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평안을 누리는 생활
*** 평안을 누리는 생활 / 요한복음 16:25-33
요한복음 16:25-33, “25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26 그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27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28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29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 30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 들어가는 말
예전 크리스천 잡지에 이런 이야기가 실렸었습니다.
미국의 어느 교회에는 낮 열 두시 무렵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초라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 노인은 교회에 들어갔다가 2,3분이 지나면 다시 나와서 어디론가 가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노인에 대하여 궁금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관리인에게 그 노인을 만나서 사연을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어느 날, 관리인이 교회에서 나오는 노인에게 왜 왔는지를 물었습니다.
“나요? 기도하려고 왔지요.” “할아버지는 기도할 만큼 오랫동안 교회에 머무르지 않으셨어요.” “나 참, 난 오래 기도할 줄 몰라요. 날마다 열두 시만 되면 이리로 와서 ‘예수님 나왔어요. 나, 짐이에요.’ 하는 거요. 그러다가 그냥 간단 말이오. 그저 짧은 기도죠. 그래도 들어주실 것 같아서요.”
얼마 후, 노인이 사고를 당하여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입원해 있는 병동에 놀라운 감화를 끼쳤습니다. 투덜대기만 하던 환자들이 즐거워하게 되고, 가끔씩 폭소가 터져 나오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노인을 담당하는 간호사가 물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 다들 그러는데 병실 분위기가 이렇게 달라진 것이 할아버지 덕분이라더군요. 할아버지는 항상 즐거우시다면서요?” “그래요, 간호사 선생, 나는 그렇고말고. 그런데 그것은 내 방문객 덕분이야. 날마다 그 분이 나를 기쁘게 하거든.”
간호사는 어안이 벙벙해졌습니다. 왜냐하면, 그 노인은 친척도 없어서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으며, 늘 혼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너무나 궁금해진 간호사가 물었습니다. “날마다 찾아오는 방문객이라뇨? 그 방문객은 언제 오나요?” “날마다 오지, 안 그렇고말고. 날마다 열두 시면 내 침대 저쪽에 그분이 와서는 서 계신단 말이오. 내가 그분을 쳐다보면 그분은 싱긋이 웃으시면서 ‘짐, 날세. 나, 예수네.’ 하지 않겠어.”
저는 이 이야기를 자주 읽고 사용하는데, 이야기만 들어도 그 광경이 상상되고 마음이 즐거워지는 것 같지요? 이 이야기 속에는 깊은 신앙의 이야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의심할 여지 없는 깊은 신뢰가 느껴집니다. 왜 그럴까요? 짧지만, 노인의 진정성 있는 기도와 주님의 평안을 누리는 생활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부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입니다. 즉 이론적으로 믿고, 감각적으로 느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생활에서 주님과 함께하는 기쁨과 평안과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33절에서 주님은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을 누리고 있습니까?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 말씀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가 가까움을 아시고, 제자들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시려고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메시아’로 ‘왕’으로 기대하는 제자들이 받게 될 엄청난 충격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밖으로 드러나는 사건의 모습에 당황하지 않고, 그 사건의 내적인 진리를 깨닫고, 당당하게 나가도록 하시려고 영의 마음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본문 25-26절에서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그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라고 하십니다. 지금까지는 제자들을 위하여 예수께서 대신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시며, 어린아이 대하듯이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자들이 하나님을 밝히 알게 되고,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열려서 직접 기도할 수 있게 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제자들을 하나님 아버지와 직접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자리로 이끌어 주시는 이유는 예수께서 곧 제자들을 떠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나실 것이지만 제자들은 세상에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문 33절에서 “내가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일러두는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다. 이 세상에서 너희는 많은 시련과 슬픔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중요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오늘 주제처럼 ‘평안을 누리기 위하여’ 꼭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육신적으로 성도들을 떠나실 것이지만, 그의 성도들은 세상에서 승리하며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시는 것이 제자들의 승리와 평안을 위하여 득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6:7절입니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하십니다. 아리송하지요? 이 말씀의 비밀을 밝혀봅시다.
※ 우리가 누리는 즐거움이 무엇입니까?
먼저 생각해보아야 할 내용은 소유하는 것과 누리는 것의 차이입니다. 많은 설명보다 이야기가 이해하기 쉽겠지요. 인터넷에 어느 부인이 올린 실화입니다.
