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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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함께하시는 주님의 능력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973회 작성일 2024-06-09 15:51

***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의 능력 / 마가복음 6:45-52

 

마가복음 6:45-52, “45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46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47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48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의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49 제자들이 그의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 50 그들이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하시고 51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52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 들어가는 말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 이적 이야기입니다. 이 시간에는 예수께서 이루신 이적이 아닌, 이적에 나타나는 제자들의 신앙 모습을 살펴 보려합니다. 이는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생각하는 관점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내 마음에 예수께서 차지하시는 비중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말이나 이론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능력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 능력은 예수께서 내 마음을 차지하시는 비율만큼 드러납니다. 고린도전서 4:20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의 마음에는 주님께서 차지하시는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를 잘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익숙한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이적 이야기입니다. 이 이적은 마태, 마가, 요한복음에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각각의 복음서마다 강조점이 조금씩 다릅니다. 마태복음 14:22-33절에는 ‘물 위로 뛰어내린 베드로를 등장시켜서 베드로의 의심을 통한 믿음을 강조’합니다. 마가복음 본문에는 ‘제자들의 깨닫지 못하는 마음으로 말미암는 불신을 강조’합니다. 요한복음 6:16-20절에는 간략하게 예수께서 물 위로 걸으신 사건 자체만을 기록해서 앞의 오병이어 이적과 다음에 나오는 생명의 떡에 대한 가르침의 중간 교량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세 복음서 모두에서 공통되게 강조하는 것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통하여 나타내시는 예수님의 신성(神性)’입니다.

 

이 사건은 예수께서 갈릴리 호수 북쪽의 벳새다 성읍이 있는 평야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의 장정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를 남긴 이적 사건 이후에 일어났습니다. 예수께서는 모였던 무리를 보내는 동안 제자들에게 먼저 호수 건너편으로 가도록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조용한 시간의 틈에 홀로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한편, 어둠이 깔린 갈릴리 호수를 작은 배로 노 저어 가던 제자들은 거칠어지는 바람과 파도로 어려움에 빠졌습니다. 제자들이 어려움에 빠진 모습을 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께서 아시고, 갈릴리 호수 위를 걸어서 제자들이 있는 배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의 배를 지나쳐 가려고 하셨습니다. 어두운 호수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본 제자들은 그러잖아도 파도로 고심하는데, 유령까지 나타났다고 혼비백산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배로 다가오셨고, 제자들에게 자신을 알리셨습니다.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자 바람도 파도도 가라앉았습니다. 자신들의 눈앞에서 벌어진 이 모든 사실에 놀라서 어안이 벙벙해 있는 제자들의 마음 상태를 성경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즉, 제자들이 지금까지 주님과 함께하며, 여러 가지 이적 행하심을 친히 경험하고도 예수님과 그 능력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입니다.

 

※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함께하시는 주님의 능력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능력을 말하기 전에, 먼저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살펴야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께서 여러분과 함께하심을 확신합니까? 확신한다면, 확신하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즉, 어떤 것이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증거라고 여깁니까? 이 확신이 없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아무런 의미도 능력도 없습니다. 이 확신의 증거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하나님 나라로 올라가시기 전에 약속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그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14:16-17절에서 성령님을 보내셔서 우리와 항상 함께 있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활에 관심을 가지시고 항상 함께하겠다.’라는 약속입니다. 또 다른 확신의 증거는, 주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표징입니다. 그 표징은 로마서 8:15절에 있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즉,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이 주님이 함께하시는 표징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3절에서 “또 성령으로 아니 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주님이라 부르고, 아버지라 할 수 있다는 것이 예수께서 나와 함께하시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님이 함께하심이 우리의 능력이 됩니까?

