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사랑과 관심, 피어오르는 봄의 향기처럼
*** 사랑과 관심, 피어오르는 봄의 향기처럼 / 누가복음 10:25-37
누가복음 10:25-37,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같이 하라.’ 하시니라.”
** 들어가는 말
이제 바야흐로 겨울이 막바지에 이르고, 봄을 알리는 꽃과 새싹들이 돋아나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맑고 푸릇푸릇한 봄의 향기를 무척 좋아합니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이 녹고, 죽어 말라버린 것 같은 풀과 나무에서는 앙증맞게 돋아나는 싹들이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온 세계가 전쟁과 전쟁의 소문, 자연재난, 개인주의 등. 얼음장처럼 차가워만 가는 지금, 열정으로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사랑과 관심을 보이고 나누는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표본적인 신앙을 가진 율법 교사에게 예수께서 요구하신 것이 그러합니다. “가서, 너도 이와같이 하라.” 강도 만난 사람에게 관심과 사랑으로 행한 사마리아인의 행위를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와 같은 관심과 사랑입니다.
집안에서 인터넷만 늘 하고 있던 청년이 채팅을 통하여 한 여성을 사귀게 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아가씨에게 매일 인터넷을 통하여 채팅하며 또 꽃집에 꽃다발을 주문하여 아가씨에게 보냈습니다. 청년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장미를 보냈는데, 드디어 100일째가 되는 날, 그 아가씨로부터 편지 한 통이 왔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편지를 열었는데, 내용은 그 아가씨의 결혼식을 알리는 청첩장이었습니다. 멍한 마음으로 편지를 읽는데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꽃을 보내주신 은혜, 평생 잊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매일 장미를 보내준 덕분에 저는 매일 꽃을 배달해주던 꽃집 청년과 사귀게 되어 결혼하게 되었답니다.”
이 상황을 속된 말로 “죽 쒀서 개 줬다.”라고 합니다. 청년은 인터넷을 통하여 글을 주고받는 채팅을 했지만, 꽃집 청년은 매일 서로 얼굴을 보며 인격적인 교감을 나누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관심과 사랑은 이론적이고 교리적인 믿음이 아니라, 서로의 감정을 나누는 교감이 있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고, 귀로 듣는 설교를 통한 관계는 죽은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으로는 생명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감격과 감동이 있는 예배와 교제하는 기도, 행동하는 믿음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2:26절에서 이러한 상황을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일서 3:18절에서는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하십니다. ‘사랑한다.’라고 수천수만 통의 편지를 하고 전화를 한다고 해도, 만남이 없다면 사랑의 교감은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관심과 사랑을 피어나는 봄의 향기처럼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은 예수께서 ‘사랑을 실천하는 삶’에 대한 비유적 가르침입니다. 어느 날,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가 율법을 잘 아는 율법 교사임을 아시고 ‘율법에서는 무엇이라고 가르치느냐?’라고 되물었습니다. 그 율법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정말 율법 교사다운 정확한 대답입니다. 예수께서는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율법사는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그러면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고는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자니이다.”라고 했고, 예수님은 “가서 너도 이와같이 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율법 교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율법을 요약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말할 정도면 율법의 의도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비유 속의 제사장이나 레위 인처럼 문자적인 믿음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율법 교사에 대한 예수님의 지적을 봅시다. 누가복음 11:46절입니다.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 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라고 책망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하여 ‘진실한 관심과 행동하는 사랑’을 나타내십니다.
※ 어떻게 진정한 관심과 행동하는 사랑을 할 수 있습니까?
많은 설명보다 실재의 이야기가 더 많은 깨달음을 줄 때가 있습니다. 제가 정말 자주 사용하는 두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미국의 유명한 잡지 가운데 하나인 ‘라이프’지에 “아름다운 참사랑의 모습”이라는 기사와 더불어 한 페이지 가득 노인 부부의 사진이 실렸습니다. 그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잡지사의 사진기자가 영국을 방문하던 어느 날, 지하철 대합실 식당에 앉아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바로 앞자리에 노인 부부가 서로 부축하면서 마치 소꿉동무 어린이처럼 정답게 마주 앉았습니다. 남편은 비스킷을 주문하고 아내는 차 한 잔을 주문했습니다. 그 노인 부부의 옷차림으로 보아 퍽 가난한 부부임을 알 수 있었는데, 그들은 누구에게도 개의치 않고 서로 마주 보면서 조용히 서로의 손을 잡고 주문한 것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문한 비스킷과 차가 나왔는데, 남편은 비스킷을 천천히 먹기 시작했고, 아내는 뜨거운 차를 몇 모금 마시면서 남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잡지사 기자의 눈에 신기한 모습이 보였습니다. 비스킷을 반쯤이나 먹은 남편이 갑자기 틀니를 뽑더니 깨끗이 닦아서 아내에게 건네주는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그 틀니를 자연스레 입에 넣고는 남편이 주는 비스킷을 천천히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틀니를 빼준 남편은 아내가 마시던 차를 마시며 아내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사상가이자 시인인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의 소년 시절의 일화입니다.