으니 이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좋도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던 비결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찾은 것이었습니다. 로마서 12:2절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길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 길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그 뜻을 잘 찾아 행하는 것입니다.
※ 먼저,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살피심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일을 하든지, 음식을 먹든지, 사람들을 만나든지, 아니면 홀로 쉬고 있을 때까지도 하나님께서 나를 감찰하심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쉽게 표현하자면, 내 일거수일투족이 녹화되고, 녹음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시편 139:2절에서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그리고 누가복음 5:22절에서는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있는 행위록(하나님 앞에는 생명책과 행위를 기록한 행위록이 있다. 단 3:16, 계 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에는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행한 모든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기록대로 심판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에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의 생각과 행위를 아시고, 행한 대로 갚으신다.’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왜 이런 생각을 하지 않고 살겠습니까? 이유는 세상에, 내가 원하는 것에 마음을 빼앗겨 하나님을 생각할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씨 뿌리는 비유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마음이 빼앗기면, 신앙도 생명도 천국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로지 눈앞의 이익과 물질만 보이게 됩니다.
중국의 ‘여씨 춘추’에 등장하는 우화입니다. 대낮, 시장 한복판에 벌려놓은 금은방에 놓인 황금 덩어리를 넋 빠진 듯이 쳐다보고 있던 한 사내가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 그 사내는 느닷없이 그 황금 덩어리를 집어 들고 도망을 쳤습니다.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시장바닥에서 도망가면 어디까지 갈 수가 있겠습니까? 물건을 훔친 사내는 얼마 가지도 못하고 붙들려서 재판관 앞에 섰습니다. 기가 막힌 재판관이 사내에게 묻습니다. “시장바닥에 그렇게 사람이 많은데, 어떻게 그것을 도둑질할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이 말을 들은 사내는, “그때, 제 눈엔 황금만 보였지 사람들은 하나도 보이질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려고 많이 노력하지만, 당장 눈앞에 보이는 세상의 삶에 마음을 두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처럼, 내가 먹고살며, 생활해야 하는 현실을 무시하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내 모든 삶을 아시고 필요한 것을 채워주신다고 믿지만, 역시 현실의 생활에 적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 아시느니라.”(마 6:30-32). 이 말씀을 모르시는 분은 없지요? 하나님은 우리의 영과 육신의 모든 삶의 필요를 아심을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입으로만 ‘믿습니다.’라고 할 것이 아니라, 믿고 염려하지 않고,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께 구하면 됩니다. 마태복음 7:7-8절입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그리고 요한복음 16:24절에서는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이는 주님께서 보증하신 약속입니다. 다만, 정직하고 진실하게 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내 마음의 모든 계획과 생각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성전건축할 마음을 품은 것이 진실함을 아셨기 때문에, 말씀하신 대로 솔로몬을 통하여 이루게 하셨습니다. 거짓이 없고 진실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떤 마음을 알아주시겠습니까?
본문 18-19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아버지 다윗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으니 이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좋도다. 19 그러나 너는 그 성전을 건축하지 못할 것이요 네 몸에서 낳을 네 아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라.’ 하시더니” 이 말씀은 다윗이 하나님께서 거하실 성전 건축할 마음을 품은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던 다윗의 마음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습니까? 사무엘하 7:1-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서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 나단이 왕께 아뢰되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 하니라.” 다윗은 주변 정세를 안정시키고 왕궁에서 평안히 쉴 때, 하나님께서 임재(臨在)하시는 궤가 천막 안에 있음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궤를 모실 성전을 지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었습니다. 참고로,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에게 성전건축을 명령하신 말씀을 봅시다. 학개 1:3-5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잘 꾸민 화려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이어서 9절입니다.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 학개 선지자에게 하신 말씀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마음을 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윗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안디옥에서 전도하면서 구약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 13:22절입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이처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마음에 품고 행동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알아주십니다.
※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찾을 수 있습니까?
로마서 12:2절에서도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늘 이 생각만 하면서 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마음을 품을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즉, 어떤 일이든지 하나님의 뜻을 물었고, 정직하고 진실하게 행동했습니다. 조금 더 이해하도록 예화 하나를 보겠습니다.
어느 CEO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기업에서 신입사원을 채용하기로 했습니다. 1차 시험을 거친 지원자들이 2차 면접을 위하여 지정된 면접 장소에 모여 대기했습니다. 이름이 불리는 사람만 면접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면접 장소에는 구겨진 종잇조각들만 지저분하게 굴러다녔고, 아무리 기다려도 이름이 불리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백여 명이 넘는 지원자들은 자신이 합격 되지 않음을 알고 하나씩 둘씩 돌아갔습니다. 마지막 한 사람이 널브러진 종잇조각들을 모아 휴지통에 담았습니다. 거의 다 치워가던 중 예쁜 리본이 묶인 카드가 하나 있었습니다. 궁금해진 그 지원자가 열어보았습니다. 카드에는 뜻밖에 큰 글씨로 “당신은 합격입니다. 입사를 축하합니다.”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른 뒤, 그 지원자는 그 기업의 CEO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회사에서는 지원자들의 진실한 생활 모습을 알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지원자 대부분은 시험을 위한 보여주기식으로 준비했던 것이지, 진실한 생활의 모습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0:25절 이하에는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에 관한 비유가 있습니다. 어떤 율법 교사가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율법 교사는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강도를 만나서 거의 죽어가는 사람을 주막으로 데려가서 돌보아 주고, 치료비까지 내어준 사마리아 사람에 관하여 이야기하셨습니다. 앞의 CEO 이야기나,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나, 모두 생활 속에서 성실함과 진실함 그리고 사랑을 행하였습니다. 이 이야기의 결론을 예수께서 ‘양과 염소’ 비유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34-36절을 봅시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오른편에 있던 양 무리는 ‘우리는 그렇게 한 적이 없었다.’라고 대답했을 때, 임금이 말씀하십니다. 40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내 삶의 자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상황, 만나는 사람, 이러한 환경에서 하나님의 사랑, 내가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어느 곳에서나 성실하고 진실하고 충성된 사람은 빛이 나며, 그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실함을 모르시겠습니까?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과정을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내 생애가 녹화된 것을 보여주시더라도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로 향하는 내 마음이나, 사람들에게 향하는 내 마음이 진실하십니까? 나를 보는 사람이 없고,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알아주십니다. 이런 진실한 마음의 삶으로 하나님께서 ‘이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좋구나.’라는 칭찬받아 구하는 것을 모두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