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하나님 아버지의 귀한 자녀
*** 하나님 아버지의 귀한 자녀 / 누가복음 12:22-32
누가복음 12:22-32, “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23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24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25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26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 27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28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29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30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31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 들어가는 말
마태복음 산상수훈 6장에 나오는 구절과 병행을 이루는 본문 말씀은 주로 ‘염려’라는 주제로 사용합니다. 이 시간에는 염려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자녀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살펴보려 합니다. 사람들이 흔히 손주를 키우는 재미에 관하여 이야기합니다. 자녀를 키울 때는 일하랴, 사회생활 하랴, 자녀들 양육하랴 너무나 바빠서 자식이 어떻게 크는지조차 모를 지경이었지요. 그러다가 자녀들이 다 자라서 결혼하고 손주를 낳을 때면, 어느 정도 삶의 여유가 있어서 아이 크는 재미를 느끼게 됩니다. 이쁜 손주들을 보면,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요. 본문 말씀을 읽다 보면,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보실 때, 이러한 마음이신 듯합니다. 특히 28절을 읽을 때면 마음이 뭉클해집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이 말씀은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스러운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이야기할 때면, 꼭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시고기 이야기입니다. 등에 뾰족한 가시가 나 있어서 가시고기인데, 어릴 때 논이랑에서 많이 잡았던 고기입니다.
가시고기는 물고기 중에는 유일하게 둥지를 만듭니다. 가시고기는 약 7-8cm 정도로 작은 고기이며, 산란기는 4-7월입니다. 수컷은 산란 때가 되면, 주둥이로 강바닥의 모래를 퍼내고 수초 조각을 모아 콩팥에서 분비한 점액으로 둥지를 만들고 암컷을 유인하여 산란토록 합니다. 암컷은 산란한 후 미련 없이 떠나버리고, 수컷은 둥지를 지키며 부화할 때까지 알을 보호합니다. 둥지 가까이 오는 어떤 물고기와도 생명을 걸고 싸우며, 알에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 부지런히 알을 넣고 꺼내는 작업도 잊지 않습니다.
가시고기 수컷은 보통 15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알을 지킵니다. 그러다가 알이 부화할 무렵 둥지 옆에서 쓸쓸히 죽어갑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갓 부화한 치어들은 무심하게도 제 아비의 살을 뜯어 먹으며 자랍니다. 새끼들을 위하여 생명을 다하고, 마지막에는 몸까지 내어놓습니다. 이런 부성애로 인해 가시고기의 부화율은 90%를 웃돈다고 합니다.
이 ‘가시고기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을 닮았다.’라고 합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자신의 모든 것을 주셨으며, 마지막에는 자기 생명과 몸까지 내놓으신 생명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 외에 더 큰 다른 사랑이 있겠습니까? 로마서 8:32절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이런 분을 우리는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우리가 이렇게 사랑으로 가득하신 아버지의 자녀임을 확인해봅시다. 이 확인이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은혜로 살기 위함입니다.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 말씀은 마태복음 6:25-34과 병행 구절을 이룹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라고 시작하여, ‘산상수훈’이라고 부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6:17에서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라고 시작하여 ‘평지설교’라고 부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여러 장에 나뉘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의 핵심내용은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라.’라는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자녀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합니다. 예수께서 말씀을 전하시던 당시에는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 대부분은 가난한 사람들, 종들이나 여인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의식주(衣食住) 문제, 즉 사람이 사는데 가장 기본적인 먹고 사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들에게 까마귀나 백합화를 예로 들면서 사람들을 이해시키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람을 만드셨기에 이들에게 필요한 의식주 문제를 아신다.’라고 하시면서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라.’라고 하십니다. 의식주 문제가 있으면 의식주에 관하여 구해야 하겠지만,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라.’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바꾸어서 말하면, 지금 우리 눈앞에 보이는 환경과 상황에 대하여 구하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것이 먼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본문 앞쪽의 4-7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깊으신 사랑을 나타내십니다.
