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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삶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1,239회 작성일 2023-08-28 15:27

*** 아름다운 삶 / 누가복음 19:1-10

 

누가복음 19:1-10,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 들어가는 말

 

‘아름다운, 아름답다.’라는 말은, 사람의 마음을 기쁘고 편안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마음이 아름답고, 모습이 아름답고, 삶이 아름답다.’라는 말을 듣는다는 것은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성경에는 ‘아름답다’라는 말이 의외로 많이 나옵니다. 시편 133:1절에서는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며, 그리스도인의 연합체가 아름답다고 했으며, 이사야 52:7절에서는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라며, 전도자의 삶이 아름답다고 하시며, 디모데전서 3:13절에서는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라고, 맡은 직분을 충성되게 감당한 삶의 보상이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7:19절에서는 주님께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라며, 하나님께 인정받는 아름다운 삶이 중요함을 말씀하십니다.

 

미국의 유명한 잡지 가운데 하나인 ‘라이프’지에 “아름다운 참사랑의 모습”이라는 기사와 더불어 한 페이지 가득 노인 부부의 사진이 실렸습니다. 그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잡지사의 사진기자가 영국을 방문하던 중 어느 날, 지하철 대합실 식당에서 아침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때 바로 앞자리에 노인 부부가 서로 부축하면서 마치 소꿉동무 어린이처럼 정답게 마주 앉았습니다. 남편은 비스킷을 주문하고, 아내는 차 한 잔을 주문했습니다. 그 노인 부부의 옷차림으로 보아 퍽 가난한 부부임을 알 수 있었는데, 그들은 누구에게도 개의치 않고 서로 마주 보면서, 조용히 서로의 손을 잡고 주문한 것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문한 비스킷과 차가 나왔는데, 남편은 비스킷을 천천히 먹기 시작했고, 아내는 뜨거운 차를 몇 모금 마시면서 남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잡지사 기자의 눈에 신기한 모습이 보였습니다. 비스킷을 반쯤이나 먹은 남편이 갑자기 틀니를 뽑더니 깨끗이 닦아서 아내에게 건네주는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그 틀니를 자연스레 입에 넣고는 남편이 주는 비스킷을 천천히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틀니를 빼준 남편은 아내가 마시던 차를 마시며, 아내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우리 인생길에 동행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힘들 때 서로 기댈 수 있고 아플 때 곁에 있어 줄 수 있고, 어려울 때 힘이 될 수 있으니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여행을 다녀보신 분을 알겠지만, 긴 여행에서 마음 맞는 동행이 있으면 기쁨이 배가 됩니다. 사랑은 혼자서 할 수가 없고, 맛있는 음식도 혼자는 맛이 없고, 멋진 영화도 혼자는 재미가 없습니다. 아름다운 옷도 보아 줄 사람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함께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동행은 목표가 같고, 목적지가 같을 때 가능합니다. 두 사람이나 혹 여러 사람이 함께할 때, 서로 자기 생각만을 고집한다면 결코 같은 방향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마태복음 5:39-4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이 말씀은 아마도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대단히 부담스러워할 것입니다. 지금 시대에 이렇게 산다는 것은 바보 취급당하기 딱 알맞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어느 시대에도 이렇게 사는 것이 쉬울 때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이렇게 요구하신 이유는,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에는 하나님 앞에서의 아름다운 삶을 살펴보려 합니다.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 말씀은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때는 예수께서 대속적 죽음을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입니다. 이제 예루살렘에서 30여 Km 거리에 있는 여리고를 지나시게 되었습니다. 여리고는 ‘사해’ 북쪽 약 12km 지점에 있는 오아시스입니다. ‘여리고’라는 이름은 ‘향기의 도성’, ‘종려나무 성’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름대로 여리고에는 종려나무숲과 발삼 향나무가 많이 있었습니다. 주변은 삭막한 광야이지만, 여리고에는 물이 풍부한 샘들이 있고, 또 엘리사의 샘이 있어서 숲이 우거져 있는 살기 좋은 오아시스 마을입니다. 특히, 이 지역은 사해가 가까워 사해에서 나는 역청, 유황, 소금 등의 수출통로였기 때문에 세관이 있어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였다고 합니다. 바로 이 세관에 세리장인 삭개오가 있었습니다. 그의 수입은 대단하여 큰 부자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세리들을 죄인 취급했습니다. 이유는 첫째, 자기 민족을 억압하는 로마 정부를 도와준다는 것이며, 둘째는, 로마 정부에서 요구하는 세금보다 지나치게 많이 부과하여, 나머지를 자기가 착복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여리고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삭개오를 위하여 방문하셨습니다. 이때 까지만 해도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었고 예수님에 대하여 잘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선생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기 위하여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길로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마치 오랜 친구처럼 부르시면서 ‘하룻밤 잠자리를 제공해 줄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삭개오는 기꺼이 영접했고 자신을 향한 주님의 사랑에 대하여 자신도 보답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삭개오의 이 결심에 예수께서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라며, 구원을 선언하셨습니다. 아마도 삭개오의 이런 즉각적인 사랑의 응답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게 했을 것입니다.

