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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의 개념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918회 작성일 2024-06-16 16:14

*** 그리스도인의 삶의 개념 / 고린도후서 6:1-10

 

고린도후서 6:1-10, “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3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5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8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 들어가는 말

 

말씀에 앞서 먼저 하나 물어봅시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어떻습니까?

보편적인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을 느낍니까?

혹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불편하다거나, 손해나 불이익을 당하는 것은 없습니까?

지금 읽었던 말씀에서 이런 분위기가 물씬 풍깁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대적이 유대교였으며, 세상적으로는 그리스 로마 신화가 가득한 우상숭배의 온상이며, 정치적으로는 황제숭배의 위협으로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은 이러한 환경에 있었던 고린도 교회가 당면한 현실이 어떠했음을 사실적으로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개념을 정립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종종 ‘저 사람 참 개념 없다.’라고 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삶의 개념이란, 세상의 풍조에 흔들리지 않도록 잡아주는 정신적인 닻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본문 1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라고 하셨고, 3절에서는 ‘영적 직분이 비방 받지 않게 하고, 무엇에도 거리끼지 않게 하라.’라고 하십니다.

 

어느 대학에서 적응에 관한 실험을 했습니다. 토끼 두 마리에게 각각의 앞발에 깁스를 했습니다. 한 마리는 그 불편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습니다. 먹이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계속 깁스만을 뜯어내기 위해 이빨로 갉다가 털다가 혈안이 되었습니다. 이런 행동이 계속되다 보니 점점 약해졌고 행동도 둔해졌습니다. 다른 토기도 역시 처음에는 깁스를 물어뜯고 털기를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얼마가 지나자 도저히 뜯어낼 수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포기하고 먹이를 먹기도 하고 정상적인 활동을 했습니다. 당연히 앞다리가 불편한 것 외에는 건강하게 활동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도 이와 유사합니다. 어떤 사람은 매일의 삶이 기쁨도 감사도 생의 즐거움도 없이 어둡고 힘겹게 삽니다. 또 어떤 사람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밝고 건강하게 삽니다. 여러분이 보시기에도 이런 삶의 차이를 느낄 때가 있지요? 여러분은 왜 이런 삶의 차이가 난다고 생각합니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때’를 인정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우리가 사람에게나 환경에 휘둘리지 않고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도록 내 삶의 개념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고린도 서신에 관하여는 여러 차례 배경을 말씀드렸습니다. 고린도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지킨다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세상과 조금만 타협하면 재미있고 즐길 거리가 널려 있었습니다. 마치 지금 우리가 사는 환경과 같았습니다. 특히, 고린도 시는 잡다한 인종과 민족인 모여 사는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 국제적)적 도시였습니다. 약 20만 명의 자유민과 40만 명이 넘는 노예들이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상업 도시였기 때문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향락이 극에 달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책망하기도 하며, 위로도 하고, 하나님 나라에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집을 지어야 한다는 상급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강조했습니다. 이는 ‘세상에 휩쓸리지 말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개념을 가지라.’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의 시대가 이러했다면, 지금 우리의 시대는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본문 말씀처럼 지금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거리낌 없는 담대한 삶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 구체적으로 어떤 개념을 말합니까?

 

개념의 사전적인 의미는 ‘어떠한 사물 또는 현상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이라고 합니다. 즉 ‘기초적인 이해와 생각’ ‘기본적인 매너나 상식’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의 개념이란,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지식과 이해’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따르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라는 ‘제자의 길’이 있습니다. 그리고 보편적인 신앙의 삶에 관하여 사도 바울을 통하여 로마서 12: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이렇게 주님을 따르는 삶에 주어지는 여러 가지 환경과 상황에 대하여 본문 4-10절에 상세하게 열거합니다. 이 내용은 우리의 신앙을 유혹하는 세상의 환경과 신앙을 위협하는 온갖 시험과 어려움과 고난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환경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켜야 할 덕목과 하나님께서 보장하시는 은혜와 능력을 말씀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부분은 따로 있습니다.

