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 요한계시록 3:14-22
요한계시록 3:14-22,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자신의 장래 일이나, 생애의 결과에 관한 관심이 많습니까? 물론 자기 장래나 생애의 결과에 관심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얼마나 자주 생각하는가에 따라 삶의 굴곡의 차이가 있습니다. 별다른 생각 없이 주어지는 환경대로 살아간다면, 인생길은 환경 따라 굽이굽이 변화가 많을 것입니다. 반면에 장래나 생애의 결과를 자주 생각하면서 방향을 바로잡는다면, 거의 일정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바로, 자기 인생길의 방향에 관한 생각을 ‘관점(觀點)’ 혹은 ‘가치관(價値觀)’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관점이 그 사람이 무엇을 위해 사는지를 나타냅니다. 어떤 사람이나 단체, 국가의 미래를 예측하려면, 그들이 가진 관점이나 가치관의 방향을 보면 됩니다. 예수께서는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 가운데 마지막 일곱 번째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를 평가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라오디게아 교회가 가진 관점입니다. 지금도 예수께서는 우리 각 사람의 관점과 가치관을 살피십니다.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 말씀은 계시록 일곱 교회 중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주님의 편지입니다. 이 교회는 한 마디로 ‘세상 적으로는 부유했지만, 영적으로는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라오디게아는 기원전 250년에 안티오커스 2세에 의하여 건설되었고, 그의 부인의 이름을 따서 라오디게아라고 불렀습니다. 라오디게아의 특징은 첫째는 소아시아의 은행업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부자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본문 17절에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주변의 검은 양을 사육하는 농장이 많아서 옷과 의류산업이 발달했습니다. 특히 보라색과 광택 나는 검은 색 양모가 유명했는데, 그 당시에 네 종류의 외투가 전 세계로 수출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라고 하십니다. 세 번째는 라오디게아에 유명한 의학 학교가 있었고 두 가지 의료기술로 유명했습니다. 하나는 나드(nard) 향유로 만든 귀를 치료하는 연고였고, 또 하나는 ‘테프라 프리기아(Tephra Phrygia)'라는 안약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라고 하십니다. 이는, 주님이 보시는 관점과 우리가 가진 가치관은 다름을 뜻합니다. 라오디게아는 세상 적으로는 풍요로웠습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물질적 풍요와 육체적인 건강과 쾌락을 믿고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현재만을 바라보는 관점과 세상 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도시에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영적으로는 좋게 말할 것이 하나도 없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아무런 칭찬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열정이 없는 미지근한 신앙뿐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의 일들이 자신의 사업에 지장이 되면 선을 긋고 더 이상의 열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라고 요구하십니다. 이 말씀은 ‘결단하라. 그리고 너희의 모든 삶을 통하여 계속해서 열심을 나타내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웠지만, 영적으로는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는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 삽니까?
아들 둘을 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큰아들은 그 마을에서 가장 큰 부자였으며, 작은아들은 끼니만 겨우 연명할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큰아들은 잘살았기에 어머니에게 좋은 음식과 좋은 옷에 때때로 관광까지 시켜 드리며 편하게 모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머니는 가난한 작은 아들의 집에 더 자주 머물렀습니다. 큰아들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어서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어머니, 우리 집은 음식이나 경제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편하데 왜 자꾸 불편하고 형편도 좋지 않은 동생 집에 머물려고 하시는 거예요?” 어머니는 잔잔하게 웃으시며 말했습니다. “물론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는 것은 너희 집이 낫지. 하지만, 네 동생 집에는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하나 있거든. 네 동생은 밤이 되면 꼭 내 방에 들러 이 늙은 어미의 등을 긁어 주며 말동무를 해주거든.”