※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알려면, 내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길은, 우리의 힘이나 노력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 하신 말씀 중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계시록 3:20절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문을 연다.’라는 것은,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는 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소유욕’입니다. 세상의 물질이든지, 돈이든지, 지식이든지, 권력이든지,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소유욕’은 말씀의 씨앗이 자라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하시는 중에, 가시덤불 같은 마음 밭에 떨어진 말씀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3:22절을 현대어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또 가시덤불에 덮인 땅은 가르침을 듣기는 하지만 생활에 대한 걱정과 돈을 벌겠다는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을 막아버리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런 사람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사람들은 자기가 관심을 많이 가진 곳에 아낌없이 내어놓기도 하고 투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렇게 물질이나 노력을 투자한 곳에 마음을 많이 둡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면 먼저 하나님께 내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내 마음을 연다는 것은 하나님께 나를 투자하는 것입니다. 인터넷 ‘따뜻한 하루’라는 사이트에 올라온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지하철에 가방을 든 한 아저씨가 승차하더니 승객들을 향해 우렁차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가 이렇게 여러분 앞에 나선 이유는 좋은 물건 하나 소개해 드리기 위해섭니다. 잘 보세요. 플라스틱 머리에 솔이 달려 있습니다. 이게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칫솔입니다. 이것을 무엇을 하려고 가지고 나왔을까요? 맞습니다. 팔려고 나왔습니다. 얼마일까요?…… 천원입니다. 뒷면을 돌려 보겠습니다. 영어가 쓰여 있습니다. 메이드 인 코리아! 이게 무슨 뜻일까요? 수출을 했다는 것입니다. 수출이 잘 됐을까요, 안됐을까요? 망했습니다! 자 그럼, 여러분께 하나씩 돌려보겠습니다.” 아저씨는 칫솔을 사람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황당해진 사람들은 웃지도 못했습니다. 칫솔을 다 나눠준 아저씨가 말을 이어갔습니다. “자, 여러분, 여기서 제가 몇 개나 팔 수 있을까요? 여러분도 궁금하시죠? 저도 궁금합니다.” 잠시 후 결과가 나왔습니다. “자 여러분, 칫솔 네 개 팔았습니다. 얼마 벌었을까요? 칫솔 4개 팔아서 4천원 벌었습니다. 제가 실망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예, 실! 망! 했습니다. 제가 여기서 포기할까요, 안 할까요? 절대 안 합니다. 바로 다음 칸이 있기 때문이죠!” 아저씨는 가방을 들고 유유히 다음 칸으로 건너갔습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웃음으로 거의 뒤집혔습니다.
이 이야기를 한 이유는 똑같은 환경 똑같은 상황이라 할지라도 전혀 다르게 살 수 있음을 보여드리기 위함입니다. 예전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차에 오른 어떤 판매원은 승객들이 많이 사주지 않는다고 욕을 하고 짜증을 부리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지하철 판매원 역시 짜증이 나고 많이 팔리지 않아서 염려도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재치도 있고, 다음 칸을 기대하는 소망이 돋보입니다. 우리 삶이 힘들고 염려가 몰려올지라도 소망으로 인내할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엄청난 보배가 있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보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감사는 잃어버리고, 이 세상의 일들이 잘풀리지 않는다고 염려하고 짜증을 부린다면 어떻겠습니까? 고린도후서 4:7절에서 예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그뿐만 아니라, 본문 24절에서는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라고 하시며, 28절에서는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에 지하철 장사꾼 청년처럼, 소망을 품고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주님께서 내게 들어와서 나와 함께 하십니다.
※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이사야 49:15-16절입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향하신 사랑의 마음을 표현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시고 부르신 자녀들을 절대로 잊지 않으신다.’라고 하십니다. 그런가하면, 예수께서 요한복음 10:27-28절에서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라고 하시며, 15:7절에서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결코 버리거나 외면하거나 실족하도록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부모가 자녀들에게 무엇이든지 주고 싶어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자녀들에게 아낌없이 주기를 원하십니다. 로마서 8:32절에서 말씀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독생자 예수님을 값없이 대속의 제물로 내주신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아끼시겠습니까?
이처럼 우리를 소중하게 여기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정과 형편을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아십니다. 본문 29-31절에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는 미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확실한 것은 바로 눈앞에 있는 것들뿐입니다. 비록 미래에 대한 소망과 비전을 품고 있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나는 내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이루기를 원하지만, 실상은 그것이 심각한 해를 주게 될 것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들을 아시고, 내가 원하지만 내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소중한 자녀들을 위하여 이미 모든 필요를 아시고 준비해 두셨으며 구할 때마다 기꺼이 허락해주시고 이루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주님의 자녀라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따라야 합니다.
한 가지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들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따라가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은 자꾸만 눈앞의 이익을 따라갑니다. ‘염려하지 않아야지!’ 하면서도 사야 할 것이 눈에 어른거리고, 하고 싶은 일들이 마음을 빼앗습니다. 그래서 내일 일이 걱정되고 인간적인 방법들을 동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를 향하신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따라가려면, 나 자신의 마음을 주님께 내려놓아야 합니다. 나를 비우지 않고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에 내 생각 내 뜻으로 가득하면 모든 것이 내 중심으로 보이게 되고 행동하게 되어 주님의 은혜가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염려하지 말고 주님을 신뢰하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염려되는 일이 있을 때는 빌립보서 4:19절을 기억하시며, 아버지께 믿음으로 구하십시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이 말씀대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신뢰하여, 하나님의 약속된 은혜를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