앞서 말씀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일반적인 삶에 관하여는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했다면,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부분은 사도 베드로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개념을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예수께서 ‘너희들이 모두 나를 버릴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막 14:29)라고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예수께서 잡히시고 대제사장에게 심문받으실 때, 베드로는 바깥 뜰에 있다가 대제사장의 여종이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라고 하자, 세 번이나 “모른다.”라고 부인했고, 저주하며 맹세하기까지 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도망쳐버렸습니다. 오늘의 우리도 교회에서나 믿음의 식구들과 함께 있을 때는 모두 훌륭한 신앙의 모습들입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예수 믿는 티도 내지 않거나, 혹은 누군가 예수님을 비난하고 교회를 욕할 때는 모른 척 침묵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이 다른 사람에 관하여 뒷말하거나, 별다른 생각 없이 올바르지 못하게 행동합니다. 이것이 ‘신앙적 무개념’입니다. 이런 신앙적 무개념의 사람에 관하여 예수께서 경고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8:38절입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이 말씀은 ‘신앙적 무개념의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라는 의미를 완곡하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청년 시절, 부교역자 시절에, 부산의 충무동 시장, 용두산 공원, 부산역 광장, 서부 터미널, 해운대 해수욕장 등에서 노방전도 활동을 많이 했습니다. 처음에는 쑥스럽고,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담대해졌지만, 후에 전도팀에 들어온 청년들이 두 명씩 짝으로 활동했는데, 지나가는 사람에게 전도지를 내밀지 못하여 서로 미루다가 지나가 버리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어떤 때는 “예수 믿어라.”라고 전하면, 자기 주먹을 내밀면서 ‘내 주먹이나 믿으라.’라며, 조롱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마치 전염병에 걸린 사람을 대하듯이 그렇게 피하기도했습니다. 고등학생 때는,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올려놓고 잠시 기도하는 동안에 반찬을 가져가 버리기도 했고, 어떤 그리스도인 친구는 기도하는 것이 부끄러워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잠깐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전임 전도사 시절에 담당했던 청년부에서, 어떤 청년은 직장에서 회식하면서 부장이나 직장 상사가 술을 권할 때, ‘불이익이나 조롱이 두려워 예수 믿는다는 말조차 하지 못했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본문 4-10절까지를 다시 읽어봅시다. 지금 우리의 삶에서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사도 바울 시대와 지금 우리의 시대에 적용되는 하나님의 뜻이나 삶의 개념이 달라졌겠습니까?

시대는 달라졌고, 삶의 환경이나 상황도 많이 달라졌으며, 성경 시대의 문화와 지금 우리의 문화도 아주 다르지만, 하나님의 뜻이나 그리스도인의 삶의 개념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누가복음 18장에서 ‘과부와 재판장 비유’로 기도의 필요성을 가르치시면서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즉, 세상이 발전하면서 삶이 달라지고, 사람들의 의식이 변하고, 풍습이 달라지면서 ‘사람들이 더는 하나님의 뜻을 찾지 않게 될 것’이라는 염려이십니다. 이러할 때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4:13절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지금, 그리스도인의 삶의 개념을 무너뜨리고 생명의 길을 벗어나게 하려는 악한 영의 세력들이 온갖 삶의 덫을 놓고 사람들을 죽음의 길로 미혹합니다.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지금은 영적으로 잠들지 않도록 발버둥 쳐야 합니다. 영적으로 잠든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성경)에서 멀어지고, 기도하지 않으며, 세상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개념이 무너지면, 세상의 개념이 내 삶을 지배합니다. , 성경과 기도와 예배와 찬양이 내 삶에서 멀어지면, 세상의 즐길 거리와 돈에 민감해지고, 마음에는 불만과 불평이 일어나며, 조급함으로 영적인 판단력이 둔해집니다.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은 ‘내로남불’현상입니다. 자기는 무엇을 해도 괜찮고 합리적인 변명을 내세우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자기를 볼 줄 모르고 다른 사람의 약점만 보는 것입니다. 이런 삶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마음의 평안도 없습니다. 어떤 것에도 감사가 없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이 무의미하고 거추장스럽고 짜증스러움만 더하게 됩니다. 만일, 지금 내 삶의 모습이 이러하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의 개념이 무너지고 있음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 주님을 만나게 될지 모릅니다. 또한, 내가 어떤 상태로 주님을 만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내 영이 잠들지 않게 해야 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이해와 생각이 바르고, 신앙적인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미국 격언에 ‘햇볕이 쨍쨍 났을 때 건초더미를 만들라.’(Make hay while the sun shines.)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무슨 일이든지 그 일을 할 기회가 있다.’라는 뜻입니다. 세상일에서도 그러하지만, 영의 생명에 관한 일에는 때가 더욱 중요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기회가 끝나기 전에 지금 내 생활을 정비해야 합니다. 이것이 후회를 남기지 않고, 매일의 삶에서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는 비결입니다. 여러분, 간곡하게 부탁합니다. 주변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루를 살더라도 열정을 품고 주님을 따릅시다. 그리하여 매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는 복된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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