이 이야기의 의도를 아시겠지요? 미가서 6:6-8절을 봅시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서 미가 선지자를 통하여, 부패하고 타락한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리십니다. 미가 선지자는 당시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최상의 것을 드리려고 고민하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은, 최상의 제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은 나를 구원하시고, 일마다 때마다 함께 하시고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십니까?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세례요한도 사역을 시작하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선포했습니다. “회개하라.”라는 말은 ‘영적인 감각을 새롭게 하라.’라는 말입니다. 즉 ‘세상에 묻혀 살면서 무뎌진 영의 감각을 새롭게 일깨우라.’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포하신 이유는 모든 인간에게는 선한 요소와 악한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이러한 내면을 깨닫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로마서 7:21-24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신약성경 27권 중에서 13권을 썼으며, 주님과 동행하며 능력을 행한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하겠습니까? 주일에는 누가 봐도 하나님의 자녀이며 성도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주일이 지나고 세상으로 나가면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합니다. 아니면 겉으로 보기에는 존경받는 성도의 모습이지만, 영의 삶은 말라버려 말씀도 기도도 찬양도 잃어버린 삶을 삽니다. 정말, 내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사는지조차 생각하지도 못한 채 무감각하게 살 때가 많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러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외형적으로는 주변의 어느 도시보다 부요했으며 화려했습니다. 심지어 두 번의 지진으로 도시가 파괴되었을 때에도 다른 도시의 지원과 원조를 거절하고 자력으로 도시를 재건했습니다. 이처럼 부요한 도시의 교회는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12:13-21절의 ‘부자 비유’에 나오는 부자와 같았습니다. 부자가 중얼거립니다. “내가 곡식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지금의 교회들이 이렇게 변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살만하다고 주일도 대충 예배하는 둥 마는 둥, 영이 죽어가거나 잠들도록 내버려 두고 육신을 따라가기에 바쁩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무조건 잘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에스겔 14:3절입니다. “인자야, 이 사람들이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앞에 두었으니 그들이 내게 묻기를 내가 조금인들 용납하랴.”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임을 생각해보라.’라고 하십니다. 바꾸어 말하면,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를 돌아보라는 말씀입니다.
※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합니까?
주님이 보시는 것은 육신의 생활뿐만 아니라, 영의 생명과 영의 삶을 보십니다. 라오디게아교회가 ‘나는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했지만, 주님이 보시기에는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는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내 삶이 주님 보시기에 이렇게 무의미한 삶이 되지 않으려면, 보이지는 않지만, 영의 생명과 영의 삶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후회 없기를 원한다면, 영의 감각을 깨워야 합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이 의미가 있기를 원한다면, 영의 감각을 깨워야 합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기를 원한다면, 영의 감각을 깨워야 합니다. 영의 감각이 깨어나면 전혀 다른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주님을 사모하게 되며, 항상 기뻐하게 되며, 모든 것이 감사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본문 20-2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라고 하시는 것보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원하십니다. 즉, 나는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주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실제로 나를 통하여 움직이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이는 내가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호소는 개인적인 호소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너에게 들어가리라.”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주님을 주인으로 받아들이는 행위는 영적인 감각이 살아나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은 엄청난 약속을 하십니다. 주님을 주인으로 받아들이면 “내가 그로 더불어 먹으리라.” 즉 오랫동안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이 땅에서 우리가 육신으로 살 때, 이루시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하시는 영광을 약속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위하여 우리의 영적인 감각을 깨워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영적인 감각이 깨어납니까?
디모데전서 4:7-8절입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운동선수들이나, 음악가, 기술자, 기능공들의 숙련된 솜씨는 숱한 연습의 결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영적인 감각을 깨우려면, 경건에 이르도록 연습하고 연단해야 합니다. 우리가 몸의 건강을 위하여 매일 운동하듯이, 영의 감각을 위하여 매일 말씀과 기도로 단련하고, 예배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주님은 깨어 있음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계시록 16:15절입니다. “보라. 내가 도둑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자기 옷을 지켜’라고 하십니다. 어떤 옷입니까? 계 19:8절입니다.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하는 옷은 ‘옳은 행실’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는 의로운 삶이 옳은 행실입니다. 이 의로움은 예수께서 십자가의 피로 이루신 은혜입니다. 성도는 이 은혜를 힘입고 사는 옳은 행실의 삶을 이루어야 합니다.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사업에 열세 번이나 실패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이제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결국 열네 번째 시도 만에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실패를 하면서도 어떻게 포기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호주머니에서 보석 두 개를 꺼내어 보여주면서 말했습니다. “이것들을 보고 있노라면 결코 포기할 수 없었지요.”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하나는 눈부신 광채가 나고, 하나는 흐릿해 보이지요? 이 보석은 같은 것입니다. 다만, 흐릿해 보이는 이 보석은 열 번 정도 깎은 것이고, 눈부신 광채가 나는 이 보석은 백 번 이상 깎은 것입니다. 저는 인생도 이처럼 아픔과 고통의 칼날에 많이 깎일수록 더욱 빛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내가 만일 열세 번째에서 포기했더라면 아마 지금쯤 내 인생 전부가 수포로 돌아가 버렸겠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후 광야에서 40여 년을 살아야 했던 이유는 연단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옳은 행실을 갖도록, 영적인 감각을 깨우는 훈련과 연단의 기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녀로 살도록 연단의 길을 걷게 하십니다. 예수께서 라오디게아교회에게 이렇게 강하게 책망하신 것도, 영이 깨어나도록 돌이키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시대적으로 볼 때, 주님이 재림하시기 직전의 마지막 세대를 나타냅니다. 주님이 재림하시기 직전에는 세계가 극심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내 영이 깨어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이루어야 합니다. 미지근한 신앙은 버림받는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하여 영이 깨어나고 열정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넘치는 은혜의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