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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걸고 지켜야 할 것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2,901회 작성일 2021-11-16 14:32

*** 목숨 걸고 지켜야 할 것 / 요한계시록 2:1-7

 

요한계시록 2:1-7, “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 들어가는 말

 

사람의 시간적인 삶의 패턴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과거형의 사람, 현재형의 사람, 미래형의 사람입니다. 과거형의 사람은 자신의 과거에 연연하여 자신의 현재까지도 망치는 사람입니다. 미래형의 사람은 ‘앞으로 잘하면 되지’라면서 장래의 계획에 치중하는 사람입니다. 현재형의 사람은 과거에 매이지 않고, 미래를 계획하지만, 현재를 충실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이미 흘러간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아쉬워하며 연연하거나, 불확실한 미래만 바라보지 않고, 현재를 잘 활용하고 가꾸는 것이 가장 발전적인 삶을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현재의 중요성을 히브리서 3:13-14절에서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라고 하십니다. 이 말을 바꾸어보면, ‘초심(初心)을 잃지 말라.’라는 것입니다. 과거는 지나갔으니 더는 우리의 소관(所關)이 아니며, 미래는 현재의 삶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므로 우리의 삶은 지금부터가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처음의 설레는 마음과 감격을 쉽게 잊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처음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열정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런 처음의 설렘과 열정을 좋아하시는 분이 또 있습니다. 온 우주의 주인이시며 우리의 아버지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초대교회 당시의 소아시아 지역 일곱 교회 중 하나였던 ‘에베소 교회’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너를 나무랄 일이 하나 있다. 네가 나를 처음만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네가 처음으로 나를 사랑하던 그 시절을 돌이켜 보라. 그래서 그렇게 달라진 이유를 찾아 깊이 뉘우치고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 그전처럼 힘써 노력하라. 만일 그렇게 하지 않을 때는 내가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치워 버릴 것이다.”(현대어성경)라고 하셨습니다. 즉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처음 예수님을 믿던 그때의 설렘과 감격과 열정으로 표현된 뜨겁던 사랑이, 세월이 지난 지금에는 변질되어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그 처음 사랑이 변질되고 식어가는 원인을 찾아서 빨리 고치고 다시 처음의 설렘과 감격과 열정의 사랑을 회복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처음 하나님을 향하던 사랑과 감격을 지금도 유지되고 있습니까? 이것이 중요한 것은 우리의 목숨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우리가 목숨 걸고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봅시다.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가운데를 거니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말씀을 듣는 것으로 편지를 시작합니다. 일곱별과 일곱 금 촛대는 모두 일곱 교회를 상징합니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일곱별을 붙잡고”라고 하셨습니다. ‘붙잡다.’라는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손안에 교회 전체를 붙잡고 계신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예수님께 속해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신다.’라는 것은 ‘모든 교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내용은 지금의 교회 된 우리도 역시 해당됩니다. 사실 에베소 교회는 영적인 에너지가 충만했으며, 기독교 정통성을 잘 보존한 교회였습니다. 예수께서 본문 2-3절에서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심각한 결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이 말씀에는 우리가 이해해야 할 중요한 사항이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이단 사냥하는데 너무 심취해서 형제간의 사랑을 잃은 것입니다. 마음이 굳고, 비판적이고, 따지고, 잘못 이해하는 완고한 독선 때문에 사랑의 정신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면으로는, 마치 신혼 기간이 끝나서, 결혼 때의 사랑이 기억으로만 남아 있듯이, 하나님께 대한 처음 열정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 살펴볼 것이 바로 이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이 하나의 결점이 생명과 직결되는 너무도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5절입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이 말씀에는 세 가지의 명령이 있습니다. “생각하라. 회개하라. 행하라.”라는 명령입니다. 이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촛대를 옮겨버린다.’라고 하십니다. 이는 ‘영적인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처음 사랑과 열정을 회복하는 것’은 우리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것입니다.

 

※ 구체적으로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을 알려면, 예수님께서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다.”라고 하신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처음 사랑을 버렸다.”라는 말은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사랑하기는 하지만 처음과 같지는 않다.’라는 것입니다. 즉 ‘변질된 사랑을 하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차라리 사랑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지만, 가면으로 가려진 변질된 사랑이라면 사람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에는 열심도 있고, 헌신도 있고, 희생도 있고, 지식도 있었습니다. 이것을 주님께서도 칭찬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 하나가 부족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전과 같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회복하라고 하신 처음 사랑은 무엇이겠습니까?

 

옛날 헬라의 부강한 왕이 있었습니다. 처첩들이 많았는데 그 처첩들은 저마다 ‘자신이 왕을 제일 많이 사랑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왕이 처첩들을 모아놓고 “너희들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희가 원하는 것을 선물로 주겠다. 나라의 주권만 남겨 놓고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말하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처첩들은 보석, 집, 토지, 높은 직위 등등. 서로 좋은 것을 차지하려고 싸우며 야단이었습니다. 왕은 한 사람씩 그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적었습니다. 그런데 한 부인은 아무것도 달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왕이 그 부인에게 “너는 왜 원하는 것이 없느냐? 욕심도 없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 부인은 “아니,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당신입니다. 당신을 갖고 싶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왕은 자신을 가장 진실하게 사랑한 이 부인을 영부인으로 삼았습니다. 다른 처첩들은 왕보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더 사랑했지만, 한 부인은 오직 왕을 사랑한 것입니다.