 

※ 사랑의 응답이 아름다운 삶입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인 ‘카라마조프의 형제’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귀부인이 교회의 장로님에게로 와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장로님, 나는 전 세계 문둥병자의 발에, 무릎을 꿇고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상처에 입 맞출 정도의 사랑이 마음에 가득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밤중 내가 잠자려 하는데, 옆방에서 계속 울어대는 갓난아이가 있으면, 나는 그 갓난아이를 목 졸라 죽이고만 싶습니다. 나의 사랑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사람의 마음은 우주처럼 무한한 넓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상상하지 못할 것이 없고, 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위의 이야기 속의 귀부인처럼 많은 그리스도인도 마음속의 사랑은 너무도 크고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막상 자기를 괴롭게 하거나, 마음에 맞지 않을 때는 그렇지 못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이유는 ‘팔은 안으로 굽는다.’라는 말처럼, 사람은 누구나 자기중심의 이기적인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희생적 사랑을 하기 어렵습니다. 성경에서 사랑을 최고의 덕목으로 꼽으며, 끊임없이 강조하는 이유도 이것입니다. 즉, 진정한 사랑의 삶이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여기시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인정받는 아름다운 사랑의 삶을 이루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잠언 27:5절을 봅시다.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표현’입니다. 즉, 표현되지 않는 사랑은 나무라는 것보다 못합니다. 지난 주일에도 신앙을 고백하는 표현이 중요함을 보았는데, 우리의 삶에도 나를 표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 민족은 아직도 사랑받고, 사랑하는 것이 서먹합니다. 결혼생활을 40-50년씩 한 오랜 부부들도 포옹하는 것이나 손을 잡는 것조차 어색해합니다. 부모 자녀 간에도 따뜻하게 손을 잡아주고 안아주는 스킨십이 서먹합니다. 얼마 전에 노회 모임 후, 식사하면서 부부가 서로 떨어져 식사하던 목사님이, 자기 아내가 잘 먹고 있는지 보려고 찾아오니까 사모님이 너무 어색해합니다. 부부가 포옹하고 손을 잡는 것이 불법입니까? 아니면 부모와 자녀가 안아주고 손을 잡는 것이 불법입니까? 이렇게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것이 어색하다면, 다른 사람의 사랑, 더욱이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보이는 사람도 사랑하지 못하는데, 독생자까지도 아끼지 않고 내어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인간의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셔서 기꺼이 대속의 제물이 되신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요한일서 4:20절에서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가장 가까운 가족도, 주 안에서 한 형제자매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말 안 하면 모르나!’라고 하시겠지만, ‘표현하지 않으면 모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의 사랑을 감격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세리를 죄인의 대명사쯤으로 여기면서 상종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대인 중에서도 존경받는 랍비인 예수께서 자신을 받아주시고 사랑으로 품어주시니, 황송한 마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본문 6절에서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즉시, 예수님의 사랑에 대하여 응답했습니다. 즉 자기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얼마나 감격 되었으면 ‘자기 재산의 절반과 부정 착복한 재물의 네 배를 갚겠다.’라고 하겠습니까. 예수께서 어느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받으셨을 때,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이 있었습니다. 초청자인 바리새인은 당연히 해야 할 손님의 발 씻을 물조차 주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자기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고, 값진 향유를 부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7:47절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그렇습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한없으신 사랑을 깨달은 성도는 하나님을 많이 사랑합니다. 삭개오는 자기를 찾아주신 예수님의 그 사랑을 깊이 깨달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바라보고, 하나님을 생각하면 어떤 마음이 듭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 기꺼이 자기 삶을 드립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 즉 시간, 정성, 물질 등. 어떤 것이든지 기꺼이 드리지 못하고 아까운 생각이 든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아직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다 주고 싶지 않습니까?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삭개오처럼 사랑의 응답으로 표현해 보십시오. 더욱 풍성한 것으로 갚아주십니다.

 

※ 사랑의 응답은 실천입니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맨 사람이 풀어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즉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결과를 책임져야 한다.’라는 뜻도 있고, ‘문제를 만든 사람이 그 문제의 해답을 제일 잘 안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이리저리 얽히고설켜서 길을 찾기가 힘들 때는 처음으로 돌아가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모든 문제는 사랑과 용서와 이해심과 관용하는 마음, 그리고 서로에게 관심을 잃으면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회와 세상이 이렇게 헝클어지게 된 것도 결국은 이런 사랑과 이해의 관심이 없어지고, 이기적인 욕망이 그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에베소 교회에 “너를 책망할 일이 있나니 너희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 2:4-5)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나 자신의 삶과 우리 가정과 교회와 사회, 그리고 세계가 지금보다 더 나아지기를 원한다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기 전에 가족, 일가친척, 주 안에서 형제 된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 사랑은 이론도 형식도 아닌, 행동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내 가족, 일가친척들, 성도들, 이웃들을 사랑하는 일에 인색하지 않았는지 돌아보십시오. 이제는 다른 사람 눈치 보지 말고, 사랑을 표현하십시오. 주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일은 사랑으로 행할 것’(고전 16:14)을 간곡하게 당부하셨습니다. 이는 부탁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행동으로 나타날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임을 알게 됩니다. 요한복음 13:35절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이제 사랑하는 마음을 속으로만 품지 말고, 행동으로 나타냅시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삶에서 나타내어, 우리 주변을 밝히면, 삭개오에게 선언하신 말씀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삶에 충만하게 됩니다. 이제는 아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말씀을 실천하여 하나님께 아름다운 삶으로 인정받아 하나님의 은혜를 삶에서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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