구약성경 ‘스가랴’는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성전과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 어려운 일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을 전합니다. 이 어려운 일이 어떻게 이루게 되는지를 천사가 스가랴 선지자에게 4:6절에서 말합니다.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즉 성전재건과 예루살렘을 일으키는 일은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며,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스룹바벨이라는 사람을 일으키시고 그를 통하여 이 일을 이루겠다고 하십니다. 이때로부터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까지는 엄청난 세월이 지났지만,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즉, 지금도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만 가능합니다. 혹,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도 잘만 사는데!’라고 생각되겠지요. 물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들을 통하여서도 역사하십니다. 다만, 그 결과가 전혀 다릅니다. 이런 생각을, 다윗 왕 때 성가대 지휘자 중 한 사람이었던 ‘아삽’도 했었습니다. 시편 73편에 대단히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삽은 악인들의 형통함을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라고 탄식합니다. 그리고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깨달았나이다.”라고 합니다. 아삽의 깨달음은 ‘주께서 악인들을 실족하여 파멸에 빠지게 하신다.’라는 결과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아삽처럼, 예수님을 알지 못했고 능력을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이 사실을 본문 52절에서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무능했던 원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본문 바로 앞에 기록된 ‘오병이어의 이적’에서도 나타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라고 하시자, 제자들은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라고, 불가능함을 나타냈습니다. 이처럼, 예수께서 함께하셨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의 우리도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심지어 예수님이 나와 함께하심을 믿는다고 할지라도, 예수님과 예수님의 능력을 깨닫지 못하고 의지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깨닫고 의지한다는 것이 결단코 쉽지 않다는 것은 성경에서 많은 예로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러했고, 출애굽하여 광야 생활과 가나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자손들이 보여줍니다. 예수님 당시의 군중들도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을 보았고, 말씀을 들었지만,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았고, 어떤 능력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던 소수의 사람만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했던 사람들의 공통된 점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답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30년 전, 미국 서부 어느 작은 도시에서 어린 남자아이가 상점마다 들어가서 물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여기서 하나님을 파시나요?” 가게 주인들은 하나 같이 아이가 장난치는 줄 알고 호통치며 내쫓았습니다. 아이는 포기하지 않고 49번째 가게에 들렀습니다. 그 가게에는 손님으로 보이는 60이 넘은 노인이 있었습니다. 아이가 가게 주인에게 묻는 말을 듣고 노인은 다정한 목소리로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무엇을 하려고 하나님을 사려느냐?” “예, 부모님 모두 세상을 떠나시고, 삼촌 집에서 사는데, 삼촌이 일하다가 떨어져 혼수상태입니다. 그런데 의사가 ‘삼촌을 살려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밖에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노인은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는 주스 한 병을 주면서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란다.’라고 했습니다. 아이는 너무나 기뻐서 음료수를 가지고 삼촌에게 가서 입에 흘려 넣었습니다. 다음 날, 신기하게도 서부지역 최고의 의사들이 삼촌이 있는 병원으로 와서 치료하기 시작했습니다. 놀랍게도 삼촌은 회복하기 시작했고, 퇴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삼촌은 감당하지 못할 치료 비용을 듣고는 망연자실했습니다. 그때 병원 직원이 “이 비용은 유명한 억만장자 노인이 이미 지불 했습니다.”라며 편지를 주었습니다.

“사실, 모든 비용은 자네의 어린 조카가 다 낸 것이라네. 자네 조카가 자네를 위하여 하나님을 찾아다녔으니 말이야. 자네를 살린 건 조카와 하늘에 계신 그분이라네.”

 

답을 찾으셨습니까? 맞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아모스 5:6절에서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라고 하시며, 예레미야 33:3절에서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7:7-8절에서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받을 것이고, 찾아낼 것이고, 열릴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능력이 임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입니다. 기도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하고, 아무리 선한 일을 힘쓰고, 부귀영화를 누리고, 만사형통한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또한, 기도를 통하지 않고 이루어질 수 있는 하나님의 역사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거센 바람과 풍랑으로 죽을 고생하면서도 예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도 못했고, 예수님의 능력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마가복음 9:29절에서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감리교 창시자이며 전도자인 ‘요한 웨슬레’는 “가장 최선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The best of all is God is with us.)”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주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믿음에, 주님이 세상의 주인이시고 나의 주인이시며, 모든 능력을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믿는 믿음을 더하여 주님을 찾고 부르십시오. 그리하여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며 사는 능력의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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