 

잠언 8:17-18절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부귀가 내게 있고 장구한 재물과 공의도 그러하니라.” 그리고 요한복음 21:15-17절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물으셨던 것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도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라고 고백하지만, 실상은 예화 속의 처첩들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복’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집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에도 늘 ‘…주십시오. …해 주십시오.’라는 ‘달라’는 내용이 태반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헌신, 봉사, 위대한 일, 많은 사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을 원하시며, 또한 우리도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고 즐거워하기를 원하십니다. 호세아 6:6절을 현대어 성경으로 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제물을 바치기 전에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다.”

 

우리 마을 아파트 앞 도로변, 혹은 마을의 도로변에 거의 매일 동네 할머니나 아주머니들이 채소나 과일을 파는 것을 봅니다. 다 팔아봐야 몇만 원이 되지 않는 채소들이나 철따라 나는 과일들을 난장에 펴놓고 파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분들은 농사를 짓는 분들이어서 자신들이 농사지은 농작물을 파는 것입니다. 무더운 날씨나 웬만큼 춥거나 비가와도 파라솔 하나 세워놓고 앉아서 장사합니다. 그런데도 힘든 기색도 짜증스러움도 없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 분들에게는 사랑하는 가족들, 자녀들이 있습니다. 남들이 보면 ‘그 몇만 원을 위해 그 고생을 하나!’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그분들에게 그 몇만 원은 자식의 꿈을 열어주는 희망입니다. 몇 해 전에는 한 해 내내 채소를 팔고 단감을 팔아서 아들 승용차를 사 줬다고 자랑하는 할머니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힘들지 않습니다. 가족을,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고생하며 일하고, 돈을 버는 것도 사랑하는 가족들과 미래를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예배하는 것이나, 헌신하고 봉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며, 나 자신의 행복한 미래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지금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며, 가족과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의 환경이 혼탁하고 불의가 많아서 우리 그리스도인들마저 사랑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4장에서 마지막 때에 세상에서 일어날 일들을 말씀하시면서 12절에서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에베소 교회도 역시 당시의 이단과 혼란스러운 환경을 이겨내려다 보니 사랑의 마음을 잃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이 시대의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관심이며 사회를 향한 관심입니다. 야고보서 4:4절을 공동번역으로 봅니다. “절조 없는 사람들! 이 세상과 짝하면 하나님을 등지게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누구든지 이 세상의 친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가 됩니다.” 지금 우리는 사랑과 관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 그러면, 사랑과 관심을 어떻게 회복합니까?

 

본문 5절 상반절입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현대어성경/ “네가 처음으로 나를 사랑하던 그 시절을 돌이켜 보라. 그래서 그렇게 달라진 이유를 찾아 깊이 뉘우치고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 그전처럼 힘써 노력하라.”) 우리가 무슨 일을 하다 보면 어떤 분들이 “그때가 좋았는데…”라는 한숨 섞인 말을 하는 것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이는 자신의 생애에서 현재와 비교하면서 기억에 남을만한 좋은 부분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에서도 처음의 감격과 설렘과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그 시절로 돌아가 보아야 합니다. 타임머신이 있어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일단 그 시절을 회상하면서 그때의 감격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 그때는 이랬었구나!”라는 것을 돌이켜 보는 것입니다. 이 과정이 중요한 것은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야겠다는 필요성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음에는, 지금의 현실을 돌아보면서 처음 마음과 지금과의 차이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좋지 않은 면으로 ‘많이 변했구나!’라는 마음이 든다면, 변하게 된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아마도 ‘생활이 어려웠다.’ ‘사는 것이 바빠서 여유가 없었다.’ ‘세상 친구들’ ‘신앙의 회의’ ‘신앙적인 게으름’ 등등의 많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것이었든지 하나님과 이웃이나 가족을 향한 순수하고 아름다운 설렘과 감격의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라면 회개하고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의 계약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처음의 순수한 사랑을 잃어버리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쫓겨난 슬픔보다는 사랑을 잃은 하나님의 마음이 더 아프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죽했으면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인간을 위한 속죄 제물로 주시기까지 하셨겠습니까? 이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일서 4:9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이 크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돌아가지 않으면, 본문 5절에서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라고 하십니다. 이 촛대는 교회를 의미하며, 또한, 오늘의 성도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듯이 하나님 자녀의 지위를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 속에서 작은 부분부터 하나님을 생각하고, 가족과 이웃들과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이해하며 돌아보면서 사랑과 관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것은 반드시 회복해야 하는,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걸린 문제입니다.

 

이제는 환경이나 상황, 다른 사람들을 핑계로 삼지 말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열심을 내어, 사람과 그리고 하나님과의 사랑과 관심을 회복합시다. 그리하여 진정한 미래가 보장된 하나님 자녀로서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는 행복한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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