어느 중년 부부가 20년이 넘게 죽도록 일하고, 번 돈은 거의 저축을 해서 드디어 자기 집을 장만했습니다. 30여 평의 아파트를 사던 날 부부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내는 볕이 잘 드는 베란다에 그토록 원했던 자그마한 화단을 만들고 차를 마실 수 있는 작은 테이블과 의자를 갖추고는 베란다 카페라고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상업을 하는 부부는 아침 일찍 함께 가게로 나가서 저녁 늦게야 집에 돌아왔습니다. 아이들도 공부하느라 늦은 밤에야 겨우 얼굴을 볼 정도였습니다. 집 안 청소와 빨래, 아이들의 식사까지 파출부로 해결했습니다. 집을 장만하고 부부가 오붓하게 저녁 시간 후에 차를 마실 상상을 하며 만들었던 작은 베란다 카페는 아직 한 번도 사용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날도, 부부는 함께 출근했는데, 급하게 필요한 것이 있어서 아내가 집에 들렀습니다. 집 안에 들어서자 은은한 커피 향으로 가득했습니다. 아내는 눈에 들어온 광경에 잠시 온갖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그 광경은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베란다 카페에 파출부가 앉아서 창밖을 보면서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직 자신도 한 번 앉아보지 못한 곳에 말입니다. 아내는 그 순간 자신이 이 집을 장만하느라 고생했던 일들과 저 파출부처럼 그 자리에 앉아서 여유로운 인생을 누리겠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여유를 다른 사람이 누리고 있습니다. 아내는 그제야 “내가 왜 이렇게 살지?” “내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 일하지?”라는 깨달음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소유하는 것과 누리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전도서 4:8절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이 홀로 있으나 그의 모든 수고에는 끝이 없도다. 또 비록 그의 눈은 부요를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는 이같이 수고하고 나를 위하여는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가?’ 하여도, 이것도 헛되어 불행한 노고로다.” 그리고 6:6절에서는 “그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행복을 보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라고 탄식합니다. 애플 창업주 스티브 잡스는 생전에 모은 재산이 70억 달러, 우리 돈으로는 8조 2천억 원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 재산으로 병을 고치지 못했고, 누린 것도 미미할 뿐입니다.
‘즐거움’ ‘기쁨’ ‘평안’ ‘감사’ 이런 삶의 긍정적인 형태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영적 삶의 요소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즐거움과 기쁨에도 세상의 것과 영적인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의 즐거움은 반드시 즐거움을 제공하는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가족 중의 경사가 있다든지, 좋은 자동차나 원하던 것을 얻었다든지 하는 즐겁게 하는 요소가 있어야 하는데, 이런 즐거움은 제한적입니다. 즉 즐거움의 요소가 사라지면 즐거움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즐거움은 세상의 어떤 환경이나 조건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본문 앞의 22절에서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라고 하시며, 15:11절에서는 이 기쁨의 출처가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임을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기쁨과 즐거움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시는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내면의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즐거움은 외적인 환경에 의하여 좌우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누구도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 중요한 사실은 이 기쁨과 평안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쁨과 평안을 누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전도서 5:19절입니다. “또한,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그에게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제 몫을 받아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즉 사람이 재물과 풍요를 누리게 하시는 즐거움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 즉 세상적인 재물이나, 풍부함이나, 바라는 것을 성취하는 것이나, 영적인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바라는 즐거움이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 해답은 이미 앞에서 나왔습니다. 요한복음 15:9-11절을 봅시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진정한 즐거움을 누리려면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서 예수님의 사랑 안에 살면 됩니다. 예수님의 계명은 12절에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주님 안에서의 진정한 사랑의 삶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빼앗을 수 없는 우리의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이 됩니다.
※ 내가 이 기쁨과 평안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앞에서 소유하는 것과 누리는 것이 다르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소유한다는 것은 자신의 것으로 모아두고 쌓아두는 것이며, 누린다는 것은 자신에게 있는 것을 적절하게 활용함으로써 향유(享有, 누려서 가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돈을 벌어서 저축해두면 쌓아두고 소유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돈으로 문화생활을 즐긴다든지, 여행을 한다든지, 봉사 생활을 한다든지 하는 것은 누리는 것입니다. 또 한 예로, 자신에게 좋은 재능이 있는데, 그것을 가지고만 있다면 그저 재능을 소유한 것입니다. 반면에 그 재능으로 섬기고 봉사하고 나누는 것은 누리는 것입니다. 즉 진정한 사랑의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람들에게 은사를 주시고 그 은사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활용하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25:14-30절에서 ‘달란트 비유’를 통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재능은 반드시 활용하여 이익을 남겨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21절과 23절에서 잘 활용한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반면에 주어진 재능을 활용하지 못하고 소유만 했던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이처럼 즐거움을 누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들을 사랑으로 덧입혀서 잘 활용하는 것입니다. 활용한다는 것은 세상에 영향력을 끼쳐 열매를 맺는 것인데, 이것이 사랑과 섬김과 봉사의 삶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성령의 열매’ ‘빛의 열매’라고 표현하십니다. 즉 우리 생활에서 이러한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이렇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잘 활용하여 많은 영향력을 끼쳐 열매를 많이 맺으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하신다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15:8절입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 건강, 재능 등을 잘 활용하여 세상에 영향력을 나타낼 때,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충만하게 주어지게 됩니다. 아이들의 복음송 중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사랑은 참으로 다 주는 것 다 주는 것 다 주는 것 사랑은 참으로 다 주는 것 더 가지지 않는 것. 이상하다 동전 한 닢 움켜잡으면 없어지고 쓰고 빌려주면 풍성해져 땅 위에 가득하네”
잠언 15:13절에서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살아도 한평생이요, 움켜쥐고 염려하고 근심하며 살아도 한평생이며, 사랑하고 나누고 베풀며 기쁘고 즐겁게 살아도 한평생입니다. 비록 풍성하지 못한 생활일지라도, 사랑을 실천하여 나누고 베푸는 누리는 삶으로, 얼굴이 빛나는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