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하나님을 감동하시게 하는 삶
*** 하나님을 감동하시게 하는 삶 / 누가복음 17:11-19
누가복음 17:11-19,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 들어가는 말
예전에 어느 마트를 경영하시는 분이 “남의 돈주머니를 열게 하는 일이 어디 쉽겠습니까?”라는 말이 아직도 잊히지 않고 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그분과 이야기하던 중에, “많이 힘들지요?”라고 물었었는데, 그렇게 대답하신 것입니다. 상업이든지, 직장인이든지, 고객이나 경영자의 지갑을 여는 것이 힘듭니다. 심지어 아이들도 부모의 돈지갑을 열게 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지갑을 여시도록 해야 우리가 풍성해질 텐데, 이 일이 쉽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지갑을 여시도록 해야 합니까? 신명기 8:18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이며 주관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받을 수 있고 누릴 수가 있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전도서 6:2절을 봅시다. “어떤 사람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누리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지갑을 여시도록 하는 방법을 알고 사용합니까? 그리고 받은 은혜를 충분하게 누리고 있습니까? 이 시간에는 이 중요한 부분을 살펴보려 합니다.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 말씀은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 사건 중의 하나인 ‘열 명의 나병 환자를 고치신 이적’에 관한 내용입니다. 예수께서 생애의 마지막 여행으로 갈릴리 지역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실 때였습니다. 갈릴리와 사마리아 경계 지역을 지날 때, 어느 작은 마을에 들어가셨는데, 나병 환자 열 명이 멀리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시기가 예수님의 공생애 말기 때쯤이어서 예수님의 행적을 들어서 잘 아는 나병 환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너희 몸이 깨끗하게 나았으니 제사장들에게 검사를 받고 자유를 얻으라.’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이 나병이나 유출 병처럼 부정한 병을 검사하여 격리하거나, 병이 나은 것을 확인하여 사회로 복귀시키는 일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제사장이 있는 마을로 떠났습니다. 아마도 출발할 당시에는 나병이 그대로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참을 가다가 보니 자신의 몸이 나아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 순간은 꿈같았을 것입니다. 이제는 그리운 가족에게로 돌아갈 수 있고,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되었으니 그 행복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조급한 마음에 제사장에게로 향하는 발걸음이 빨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중의 한 사람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습니다. 그 사람은 큰 소리로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면서 ‘최소한 자신을 고쳐준 예수께 감사의 표현이라도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돌아와 보니 예수님은 아직 그곳에 계셨습니다. 아마도 그들을 기다리셨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감사합니다.’라며 절을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최소한 인간의 양심을 가진 사람이 이방인 한 사람뿐임을 보시고 탄식하셨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감사를 표한 그 이방인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 이방인 나병 환자가 거듭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하루아침에 육신의 불치병도 고침을 받았고, 자신의 영의 생명도 얻었습니다. 자기 인생에서 최고의 순간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고 감동하시는 일들이 있으며,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며 하나님의 지갑이 열립니다.
※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에 감동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감동하시게 하는 일은 많이 있습니다. 다 열거하지는 못하고, 가장 중요하고 근본 되는 것 두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시편 22:3절입니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이사야 43:21절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에베소서 1:13-14절입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들의 공통점은 찬송입니다. 찬송은 하나님을 높이며 영화롭게 합니다. 그래서 역대하 5:13절에서는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들이 일제히 소리를 내어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나팔 불고 제금 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되 ‘선하시도다. 그의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 하매 그 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예배하면서 큰 소리로 찬송하며, 손뼉 치고, 악기를 연주하고, 춤추며 찬송했습니다. 왜 이렇게 요란하고 힘들여 찬송하겠습니까? 이는 하나님을 기뻐하고 찬송하며 영화롭게 하는 것이, 하나님 백성들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원한다면, 생활 속에서 찬송을 많이 하십시오. 그리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자랑하고 나타내십시오. 하나님을 자랑하고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찬송은 곡조가 붙은 기도이므로 온 마음을 다하여 감사함과 기쁨으로 해야 합니다. 찬송에는 하나님을 기뻐함과 그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의뢰하는 모든 감정이 포함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과 행하심에 합당한 찬송보다 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감동하시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찬송은 예배에 속한 것이므로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됩니다.