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는 아버지에게 소년 에머슨이 밖에서 큰소리로 외칩니다. “아빠, 좀 도와주세요. 송아지가 말을 안 들어요.” 소년 에머슨은 송아지를 외양간에 넣으려고 여러 방법을 써 보았지만, 송아지는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에머슨, 좀 더 힘을 줘 봐.” 아버지는 앞에서 당기고 에머슨은 뒤에서 밀어 보았지만, 역시 헛수고일 뿐입니다. 꼼짝 않는 송아지에게 여러 방법을 써 보았지만, 송아지는 오히려 더 난폭해져만 가고, 둘은 그만 지쳐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맙니다. 송아지는 화가 난 듯 마당 이곳저곳을 날뛰더니, 저 멀리 밭일을 하는 늙은 하녀 쪽을 향하자 위험을 느낀 아버지는 하인들을 불러 모읍니다. 그 사이 난폭해진 송아지와 마주 선 하녀는 오랫동안 소들을 보아 오면서 송아지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았습니다. 하녀는 난폭한 송아지에게 천천히 다가가서 송아지의 입에 자신의 손가락 하나를 물려 주자 송아지는 젖을 빨듯이 손가락을 빨기 시작합니다. 손가락을 송아지에게 물린 채로 뒷걸음질 치는 하녀를 송아지는 아무런 저항 없이 외양간으로 들어갑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둘이 힘을 합해도 할 수 없었던 일을, 늙은 하녀는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송아지를 제어하는 것을 보면서 깨달았습니다. ‘자신들이 송아지에 대하여 너무 무관심하고 무지했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반려동물에 관한 관심이 많습니다. 개, 고양이를 비롯하여 닭, 돼지, 거위, 파충류 등 많은 동물을 집안에서 식구 취급하며 삽니다. 인터넷에 올리는 영상들을 보면, 반려동물들이 꽤 똑똑하고, 사람들의 관심에 따라 반응하는 것을 봅니다. 이처럼, 영혼이 없는 동물들도 이렇게 관심과 사랑에 따라 반응하는데, 하물며 사람들은 어떠하겠습니까? ‘사랑은 국경을 초월한다.’라고 한 것처럼, 진정한 사랑은 경제적인 것이나 환경적인 것이나 그 어떤 것도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식당의 노인 부부에게는 주위의 환경과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체면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질 않았습니다. 만일 주위 환경에 마음이 쓰인다면 진정한 사랑을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눈에 콩깍지가 낀 듯’ 상대방의 단점마저도 장점으로 보이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며, 이러한 상대방을 생각하는 마음이 관심이며 배려입니다. 송아지가 늙은 하녀에게 이끌려 쉽게 외양간으로 들어간 것은, 지금 자기가 원하는 것을 알아주고 그렇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에 능통했던 율법 교사는 예수께 ‘영생을 얻는 조건’을 물었습니다. 예수님의 즉각적인 대답은 ‘율법 즉 하나님의 법을 실천하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삶에는 모든 것에 이론과 실제가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에도 이론 즉 교리가 있고 실천적인 삶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뜻, 진리 등을 표현하는 교리 즉 이론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도 지식적으로 아는 것과 경험 즉 삶으로 아는 것이 다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착각하는 부분이 여기에 있습니다. 지식적이고 교리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을 마치 영적인 삶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야고보 선생은 비유적인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야고보서 2:14-17절입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이 말씀처럼, 교리적인 믿음 이론적인 믿음은 아무런 능력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경험하고 나타내는 길은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율법 교사가 하나님의 법에 대하여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행동하는 관심과 사랑을 가르치셨습니다. 지금 강도를 만난 사람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고, 모든 소유물을 빼앗기고 버려졌습니다. 이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신앙적으로 위로하는 말도 아닙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아닙니다. 지금 당장 치료가 필요하고, 안전하게 쉴 수 있는 자리가 필요합니다. 이 필요를 알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관심과 사랑이 이 사람을 살게 합니다. 예수께서는 율법 교사에게, 또한 우리에게 이렇게 관심과 사랑을 행동하고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추위에 움츠리고 얼었던 땅과 식물들이 움을 틔우고 꽃을 피우게 하는 것은, 봄의 따사로운 햇살과 바람의 기운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려운 상황과 환경으로 몸이 힘들고, 마음마저 굳어진 사람들에게 일어서게 하고 힘을 내게 하는 것은, 진실한 관심과 사랑을 나타내고 전하는 것입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라는 말처럼, 상황에 맞는 따뜻한 위로, 진정을 담아 손잡아주고 포옹해주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풀어지게 합니다. 그래서 잠언 25:11절에서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사과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이론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깨닫고 믿은 것을 삶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강력한 가르침은, 주님이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진정한 관심과 사랑을 행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2-14절입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봄의 햇살과 피어나는 봄의 향기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사는 관심과 사랑을 나타냅시다. 이것이 사순절을 진정으로 생각하는 믿음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진정한 관심과 사랑을 행하여 주님의 관심과 사랑도 우리에게 넘치도록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