찬송 다음으로 하나님을 감동하시게 하는 것 중에 우리가 잘 아는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윌리엄 로우’라는 분은 ‘엄숙한 부르심’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세계 최대의 성자는 기도를 많이 했다든가, 금식을 많이 했다든가, 혹은 자선을 많이 베풀었다든가 한 사람이 아니라,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한 사람이다.”
로마서 12:2절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그리고 히브리서 11:6절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감동하실 일을 찾아서 행하는 것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쫓아다니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말씀처럼, 예수께서 행하신 수많은 이적을 통하여 진실한 믿음이 하나님을 감동하시게 함을 알게 합니다. 이렇게 진실한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을 알지만, 이런 믿음을 나타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린아이가 부모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처럼, 전혀 의심 없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깊은 신앙에서 이루어집니다. 누가복음 17:6절을 봅시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마태복음 17:20절에서는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 할 것이 없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을 감동하시게 할 뿐만 아니라, 큰 능력을 나타내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많은 병 고침과 이적을 행하실 때, “네 믿음대로 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진정한 믿음에 이르는 길은, 하나님 말씀을 끊임없이 묵상하고 실천하며 기도로 주님과 교통하는 것뿐입니다.
※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감동하시면 은혜가 넘칩니다.
잠언 16:7절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어떤 사람과도 화목하며 은혜를 받게 하는 파격적인 은혜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힘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며, 하나님을 감동하시게 하면 하나님께서 높이시고 인정받게 하십니다. 솔로몬이 왕이 된 후, 일천 번제(燔祭)로 하나님께 예배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역대하 1:11-12절입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이르시되 ‘이런 마음이 네게 있어서 부나 재물이나 영광이나 원수의 생명 멸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장수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가 네게 다스리게 한 내 백성을 재판하기 위하여 지혜와 지식을 구하였으니, 그러므로 내가 네게 지혜와 지식을 주고, 부와 재물과 영광도 주리니, 네 전의 왕들도 이런 일이 없었거니와 네 후에도 이런 일이 없으리라.’ 하시니라.”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셨을 때, 사사로운 이득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백성들을 정의롭게 재판할 수 있도록 지혜를 구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이 구하지 않은 전무후무한 부귀영화를 모두 주셨습니다.
시편 50:14-15절을 봅시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그리고 23절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여러분의 생활이 찬송과 감사의 예배가 되게 하십시오. 그리하면 어려움과 고난이 닥치더라도 하나님께서 건져주시며 보호하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께 돌아와서 엎드려 감사했던 그 이방인 나병 환자에게 예수께서 선언하셨습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는 육신만 고침받은 것이 아니라, 그의 영의 생명까지도 얻었습니다. 이것을 두고 ‘금상첨화(錦上添花)’라고 합니다. 정말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일거양득(一擧兩得)으로 영과 육신의 온 삶에 복을 받은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저 감사했을 뿐인데 말입니다. 이방인 나병 환자가 했던 일은 자신의 병이 나은 것을 알고 즉시 예수님께 돌아와서 그 발아래 엎드려 감사했던 것뿐입니다. 돈 드는 일도 아니고 특별한 노력이 드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병이 나은 것을 깨닫는 순간에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감동하시게 했으며, 은혜를 더하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감동하실 일이 무엇인지 자주 관심을 가져 보십시오. 나를 죽음에서 건져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생각하십시오. 지금까지 나를 살게 하시고 내 삶을 인도하심을 생각하십시오. 내가 하나님께 관심을 두면 하나님께서도 나에게 관심을 두십니다. 내가 하나님을 멀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나를 멀리하십니다. 내가 형식적으로 하나님께 대하면 하나님께서는 나를 돌아보지도 않으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작은 은혜에도 감사하면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창고를 활짝 열어주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 풍성한 은혜의 삶의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